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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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사진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어린 시절

'에이브러햄 링컨'은 1809년에 미국 켄터키 주의 하젠빌 인근의 통나무 집에서 태어났다. 링컨의 집안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새뮤얼 링컨'은 영국 이민자 출신이며, 미국으로 이주하여 수습 직조공으로 생활했다는 것을 보면 그리 부유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링컨의 할아버지대에 와서는 버지니아 주의 지역 민병대 대장으로 일대에 넓은 땅을 소유할 정도로 성공했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링컨의 아버지인 '토마스 링컨'도 새로 이주한 켄터키 주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고, 그는 지역의 배심원 역할을 맡았으며, 토지의 가치를 평가하거나 지역 순찰대로 봉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링컨이 7세 무렵인 1816년에 이러한 유복한 생활이 끝나게 되었는데, 링컨 가족은 토지 소유권에 대한 등기 미비로 인해 분쟁에 휘말려 땅을 모두 잃게 되었고, 결국 당시 개척지에 해당하는 인디애나 주 페리 지역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토마스 링컨이 문맹이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는 나름의 방식대로 자수성가한 사람답게 농사와 노동에 대한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대신 교육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였으며, 자신의 방식을 링컨에게도 강요하여 학업보다는 노동을 통해 돈을 벌어오도록 시켰다. 이 때문에 링컨은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인근 농장에서 일을 하며 품삯을 받아왔는데, 그 와중에도 틈틈이 책을 구해 읽으며 독서를 통해 독학하였다고 한다. 한 번은 토마스 링컨이 사기를 당해 모든 토지를 잃을 뻔했는데, 계약을 맺기 직전에 계약서를 읽어본 링컨이 이를 지적하였고, 덕분에 사기를 면한 토마스 링컨이 그 이후로 아들이 공부하는 것에 대해 묵인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을 겪은 링컨은 결혼한 이후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매우 자상하고 친밀하게 대했다고 하며, 이때부터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노동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어 노예 해방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정치 입문과 변호사 생활

1830년 밀크병이 다시 확산하자 링컨 가족은 병을 피해 일리노이 주로 이주하였는데, 링컨은 이때 독립하여 상가몬 강과 미시시피 강을 통해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스를 오가며 운송업에 종사하였다. 이후 우체국장, 가게 점원, 측량기사, 프로레슬러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였는데, 1832년에는 '블랙호크 전쟁'에 민병대로 참전하기도 하였고, 일리노이 주 하원의원 선거에도 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다. 이 과정에서 링컨은 사업에 실패하는 많은 빚을 지기도 하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이 빚을 갚는데만 17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이후 링컨은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그는 다른 변호사 밑에서 일을 하며 법률을 배우는 일반적인 방법이 아닌, 자신의 방식대로 법률 서적을 읽으며 독학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1834년에는 다시 일리노이 주의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하였는데, 이번에는 휘그당 소속으로 선거에 나서 당선되는 데 성공하여 정치에 입문하였으며, 1842년까지 4번의 임기를 지냈다. 그러나 링컨의 정치 행보도 별로 순탄치는 못했는데, 그는 30대 후반인 1846년에야 하원의원으로 연방의회에 진출하였으며, 1855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했다가 낙선하게 된다. 하지만 그동안 착실히 정치적 경험을 쌓아나갔는데, 자신의 보잘것없는 배경을 연설을 통해 보완하였으며,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도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악의 제도'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후 링컨은 한동안 정치계에서 벗어나 변호사로서의 생활을 계속 이어나갔는데, 그 사이 1850년에는 '미주리 타협'에 이어 '1850년 타협'이 이루어지는 등 미국은 노예 제도에 대해 찬반을 둘러싸고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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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당선과 남북전쟁

1854년 휘그당이 몰락하는 동안 새로 공화당이 창당되었는데, 공화당은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모여 만든 당으로, 1856년에는 링컨도 공식적으로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공화당에 합류하였다. 이 해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링컨은 캔자스 주를 자유 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며 노예 제도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지만, 동시에 연방의 보존에 대해서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미 노예 제도를 둘러싸고 북부와 남부의 주들이 극렬하게 대립하던 시기로, 당시 영국 대사로 외국에 있어 이 주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민주당의 '제임스 뷰캐넌'이 당선에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뷰캐넌도 노예 제도와 그에 따른 혼란에 대한 대책은 갖고 있지 못했고, 그가 임기동안 모호한 태도로 이 문제를 일관하였기 때문에 갈등은 계속 깊어지기만 했다. 결국 186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일부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와 내전의 위기가 닥쳐오게 되었지만, 뷰캐넌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그의 임기 내에 '남북 전쟁'이 벌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그동안 꾸준한 연설로 존재감을 높인 링컨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며, 노예제 반대를 통해 북부 주들의 표심을 얻을 수 있었고, 남부에서는 민주당이 분열하면서 미합중국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링컨의 대통령직 수행은 시작부터 순탄치 못했는데, 그가 취임식을 진행하기 전부터 그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가 발각되는 등 혼란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노예제 반대론자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 주들은 연방 탈퇴를 공언하였고, 1861년에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를 시작으로 남부의 7개 주가 연방을 탈퇴하여 '남부연합'을 결성하였다. 당연하지만 링컨은 이에 대해 어떠한 주도 미국 연방에서 탈퇴하지 못한다고 선언하였고, 결국 대통령에 취임한 지 1달 만에 '섬터 요새 전투'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내전이 벌어지게 된다.

내전 종결과 암살

남북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링컨은 노예 제도의 완전한 폐지를 위한 준비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로 인해 미국 연방이 분열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전쟁 초기 링컨은 일방적인 노예 제도 폐지가 연방의 해체를 가속화시킬 것을 우려하여 주저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1862년 '엔티텀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노예 해방 예비 선언'을 발표하였으며, 이어 1863년에는 '노예 해방 선언문'을 공표하면서 미국의 노예 제도를 폐지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노예 제도 자체의 폐지만을 결정한 것으로, 실제로 미국에서 아프리카 노예들이 완전한 형태로 신분제에서 해방되고, 나아가 인권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는 데는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이후 1864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는 링컨은 분열에 반대하는 민주당 세력과 손을 잡아 국민연합당을 창당하여 재선에 성공하였으며, 1865년에는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가 함락되면서 남북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링컨은 종전 11일 만에 유명 배우이자 남부 지지자였던 '존 윌크스 부스'에 의해 암살당하게 된다. 링컨은 워싱턴에 있는 '포드 극장'에서 연극 공연을 관람하던 도중 뒤에서 총격을 당했고, 결국 사망하여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암살된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부통령 '앤드루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17대 대통령으로 재임하였으며, 이러한 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링컨은 이후 사람들에 의해 신성시되는 경향이 생기기도 하였고, 그의 암살을 둘러싼 여러 음모론이 나돌기도 하였다. 링컨이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현대의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연방을 굳건히 만들었으며, 특히 노예 해방을 통해 인권을 존중한 인물로, 현대까지도 미국 대통령 중에서도 손꼽히는 인기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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