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17대 대통령 「앤드루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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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사진

가난한 남부 출신의 재단사

'앤드루 존슨'은 1808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롤리에서 태어났다. 존슨의 집안은 본래도 형편이 좋지 못했는데, 그가 3살 때 아버지가 얼어붙은 강에서 3명의 사람을 구출하고는 저체온증과 피로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더 안 좋아졌다. 이후 존슨의 어머니가 혼자서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그 때문에 존슨은 10세 무려부터는 형 '윌리엄 존슨'과 함께 재단사의 도제로 들어가 일을 해야 했으며,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해서 기초적인 읽기와 쓰기 정도만 같이 일하던 직원에게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존슨은 도제 계약에 따라 21살까지 조수로 일해야 했다고 하는데, 그는 수습 생활을 시작한 지 약 5년이 지나자 기술을 다 배웠다고 생각해 조바심을 갖게 된 것 같고,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다른 도시인 카르타고로 도망쳐 개별적으로 재단사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존슨은 계약을 어긴 죄로 처벌당할 것을 두려워하였고, 곧 더 먼 사우스캐롤라니아 주의 로렌스로 자리를 옮겨 생활하였으며, 불안정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재단사를 찾아가 계약 해소를 위한 협상을 벌이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존슨의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점점 더 멀리 이동하여 테네시 주의 녹스빌, 앨라배마 주의 무어스빌을 거쳐 최종적으로 테네시 주의 그린빌에 정착하게 된다. 존슨은 그곳에서 재봉 상점을 운영하였으며, 1827년에는 18세의 나이로 현지 출신의 '엘리자 메카들 존슨'과 결혼하였다. 존슨은 돈을 벌면서 아내 엘리자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경제적 수준과 지적 능력이 늘어나면서 점차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치 활동

1829년 존슨은 그린빌의 시의원으로 선출되어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834년에는 그린빌의 시장이 되었고, 테네시 주의 상원과 하원을 거치며 착실하게 정치 경력을 쌓았다. 본래 그는 휘그당원이었지만 도중에 정치적 견해가 달라지면서 후보로 추천받지 못하게 되어 민주당으로 전향하였고, 1843년에는 민주당원으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는 데 성공하였다. 존슨이 10여 년간 하원의원으로 승승장구하였지만, 그 사이 그의 근거지인 테네시 주의회가 휘그당에게 장악당하였고, 이에 1853년 존슨은 연방 하원의원으로 재선에 나가는 대신 테네시 주의 주지사 선거에 도전하였다. 당시 테네시 주의 휘그당은 상당히 강성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슨은 적은 표 차이였긴 하지만 두 번이나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1856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존슨은 자신이 민주당 후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지만 실패하였는데, 그 때문인지 존슨은 목표를 주지사에서 연방 상원의원으로 바꾸었고, 이듬해인 1857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는 데 성공하면서, 그는 시장부터 주지사, 주의회와 연방의회까지 전부 경험한 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미국 사회는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는데, 남부와 북부의 주들이 주로 노예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으며, 휘그당이 몰락하고 대신 노예제를 반대하는 공화당이 생겨났다. 하지만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인 '제임스 뷰캐넌'은 사실상 노예제 문제를 방치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행동은 남부와 북부 주들을 더욱 자극하여 연방 분열의 조짐이 시작되었고, 이는 1860년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1861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를 시작으로 남부의 주들이 연방을 탈퇴하여 '남부 연합'을 결성하였고, 링컨이 이를 용인하지 않으면서 미국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본격적인 내전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노예제 찬성의 입장에 있던 많은 민주당 소속의 의원들이 연방 의회를 떠나 남부 연합에 가담하였는데, 존슨은 지역구인 테네시 주가 연방에서 탈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워싱턴에 남아 정치 활동을 계속하였다. 존슨 자신은 노예주로서 노예제도에도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보다 앞서 연방을 유지하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이러한 존슨의 행동은 링컨과 공화당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어 1862년 북군이 테네시 주 일부를 점령하게 되자, 링컨은 존슨에게 테네시의 전시 주지사 역할을 맡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864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링컨은 당선되기 위해 연방 분열에 반대하는 민주당 세력을 끌어들여 국민연합당을 창당하였는데, 이때 존슨이 링컨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으로 출마하였고, 선거에서 승리하여 그는 미합중국 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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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17대 대통령

1865년 남부 연합의 수도 리치먼드가 함락되면서 남북전쟁은 북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 링컨은 전쟁이 끝난 지 11일 만에 암살당했고, 그 결과 부통령이었던 존슨이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어 17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당시 내각과 의회는 공화당에서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들도 존슨에 대해 링컨만큼이나 신뢰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화당원들의 기대는 금방 무너지게 되었는데, 존슨이 연방을 공고히 해야 한다는 생각만큼 노예제도에 대해서도 찬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전에 가담했던 남부의 여러 주들과 정치인들이 별다른 처벌 없이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연방 재건을 위한 링컨의 계획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조치는 의회를 장악한 급진적인 공화당원들 사이에서 불만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특히 존슨은 해방된 흑인 노예들에 대해 여전히 차별적인 정책을 폈는데, 일부 지역에서 이들에게 배분된 토지를 몰수하여 원래 주인인 백인들에게 돌려주는 등 사실상 흑인들이 사회에 적응하고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았고, 결과적으로 현대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흑백 차별의 기틀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존슨은 의회와 지속적으로 충돌하였고, 결국 1867년 연방 하원에서 그의 탄핵안이 가결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이 탄핵안은 상원에서 부결되기는 하였지만 존슨은 더 이상 공화당원들로부터 그 어떠한 지지도 얻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는데, 본래 그의 당인 민주당에서도 배신자 취급을 받으며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정치권에서 완전히 고립된 상태가 되었다. 그 결과 1868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는 어느 당의 후보로도 지명되지 못하고 그대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슨은 정치 생활을 은퇴하지 않았는데, 그는 1869년과 1872년 상원과 하원 의원으로 후보로 선거에 출마하는 등 계속해서 정치활동을 이어나갔고, 1875년에 테네시 주의 상원의원으로 다시 당선되는 데 성공하였지만 얼마 후 사망하게 된다. 존슨은 일반적으로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데, 그의 덕분에 연방의 분열이 상당히 빠르게 종식될 수 있었던 점도 있고, 재임 중에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는 등 상당히 좋게 평가받을 만한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 그가 당시 만들어낸 인종 차별에 대한 문제가 현재까지 미국의 큰 사회문제 중 하나인 점을 생각하면 재고의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비록 현재의 가치관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것은 불합리한 부분도 분명 있지만, 당시의 가치관으로도 존슨의 행동은 별로 칭창 받을만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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