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몰락을 가져온 「바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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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왕으로서의 자세

1789년 프랑스에서는 당시 소집된 '삼부회'가 귀족 및 성직자들로 구성된 기득권층과 평민들 사이의 불화로 인해 파행되면서 민중 혁명에 대한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뒤이어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 일어나면서 본격적으로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 봤을 때 혁명은 생각보다 상당히 온건하게 진행되었는데, 왕인 '루이 16세' 또한 개혁에 대해 어느 정도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었고, 그가 자신의 국민들과 직접적으로 대결하는 것을 피하였기 때문에 혁명 세력은 적은 희생으로 성과를 볼 수 있었다. 또 혁명 세력이 구성한 통치 기구인 '국민의회'에는 개혁적인 귀족 세력들도 참가하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 드 미라보'같은 왕을 유지한 채로 입헌군주제 형식의 개혁을 추진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개혁 세력의 군대인 '국민위병'의 사령관 '질베르 뒤 모티에 드 라파예트' 또한 왕위와 왕실의 권위를 존중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루이 16세도 자신의 생명과 지위 보장에 대한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덕분인지 미라보가 루이 16세에게 파리를 탈출한 후 지역의 지지를 바탕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직접 개혁을 추진하도록 권하였을 때, 그는 '왕은 국민으로부터 도망가서는 안된다'며 반대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이러한 왕으로서의 자세를 계속 유지하지 못하였는데, 미라보나 라파예트가 국민의회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권한이 점차 박탈되어 가자 개혁에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중 1791년에는 미라보가 급사하였는데, 루이 16세는 국민의회의 구성원 중 미라보 만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불안은 점차 가중되게 된다.

도피 계획

프랑스 왕실 또한 루이 16세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 자신도 외국과 접촉하여 왕의 권위를 되찾을 방법을 모색하기도 하였지만, 그의 동생인 '샤를 10세'의 경우에는 왕당파와 망명 귀족들을 이용하여 무력을 통해 혁명 세력을 타도하자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독자적으로 움직였는데, 그녀는 자신의 측근인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를 탈출하기 위한 계획을 진행하였다. 이 계획은 나름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페르센은 탈출을 위해 가짜 여권을 마련하거나 마차를 제작하는 등 차근차근 준비를 해 나갔다. 그러나 마리 앙트와네트의 오빠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2세'가 도움을 차일피일 미루는 등 비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하였으며, 루이 16세도 프랑스를 탈출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탈출 시기는 계속 미뤄질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왕실의 탈출 계획이 의회 측에 일부 누설되면서 감시와 경비가 강화되는 등 좋지 않은 상황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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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렌 도주 사건

왕실의 프랑스 탈출 계획은 완벽하게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혁명 세력들도 철저하게 저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록 당초 계획보다 1개월 이상 늦춰지긴 하였지만 시행될 수 있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왕자와 공주는 몇몇 수행원들을 이끌고 새벽을 틈타 궁전을 빠져나갔으며, 도중에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 '루이 스타니슬라드 자비에 드 프랑스' 부부에게도 계획을 전하고 별도로 탈출하도록 지시하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탈출 시도는 초기에 상당히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대형마차를 이용하는 등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도 산재해 있었다. 특히 페르센은 이 탈출 계획의 최대 공로자였지만,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한 그를 싫어하였고, 결국 무사히 파리 외각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자 그와 헤어지기로 하였다. 덕분에 페르센은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가 계속 남아 있었다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후 루이 16세 일행은 마차 밖에서 한가로이 식사를 즐기거나 산책을 하며 인근 주민들과 만나는 등 도피 중에 하기에는 상당히 부적절한 행위를 이어갔고, 이는 추격대에 따라 잡히게 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또 루이 16세 일행은 그들을 돕기 위해 준비되었던 호위대와도 제대로 합류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게 되면서, 결국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바렌에서 붙잡히게 된다. 추격대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이 사태를 보기 위에 모인 수많은 군중의 압박으로 루이 16세는 탈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 왕실 가족들은 파리로 송환되어 더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게 된다.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프랑스 국민들은 루이 16세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반전되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의해 처형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반면 프로방스 백작은 무사히 벨기에로 탈출할 수 있었고, 그는 후에 루이 16세가 처형된 후 뒤를 이은 '루이 17세'의 섭정이 되었다가, 루이 17세 마저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자 스스로 루이 18세를 자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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