나폴레옹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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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나폴레옹의 등장과 제1제국

프랑스 역사에서 영웅이라고 하면 백년 전쟁의 '잔다르크'와 '나폴레옹'의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잔다르크와는 달리 나폴레옹의 역사적 평가는 생각처럼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프랑스 혁명의 영웅이면서 동시에 혁명을 통해 민주정부를 탄생시킨 프랑스를 다시 황제정으로 되돌린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과연 민주화의 아군인가, 아니면 적이었는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71년 프랑스령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프랑스의 영토이기는 하지만 그 위치는 이탈리아와 더 가깝다. 성장한 나폴레옹은 파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지만, 당시에 그는 심한 코르시카 억양 때문에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한 환경이었기에 나폴레옹 본인은 '프랑스 혁명'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던 것 같다. 그가 육군에서 출세를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사관학교 시절부터 대포를 잘 사용했기 때문인데,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당시는 그다지 실용적이라고 평가받지 못하고 있던 대포를 이용해 반혁명세력인 '제1차 대불동맹'에 승리를 거듭하였다. '툴롱 포위전'에 승리한 나폴레옹은 불과 24세에 준장으로 승진하게 되었지만, '자코뱅파'의 '로베스피에르'의 동생과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한때 좌천되기도 했다. 그래도 혁명기에 대외적으로 프랑스 주변의 혁명에 반발하는 적들과의 전쟁에서 그의 군사적 재능은 필수였기 때문에, 왕당파에 의한 '방데미에르 13일 반란'때 다시 활약하여 국내 군사령관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 후는 이탈리아 원정을 거쳐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연전 연승하여 수도인 '빈'을 점령하였고,  '캄포포르지오 조약'을 맺어 제1차 대불동맹을 붕괴시키기에 이른다. 그 후의 1798년에는 당시 영국 식민지이자 해상운송의 주요 지점이었던 이집트로 원정을 개시, '피라미드 전투'(엠바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나일 해전'(아부키르 만 해전)에서는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패배한다. 이 이집트 원정 때 가져온 '로제타 스톤'에 쓰인 '히에로그리프'(고대 이집트 신성문자)는 프랑스의 언어학자인 '샹폴리옹'에 의해 해석되어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나일 해전의 승리로 기세를 잡은 영국은 1798년에 '제2차 대불동맹'을 결성해 프랑스를 위기로 몰아간다. 프랑스의 지중해 함대가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나폴레옹과 원정군은 한때 이집트에 고립되었지만, 나폴레옹은 독자적인 판단으로 소수의 측근과 함께 귀국하면 국민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다. 그리고 그대로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타도하면 자신을 '제1통령'으로 하는 '통령정부'를 수립한다. 그다음 해에는 두 번째의 이탈리아 원정 개시하여, 1800년에 '마렝고 전투'에 승리하고, '뤼네빌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켰다. 같은 해에 '콩코르다트'를 통해 교황청과 화해하고, 1802년에는 영국과 '아미앵 조약'이 체결되면서 제2차 대불동맹은 해산하게 된다.

