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영국 로마 기독교와 갈라서 영국 국교회를 만든 왕 「헨리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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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군주

'헨리 8세'는 1491년 영국의 그리니치에 있는 프라센티아 궁전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영국의 왕인 '헨리 7세'로, 그는 젖을 떼기도 전인 1493년에 드바 성의 성주가 되었다. 이듬해인 1494년에는 왕의 차남이자 왕위 계승권자 2위의 신분으로 요크의 공작으로 임명되었으며, 명문에 불과하긴 하지만 잉글랜드 문장원의 총재와 아일랜드의 총독의 자리에 앉게 된다. 헨리 8세는 왕가의 일원으로 어렸을 적부터 유복한 생활을 하며 우수한 교육을 받았는데, 형인 '아서 튜더'가 차기 왕으로 확정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대신 종교계의 직분을 받기 위해 요크 대주교였던 '토머스 울지'가 가정교사를 맡았다. 그는 우수한 가정교사들에게 교육을 받기도 하였지만, 개인적으로 상당히 뛰어났던 것 같은데, 라틴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503년 아서가 병으로 갑작스럽게 요절하면서 헨리 8세가 정식 후계자가 되었는데, 헨리 7세는 아서의 정략결혼 상대였던 스페인의 '카탈리나 다라곤'(아라곤의 캐서린)을 그와 약혼시켰다. 헨리 8세는 이 혼인에 대해 상당히 불만스러웠던 것 같지만, 정치적 목적을 위한 정략결혼을 거부하지 못했고, 두 사람은 1509년 헨리 7세가 사망한 이후에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헨리 8세는 17세의 나이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즉위하자 헨리 7세의 중신들 중 평판이 안 좋은 이들을 반역죄로 몰아 처형하는 등, 정권을 장악하고 자신의 권위와 인기를 재고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그가 신임하는 토머스 울지가 정책을 맡아서 처리하였다고 한다. 헨리 8세는 그보다는 예술과 스포츠에 관심을 두었으며, 음악가이자 작가,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도박과 운동 경기, 사냥을 즐기는 등 전형적인 르네상스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영국 국교회의 성립

헨리 8세는 상당히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의 모습도 보여주었는데, 1511년에는 교황 '율리오 2세'와 프랑스 사이에 갈등이 생기자,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과 함께 '신성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와 대적하였다. 이는 프랑스 영토에 대한 야욕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헨리 8세는 1513년 '스퍼스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이 전쟁에서 프랑스에 대한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고, 대신 프랑스를 도와 참전한 스코틀랜드와 치른 '플로든 전투'에서 승리하여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를 전사시키는 등 스코틀랜드에 대한 효과적인 견제에는 성공하였다. 또 1521년에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에 반발하여 칠성사를 옹호하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교황인 '레오 10세'는 이 공을 기려 그에게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헨리 8세의 친 가톨릭적인 행보는 후계자 문제로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는데, 그는 본래도 카탈리나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녀와의 사이에서 딸 '메리 1세'를 제외한 후계를 보지 못하면서 더욱 심화된 것으로 보인다. 1525년 헨리 8세는 카탈리나 대신 그녀의 시녀였던 '앤 불린'과 연인사이가 되었고,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하기 위해 카탈리나와의 결혼을 무효로 하기 위한 시도를 하게 된다. 한편 카탈리나도 이에 대해 저항하였는데, 그녀의 입장에서는 여러 여자와 외도를 일삼는 남편을 지금까지 잘 보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쫓겨나게 생긴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결혼 무효 시도는 실패하였는데, 헨리 8세의 결혼 무효 요청에 대해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탈리나의 조카가 되는 '카를 5세'의 눈치를 보며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고, 결국 원하는 결론을 얻지 못한 헨리 8세는 새로운 방향으로의 접근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과거 교황과 반목했던 영국 왕들이 했던 것처럼 영국 내 교회의 지배권을 얻기로 한 것이다. 헨리 8세는 '토머스 모어'와 '토머스 크랜머' 등을 중용하고, 이들을 이용하여 1529년 기대해 부응하지 못한 토머스 울지를 숙청하였으며, 1534년에는 '수장령'을 공표하여 영국 내 교회에서 교황의 지배권을 배제하는 조치를 하였다. 그런데 헨리 8세의 조치는 단순히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는데, 그는 수도원들을 철폐하거나 통폐합하면서 여러 교회의 재산들을 몰수하였고, 토머스 모어를 포함하여 이에 반발하는 신하들을 처형하는 등의 조치를 하였고, 결국 로마 교황청에서는 헨리 8세를 파문시키게 된다. 사실 잉글랜드에서 이러한 일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종교 개혁과 맞물리면서 일이 더 커져버렸고, 결국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영국은 로마 가톨릭과 완전히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 또한 종교 개혁 자체를 목표로 생긴 것은 아니어서, 개신교의 교리와 가톨릭의 구조를 가진 기형적인 형태로 구성되었고, 이는 후에 상대적으로 가톨릭에 대해 온건한 태도의 성공회 신도들과 독실한 개신교도 들이었던 청교도와의 사이에 분쟁이 생기는 원인이 되었으며, 그 결과 많은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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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명의 왕비와 공포 정치

헨리 8세는 많은 애인들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식들을 보았다고 하는데, 정작 정식 왕비인 카탈리나와의 사이에서는 후계자를 얻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후계자 문제로 분쟁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종교적 문제를 일으키면서까지 왕비를 바꿨지만, 앤 불린과의 사이에서도 딸 '엘리자베스 1세'만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헨리 8세는 다시 새 아내를 얻기 위해 앤 불린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하였으며, 이후로도 순차적으로 여러 왕비를 얻어 총 6명의 왕비를 두었고, 그중 두 명과 이혼하고 두 명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 8세는 두 딸과 함께 한 명의 아들인 '에드워드 6세'만을 얻을 수 있었다. 헨리 8세가 이러한 폭정에 가까운 행태를 일삼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왕의 권위가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는 즉위 초부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선왕의 중신들을 반역죄로 몰아 처형하였고, 이후로도 방해가 되는 인물들은 역시 반역죄 등을 들어 처형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음에 안 드는 이들은 처형해 버리고, 교황과도 싸우는 왕에게 대항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 이 시기에는 평민 부유층인 '젠트리'들이 대거 성장하여 의회에 진출하였는데, 이들은 기존 가톨릭 교회들이 해체되면서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반사이익을 얻은 계층이었고, 헨리 8세는 이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헨리 8세는 대대적인 빈민 구제 정책도 실시하였는데, 당시에는 인권이나 복지에 대한 관념 자체가 부족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정책은 표면적인 빈민의 숫자를 줄이기 위한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빈민들이 끌려가 강제 노동에 종사해야 했으며, 이를 거부하는 이들은 모조리 처형당하였다. 이 정책들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까지 이어졌는데, 당시에도 크게 변화된 점은 없어서 여전히 빈민들을 게으른 사람들이나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 정도로 취급하였다. 결국 헨리 8세의 이러한 방식의 통치 방식은 시대 변화와 맞물려 여러 갈등 구조를 만들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후 영국은 거대한 종교적, 경제적 분란에 빠지게 된다. 헨리 8세는 1547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후계는 유일한 적장자인 에드워드 6세가 이었지만, 헨리 8세의 기대와는 달리 제위 6년 만인 1553년 16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이후 두 딸이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가 집권하면서 영국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영국은 '삼왕국 전쟁'과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는 등 극심한 내전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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