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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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사진

성공한 변호사

'제임스 뷰캐넌'은 1791년 펜실베이니아 주의 머서스버그 인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 출신의 이주민이었는데, 머서스버그에서 농장과 잡화점을 운영하며 부동산 투자를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이를 통해 상당한 재산을 모아 인근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뷰캐넌도 유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상점에서 일하며 산수와 부기를 배웠고, 마을의 교회에서 목사에게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다고 한다. 이후 칼라일에 있는 '디킨슨 대학교'에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나갔는데, 도중에 교칙을 어겨 한번 퇴학당하기도 하였지만, 개심하여 두 번째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1809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 해 말 뷰캐넌은 랭커스터로 이사하였는데, 지역 변호사 밑에서 수습으로 법학 공부를 시작하였고, 1812년에 정식으로 펜실베이니아의 변호사가 되었다. 뷰캐넌도 아버지처럼 상당히 수완이 뛰어났던 것 같은데, 그는 곧 변호사로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많은 수익과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부와 명성을 얻은 뷰캐넌은 정치활동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그는 이 시기 연방당을 지지하며 영국과의 전쟁에 대해 반대하였으나, 1814년에 이웃 주인 메릴랜드 주가 영국군에 의해 침공당하자 일반 병사로 지원하여 '볼티모어 전투'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그 후 1814년과 1815년에 연이어 펜실베이니아의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정치적으로도 정치인으로서도 상당히 성공적인 출발을 하였고, 덕분에 본업에서도 큰 덕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뷰캐넌은 정치 활동보다는 사업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은데, 1816년에는 재선에 출마하지 않고 본업인 변호사 일에 집중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인 정치 활동

1818년 뷰캐넌은 랭커스터에서 열린 무도회에서 '앤 캐롤라인 콜먼'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교제를 시작한 두 사람은 약혼을 하기도 했지만, 당시 뷰캐넌은 변호사 일로 매우 바빴기 때문에 좀처럼 같이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주위에서 뷰캐넌이 재산을 노리고 앤과 사귄다는 소문을 냈다고 한다. 앤은 랭커스터의 부유한 철강 제조업자의 딸이었는데, 그녀도 곧 이러한 소문을 알게 되었고, 그녀는 약혼을 파기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실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뷰캐넌은 이로 인해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그 결과 그가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또 뷰캐넌은 이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1820년에는 연방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성공적으로 정계에 복귀하였다. 뷰캐넌이 하원의원 생활을 이어나가는 동안 연방당은 점차 쇠퇴하였는데, 1824년에 그는 '앤드류 잭슨'을 지지하였고, 잭슨을 도와 민주당을 결성하는데 역할을 하였으며, 그 일원이 되어 펜실베이니아의 민주당원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선거에서는 '존 퀸시 애덤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뷰캐넌은 계속해서 잭슨을 지지하였고, 1828년 잭슨은 드디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사실상 잭슨의 핵심 지지자 중 한 명이 된 뷰캐넌은 그 보답으로 러시아 공사로 임명되었으며, 1833년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는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연방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잭슨의 정치 파벌에서 활동하며 외교 정책 협회의 회장을 지내기도 하는 등 승승장구하였다. 1844년에는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였으나 고사하였고, 대신 잭슨과 함께 '제임스 녹스 포크'를 지지하였으며, 1845년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자 상원 의원직을 사임하고 국무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뷰캐넌은 포크의 휘하에서 미국 확장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많은 영토를 확보하기도 하였지만, 당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노예제도에 대한 논쟁에서는 한걸음 물러나 거리를 두며 실리를 취하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노예제도 자체에는 반대하지만, 헌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만큼 존중되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북부와 남부 모두에서 상당히 호의적인 위치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이후 뷰캐넌은 계속해서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였지만, 1848년에 있었던 선거에서는 휘그당의 '재커리 테일러'가 당선되어 한동안 퇴직 생활을 하였고, 1852년에는 같은 민주당의 '프랭클린 피어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영국 대사로 임명되어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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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15대 대통령

뷰캐넌은 1856년에도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였는데, 이 선거에서는 노예 제도 문제로 북부와 남부의 갈등이 극에 달한 상태로, 많은 후보들이 '캔자스-네브레스카 법'으로 인해 제대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뷰캐넌은 그동안 영국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당대의 화두였던 노예 제도 문제를 적극적으로 회피하면서 무난하게 당선될 수 있었다. 하지만 노예 제도를 둘러싼 문제는 이미 피할 수 없는 시대의 과제로 자리 잡은 상태였고, 뷰캐넌의 이러한 모호한 태도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더 키우게 된다. 뷰캐넌에게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던 북부 사람들은 그가 노예 제도를 두둔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특히 '드레드 스콧 사건'에서 판사들을 설득하여 남부에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도록 하면서 불만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결국 북부 출신의 의원들이 의회에서 뷰캐넌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1857년에 발생한 경제 공황 등의 문제까지 더해 그는 더 이상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뷰캐넌은 더 이상 북부와 남부 어느 쪽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했고 1860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후보로 지명받지도 못하였다.

은퇴와 남북 전쟁

뷰캐넌은 남부 주들의 연방 이탈을 막고 화합을 도모하려고 시도하였던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이룰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 때문에 남부 주들에게 휘둘리면서 반대로 북부 주들의 지지를 잃는 결과만 가져왔다. 그는 남부 주들이 연방 탈퇴 선언을 하는 순간까지도 내전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은 전쟁을 잠시 미루는 정도의 효과에 불과했고, 결국 그가 퇴임한 1달여 후에 '남북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 발발을 피해 무사히 임기를 마친 것 때문에 역으로 동정표조차 얻지 못했고, 덕분에 미국 최악의 대통령 중 한 명으로 현재까지 평가받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쟁 이후 뷰캐넌은 정치 생활에서 은퇴하여 자서전을 출판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연방 분열 이전의 자신의 상황에 대해 서술하며 변명하였지만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하였고, 1868년에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실 당시의 노예 제도에 대한 문제는 인권 이전에 미국의 남부와 북부의 산업 구조 차이에 기인한 경제 문제에 더 큰 뿌리를 두고 있는 상태였고, 이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은 사실상 남북 전쟁을 치른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조차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또 이 문제는 이미 뷰캐넌 이전의 여러 대통령들이 방치하거나 키운 것이기도 했는데, 그 모든 책임을 사실상 혼자 뒤집어쓰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 그는 조금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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