프랑스 제1제국

나폴레옹은 아미앵 조약이 체결된 후에 '종신통령'에 취임지만, 1804년에는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에 취임해, '프랑스 제1제국'이 시작된다. 이 사건에 대해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베토벤'이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고 작곡 중이던 교향곡 제3번의 악보의 표지를 찢고 분노한 일화가 유명하다. 나폴레옹 황제 취임에 반발한 각국은 '제3차 대불동맹'을 결성되며, 1805년 10월에는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은 다시 넬슨 제독에 패배하면서 재해권을 잃어버리고 영국 본토로의 공격을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에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삼제회전)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하여 '프레스부르크 조약'이 체결된다. 프랑스의 유명한 '에투알 개선문'은 이 승리를 기념하여 건설하게 된다. 이 시기는 나폴레옹과 프랑스 전성기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인데, 영국, 러시아, 스웨덴, 오스만 제국을 제외한 유럽의 대부분이 프랑스의 영향권 안에 있어 형 '조제프'를 '나폴리의 왕'으로,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왕'으로 앉히고 '라인 동맹'을 결성하여 '신성 로마 제국'을 사실상 해체시켰다. 1808년 스페인의 '부르봉가'에의 개입하여 다시 형인 조제프를 '스페인 왕'으로 임명하는 등 그 영향력이 유럽대륙 전역에 걸치게 되었다. 유명한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 '5월 3일의 처형'은 1808년 마드리드에서 있었든 프랑스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현장을 그린 그림으로 당시 프랑스의 지배에 대한 스페인 민중의 반감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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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년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무역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실시하였지만, 당시 '산업혁명'으로 품질과 생산량 면에서 우수한 영국의 물자를 수입하지 못하게 되면서 물자 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게다가 반대로 영국이 '해상봉쇄'를 취하면서 극심한 생필품 부족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나폴레옹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게 된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은 대 러시아 정책의 실패에서 기인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1807년에 '틸지트 조약'으로 숙적 '프로이센'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하고 폴란드를 '바르샤바 공국'으로 부활시키는 등 프로이센의 영토와 인구를 감소시키고,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에 참여하게 만들면서, 사실상 유럽 대륙을 평정하고 유럽 내에서 영국 이외의 위협을 잠식시켰다. 하지만 계속되는 영국과의 밀무역에 나폴레옹이 강경하게 대응면서, 압박에 견디다 못한 러시아가 1810년에 대륙 봉쇄령을 깨고 영국과의 무역을 개시하게 되고, 그리하여 1812년에는 나폴레옹에 의한 '러시아 원정'이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은 동맹국을 포함해 60만에 달하는 대군으로 러시아를 공격했지만, 러시아의 '청야 전술'로 현지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모스크바까지 점령하였었지만, 계속 어려워지는 보급 문제에 전쟁 지속의 어려움을 느껴 겨울이 오기 전에 철수하기 시작한다. 계속되는 러시아군의 공격과 불안정한 보급, 그리고 혹독한 겨울 날씨로 인해 러시아에서 완전히 철수하였을 때는 당초 원정군의 1% 정도의 숫자에 불과한 5000명 정도의 병사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정세가 나폴레옹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어 '제6차 대불동맹'이 결성되어 다시 유럽 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러시아 원정에서 많은 정예 병사들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초기 전투들에서 나폴레옹이 승리하자, 동맹군은 '트라헨베르크 작전'이라고 불리는 나폴레옹과의 직접적인 전투는 피한다는 전략을 세우게 된다. 동맹군의 전략이 효과를 발휘해 나폴레옹군은 조금씩 와해되기 시작하였고, 1813년에 일어난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는 대패하면서 프랑스 제1제국은 몰락하게 된다. 이듬해인 1814년에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함락되었고, 나폴레옹은 강제로 퇴위되어 '엘바 섬'으로 영구 추방되었다. 나폴레옹은 당시 로마왕이었던 자신의 아들 '나폴레옹 2세'를 후계자로 하려고 하였지만, 동맹국에 의해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하고, 전후 처리를 위해 '비엔나 회의'가 개최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복귀하면서 다시 복위하는데 성공하지만, 연합국과 다시 전쟁에 돌입하게 되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폐되었다. 그렇게 나폴레옹은 1821년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사망한다.

나폴레옹의 내정 정책

나폴레옹은 군인 출신 황제로 주로 그의 군사적 업적이 유명하지만, 전국적으로 세금 제도와 행정 제도를 정비하는 등 개혁적인 내정 정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800년에는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여 화폐를 통합하고 경제 안정을 도모하였으며, 1802년에는 유명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창설했다. 그리고 1804년 '나폴레옹 법전'(프랑스 민법전)을 제정하였는데, '만민의 법 앞에서의 평등, '사유재산의 존중', '경제 활동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 근대적 가치관을 도입한 당시에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강함의 비결

나폴레옹 개인의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부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프랑스의 국가적 잠재력이 높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약 2700만 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약 1500만 명이라고 알려졌던 영국의 배에 가까운 인구수이다. 동 시기 독일의 프로이센은 900만 명, 유럽 전체에서 1억 7000만 명 정도였다고 하기 때문에 인구수만으로도 봐도 대국이었다. 그리고 공업 생산량이 당시 산업혁명이 발원지였던 영국에 뒤를 이어 2위였으며, 프로이센의 약 3배 정도였다고 한다. 프랑스는 영국에 이어 산업 혁명이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인구와 산업적으로 우위에 있던 것이 그 힘의 비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생산량이 많은 영국과 반목하면서 대륙 봉쇄령을 내놓은 것은 나폴레옹 최대의 실책의 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경제적으로 곤궁한 유럽 전역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와 러시아 원정을 감행하게 하는 원인을 만들어 냈다. 또, 프랑스군은 다른 군대에 비해 사기가 매우 높았던 것도 있는데, 현재 프랑스의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 혁명 때에 만들어진 노래로, 프랑스인이 '국민'이라고 하는 개념을 가지고 소위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중에 '국민주의'(내셔널리즘)의 고양으로 이어지는데, 봉건적 지배하에 있었던 러시아나 오스트리아 병사에 비해 프랑스 국민의 사기 정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위에 서술한 베토벤의 일화를 보면, 당시의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많은 유럽의 민중이 나폴레옹에게 기대하고 있었던 바를 짐작할 수 있다. 높은 국가적 잠재력과 자긍심을 가진 시민, 그리고 나폴레옹 개인의 카리스마와 군사적 재능에 의해 당시 프랑스가 유럽 대륙 전역에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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