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프랑스 프랑스 혁명의 희생자 「엘리자베트 필리프 마리 엘렌」
- 역사
- 2023. 12. 23.
프랑스의 공주
'엘리자베트 필리프 마리 엘렌'은 1764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페르디낭'의 딸로 태어났다. 루이 페르디낭은 본래라면 왕위를 계승하여 '루이 16세'가 되어야 했지만, 엘리자베트가 태어난 이듬해인 1765년에 36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하였고, 엘리자베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요제파' 또한 1767년에 35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엘리자베트는 겨우 3살 때 부모님을 모두 여의게 된 것인데, 이후 마루산 후작인 '마리 루이즈'의 아래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그녀는 매우 어린 나이에 불우한 가정환경을 갖게 되었지만, 마리 루이즈 여사의 돌봄을 받으며 자애 넘치고 신앙심이 깊은 성격으로 자라났다고 하며, 왕이 된 오빠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도 친분이 돈독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과도 사이가 원만했던 것 같고, 고모로서 '루이 17세'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등 조카들도 잘 돌보았다고 한다. 엘리자베트는 평생 프랑스인으로 계속 남고 싶다며 결혼하는 것을 거부하였는데, 이후 왕궁에서 계속 살면서 신에게 기도하거나 불우한 처지의 시민들을 돕는 등 선행을 하여 평판이 상당히 좋았던 것 같다.
프랑스 혁명과 바렌 사건
이러한 엘리자베트의 평화로운 생활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면서 끝나게 되었는데, 혁명으로 국내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엘리자베트는 국외 도피 권유를 거부하였고, 결국 루이 16세 일가와 함께 튀를리 궁전에 감금되었다고 한다. 루이 16세는 한때 혁명을 계기로 프랑스를 개혁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은데, 혁명을 주도하던 세력들은 왕의 권한을 하나씩 제한하기 시작하였고, 그사이 그가 의지하였던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 드 미라보'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결국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권유를 받아 파리를 떠나 도피하는 것에 동의하였고, 1791년 엘리자베트도 루이 16세 일가와 함께 파리를 탈출하는데 동행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도피 시도는 실패하였고, 이 '바렌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 왕가는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루이 16세 일가와 엘리자베트는 다시 파리로 압송되어 탕플 탑에 감금되었고, 그들이 운명은 혁명 정부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되었다.
정치적 희생양
1792년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 전쟁'을 치르며 '국민 공회'가 정권을 잡아 사실상 공화국이 되었는데, 급진적인 혁명세력인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파가 실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고, 그들에 의해 일반 시민으로 신분이 강등된 루이 16세는 '시민 루이 카페'로서 반역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결국 루이 16세는 이듬해인 1792년 1월에 사형에 처해져 단두대에 오르게 되었고, 해가 가기 전에 마리 앙투아네트도 여러 죄목으로 고발당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엘리자베트도 로베스피에르 등에 의해 정치적 목적으로 고발당하였고, 1794년 30세 생일을 맞은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처형되었다. 엘리자베트는 국외 망명 시도 및 국왕 일가의 도주를 도운 죄, 외국과 내통하고 자금을 지원한 죄, 조카 루이 17세와 근친상간을 저지른 죄 등으로 고발당하였는데, 사실상 대부분의 혐의는 날조되었거나 억지에 가까웠다. 그녀는 사형을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였으며, 사형 당일 날에도 함께 처형될 다른 죄수들에게 축복을 빌어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그녀와 함께 수감되었던 죄수 중에 임신한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하여 알려주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의 관습에 따라 임신한 자는 출산할 때까지 형이 미루어졌고, 그 사이에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엘리자베트가 처형당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루이 17세도 10세의 나이로 고문과 가혹한 수감 생활로 인한 폐렴으로 목숨을 잃게 되었고, 오직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만이 살아서 탕플 탑을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