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의 명장 「양대안」
- 역사
- 2023. 11. 25.
교룡득수
'양대안'(楊大眼)은 중국 남북조시대 사람인데, 무도의 저족 출신으로 젊어서부터 용맹하여 호랑이를 잡아 죽인 일도 있다고 하며, 특히 달리기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향에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은데, 양대안은 저족의 지도자였던 '양난당'의 혈통이었지만 분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별달리 영향력도 없었으며, 상당히 가난한 생활을 하였던 것 같다. 이후 아버지가 북위의 관리로 임명되면서 수도인 낙양으로 이주하여 살았으며, 북위의 '효문제'가 남방 원정을 시도할 때 군대에 입대하였다. 이때 효문제는 상서인 '이충'에게 병사들을 선발하도록 하였는데, 양대안은 출세하기 위해 자진해서 나섰으며, 선택되기 위해 자신의 재주를 보여주는 등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양대안은 말처럼 빨리 달리는 재주를 보여주었는데, 그는 투구에 9미터 정도 길이의 끈을 달아 놓고 그 끝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빨리 달렸다고 한다. 이렇게 군관이 된 양대안은 출정 직전에 같이 지내던 이들에게, 자신은 교룡이 물을 만난 것 같은 상황이 되었으니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이 일화가 사자성어 '교룡득수'의 유래가 되었다. 이후 양대안은 효문제의 휘하에서 완, 섭, 양, 등, 구강, 종리 등에서 군공을 세웠는데, 이에 따라 벼슬도 계속 높아져서 직합장군, 보급장군, 유격장군, 정로장군, 동형주자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종리 전투
양대안은 북위에서 승승장구하였지만, 한번 완전히 실각할 뻔한 적도 있었는데, 507년에 있었던 '종리 전투'의 패배가 그 원인이었다. 502년에 '소연'은 남제를 멸망시키고 양나라를 세워 '무제'가 되었고, 북위가 혼란한 틈을 타 북벌을 시도하면서 북위와 양나라 간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전쟁 초기에 '위예'가 이끄는 양나라군은 합비를 함락시키는 등 선전하였지만, 전선이 교착되며 전쟁이 길어지게 되었고, 506년에는 양대안이 하남에서 양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등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 북위군은 승리의 기세를 타고 양나라 국경을 넘어 남진을 시도하였는데, 북위의 총사령관인 중산왕 '원영'은 대군을 이끌고 내려가 종리성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는데, 종리성은 북으로 '회수'를 끼고 있는 험난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 천혜의 요새로, 성을 지키고 있던 '창의지'와 양나라 병사들도 굳건히 수성하였기 때문에 북위군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원영은 아예 장기전으로 끌고 가 적을 피폐시키기로 하였는데, 양대안을 시켜 종리성 북부를 지키며 보급선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진동장군 '소보인'에게는 회수에 교량을 건설하고 이를 경비하도록 하였다. 이후 원영 본인이 군대를 이끌고 종리성을 공격하였으나, 양나라의 군사들은 부서진 성벽은 진흙을 발라 보강하며 완강히 저항하였고, 결국 수개월이 지나도록 성을 점령하지 못해 북위 조정에서 퇴각하라고 권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때 양무제는 종리성을 구원하기 위해 20만 명에 달하는 부대를 새로 편성하였는데, 정북장군 '조경종'을 총사령광으로 하였으며, 위예도 부장으로 함께 종군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위의 군대는 100만에 달했다고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였던 양나라군은 함부로 싸움을 벌이기 힘들었고, 이에 위예는 일군을 이끌고 종리성의 서남쪽을 기습 점거하여 녹각을 세우고 임시 성체를 세웠으며, 다시 조경종은 북쪽에 성루를 하나 더 세워 북위군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견제하였다. 이러한 양나라군의 전술은 종리성에 대한 북위군의 공격을 위축시킬 수는 있었으나, 대군인 북위군을 물리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큰 비가 내리면서 전황이 바뀌게 된다. 갑작스러운 큰 비로 회수의 강물이 무려 7척이나 불어났다고 하는데, 양나라군은 이 틈을 타고 수군으로 공격하여 북위군이 세운 다리를 끊어버렸다. 여기에 더해 바람의 방향이 북위군 진영으로 바뀌자 화공을 시도하였고, 북위군은 다리가 끊기고 진지가 불타는 등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위예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총공격을 명령했다고 하는데, 이 전투에서 북위군은 완전히 패배하여 사망한자가 총 20만여 명이라고 하며, 그중에 10만여 명이 익사자였다고 한다. 양대안과 원영, 소보인은 모두 퇴각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북위에서는 그들에게 패배의 책임을 물어 원영과 소보인은 서민의 신분으로 강등되었으며, 양대안도 장군에서 일개 병졸로 신분이 바뀌게 된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국내외의 혼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시 이들을 복직시켰는데, 양대안은 510년에 양나라의 북벌에 대비하기 위해 장군이 되어 회수와 비수 일대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성격의 변화와 최후
양대안은 본래 미천한 신분 출신이어서였는지 성격이 매우 좋았다고 하는데, 휘하의 병사들을 자신의 아들처럼 소중히 여겼고, 그들이 부상을 입거나 하면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전투에서는 항상 선두에 앞장서서 싸웠는데, 사람들이 그의 용맹한 모습을 보고 '관우'나 '장비'도 이보다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우는 아이들에게 양대안이 온다고 소리치면 울음을 뚝 그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양대안은 문맹이었는데, 그는 평생 글을 읽을 줄 몰랐지만, 대신 머리가 좋아서 한번 들은 말을 잘 기억하였고, 덕분에 높은 지위에 올라서 공무를 처리할 때도 말로 요령 있게 해결하였다고 한다. 또 양대안에게는 '반씨'라는 미인 아내가 있었는데, 그녀는 총명한 데다 담력이 높아 종종 말을 타고 전쟁터까지 찾아오기도 하였다고 한다. 양대안은 그녀를 보고 반장군님이라고 장난스럽게 부르곤 했는데, 두 사람이 완전 무장을 하고는 전장을 누비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반씨는 후에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다 발각되었고, 화가 난 양대안에게 자결을 명령받아 죽게 된다. 어찌 되었든 양대안은 일반 병졸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장군으로 복직한 후에는 사람이 바뀐 것처럼 성격이 변하였다고 하는데, 이전에는 관대하고 너그러운 성격이었지만, 회수와 비수 일대에서 양나라 군대를 막는 동안에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병사들에게 채찍질을 할 정도로 잔인한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병사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증오하게 되었다고 하며, 이전부터 그를 알고 있던 이들은 오히려 안타까워했다고도 한다. 그런데 반씨가 바람을 피운 것과 일반 병졸로 강등되었던 시기가 비슷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러한 고난을 연속적으로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서 거친 성격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양대안은 회수와 비수 일대에서 수차례 양나라의 군대를 격파하여 북위를 지켜내었고, 그 공으로 평동장군이 되었으며 516년에는 양대안이 형주 일대를 관리하자 인근의 도적들이 겁을 먹고 감히 도둑질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양대안은 이후 2년 후인 518년에 사망하였는데, 그의 세 아들은 모두 반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었기 때문에, 남은 계모와 불화가 있어 양나라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양대안은 지휘능력보다는 개인적인 용력이 뛰어난 장수였던 것 같은데, 그는 북위에서 상당한 업적을 쌓았지만, 시대 상황상 기록이 많지 않고, 그 때문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장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