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프랑스 프랑스 혁명에 불을 당긴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반응형

바스티유 감옥

혁명 전야

1789년 '바스티유 습격'이 일어나기 전의 프랑스는 혼란이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 16세'는 너그러운 성품으로 프랑스를 개혁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의 시대상의 한계로 생각이 신분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나마도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추진력이 부족하였다. 게다가 프랑스의 재정 상태는 전전임인 '루이 14세' 이후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으며, 그 와중에 '미국 독립 전쟁'에 개입하는 등 사실상 파탄난 상태이기도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기후 악화로 대흉작을 겪기도 하였는데, 연이은 홍수와 가뭄, 추위 등의 재난을 겪은 시민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이에 따라 개혁에 대한 요구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반면 기득권층인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이러한 개혁 움직임에 저항하였는데, 극소수에 불과한 그들은 프랑스 전체 토지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으면서도, 증세를 위해 소집된 삼부회에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만 혈안이 되어있었다. 삼부회가 파행으로 치닫게 되자 평민 대표들은 '테니스 코트의 서약'을 통해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개혁을 이어가기로 하였는데, 왕실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지방에 있었던 군대를 파리로 불러들이는 등 오판을 하게 된다. 이러한 와중에 루이 16세는 재무 장관인 '자크 네케르'에게 삼부회 파탄의 책임을 물어 파면하였는데, 그는 개혁적인 인물로 프랑스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네케르의 파면과 군대의 진군 소식을 들은 파리 시민들은 격노하였고, 수많은 시민들이 보훈병원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하기 시작하였다.

바스티유 습격 사건

바스티유 감옥은 본래 '백년전쟁' 시기에 요새로 지어졌으나, '루이 13세' 시절부터 감옥으로 사용되었는데, 상당한 중범죄자들이 수용되는 곳으로 주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왕의 압제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는데, 이 시기에 수용되어 있던 죄수는 겨우 7명으로, 그중 정치범은 한 명도 없었고, 사기범이 4명, 정신질환자가 2명, 성범죄자가 1명 수용되어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프랑스 시민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바스티유 감옥에 있던 무기와 탄약을 얻기 위해 몰려갔던 것이다. 시민 대표들은 먼저 바스티유 감옥을 지키고 있던 '베르나르르네 주르당 드 뢰네' 후작과 만나 무기와 탄약을 양도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는 시민 대표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등 우호적으로 대했지만, 그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 바스티유 밖에서는 군중들이 계속해서 몰려들면서 숫자가 점점 늘어났고, 이들 중 일부가 담을 넘어 침입하는 등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바스티유 감옥은 드 뢰네 후작과 80여 명의 늙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겁을 먹은 병사가 발포하면서 바스티유 습격이 벌어지게 된다. 바스티유로 몰려든 시민들은 대단한 숫자였지만 그중에 그나마 무장한 사람들은 천여 명에 불과했다고 하며, 그 정도 인원으로 바스티유를 함락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바스티유의 수비대 측도 이러한 습격에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아 비축된 식량도 하루치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드 뢰네 후작은 전면적으로 항복하는 대신 안전을 보장받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합의는 지켜지지 못했고, 드 뢰네 후작을 포함하여 장교와 병사 7명이 시민들에게 끌려가 살해되었다. 그 외에도 이날 파리 시장 '자크 드 플레셀'과 다른 고위 관료 두 명도 별다른 이유 없이 시민들에 의해 처형되는 등 프랑스혁명은 혁명이라기보다는 사실상 폭동에 가까운 형태로 시작되었다.

반응형

프랑스혁명과 루이 16세

바스티유 함락 이후 이 소식이 프랑스 각지로 퍼져나가면서 혁명의 움직임 또한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고 인권 선언을 발표하는 등 본격적인 개혁을 시작하였다. 이후 개혁세력은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 드 미라보'나 '질베르 뒤 모티에 드 라파예트' 같은 온건파 혁명주의자인 자유주의 귀족들이 정권을 잡았으며,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하여 국민방위대를 조직하는 등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미라보가 죽고 1791년에는 국왕 일가가 국외 도피를 시도하다 붙잡히는 '바렌 사건'이 일어나면서 점차 방향성이 바뀌기 시작하였고, 결국 이듬해인 1792년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혁명 정부에 의해 국가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가 아는 현대의 프랑스가 탄생한 것은 아니고, 이후로도 프랑스는 '나폴레옹'에 의해 제정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왕정복고를 겪기도 하였으며, 몇 번의 혁명을 더 거쳐서 완전한 공화정 국가로 자리 잡게 된다.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