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수당시대 당나라의 명장 「울지공」
- 역사
- 2023. 11. 19.
수나라 말 군웅할거 시대
'울지공'(尉遲恭)은 585년경 중국의 수나라에서 태어났는데, 삭주 선양현 출신으로 자는 '경덕'(敬德)을 썼다. 울지공은 북주에 상주총관을 지낸 촉국공 '울지형'의 자손이라고 하는데, 580년에 '양견'이 승상이 되는 것에 반대하여 난을 일으켰다가 일족이 모두 천민으로 강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울지공은 상당히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같은데, '수양제' 시절에 '적송백'이나 '유보강' 등이 일으킨 난을 토벌하는 토벌대에 참여하였고, 여기서 공을 세워 조산대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나라는 이미 수양제의 폭정으로 인해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는데, 617년에 '유무주'가 마읍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울지공은 유무주의 휘하에 합류하였다. 이 시기 수나라에서는 수많은 반란이 일어나는 군웅할거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는데, 이후 당나라를 세우는 '이연'과 '이세민' 부자도 이때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유무주는 돌궐과 손을 잡고 수나라의 토벌군을 물리치는 등 위세를 떨치며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기에 이르렀고, 다른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밀려난 '송금강'을 휘하에 받아들이는 등 세력이 커지자, 당시 장안을 장악하고 있던 이연의 세력과 충돌하게 된다. 619년 유무주는 대대적으로 남하하면서 이연의 근거지였던 태원 일대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울지공은 송금강의 휘하에서 함께 한 것으로 보이며, 진주와 회주 일대를 함락시키고, '이효기'가 이끄는 부대를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 울지공은 무예가 출중하여 특히 홀로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을 사로잡는데 능했다고 하는데, 이때도 '독고회은'과 '당검'을 포획하는 등 활약하였다.
이세민의 장군
620년 이연은 위태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아들 이세민을 보내 이를 막도록 하였는데, 이세민의 전략으로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어 유무주는 패배를 거듭하다 세력이 완전히 와해되게 된다. 이때 울지공은 패잔병들을 모아 개휴를 사수하고 있었는데, 이세민이 사람을 보내 그를 설득하였고, 울지공은 '심상'과 함께 항복하게 된다. 이후 심상이 다시 이세민을 배신하고 도망치는 일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이세민의 부하 장수들이 울지공도 배신할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었고, 울지공은 심상보다 훨씬 전투에 능한 장수였기 때문에, 그들은 일이 일어나면 자신들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 먼저 울지공을 포박해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그런데 막상 울지공을 감옥에 가두고 나니 다시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 여겨 처형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자신들이 독단으로 처형까지 할 수 없었기에 이세민을 찾아가 이를 보고하게 된다. 이에 깜짝 놀란 이세민은 부하들을 나무란 뒤 곧바로 울지공을 풀어주었고, 그를 자신의 침실로 데려와 사과하였다고 한다. 이때 이세민은 울지공에게 금을 주었는데, 그는 지금까지 공을 치하하기 위해 주는 것이라며, 만약 떠나고 싶다면 노자로 쓰라며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울지공이 이러한 이세민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울지공은 이세민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그에게 충성하였다. 당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후에는 당시 황태자였던 '이건성'과 이세민이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는데, 이때 정식 후계자였던 이건성이 울지공을 회유하였으나 거절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당나라의 명장
울지공은 이세민 휘하에서 큰 활약을 하였는데, 920년 '왕세충'의 세력을 공격할 때 이세민이 포위되어 위기를 맞았는데, 이때 울지공이 공격해 오던 '선웅신'을 물리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621년에는 왕세충을 물리치고 연이어 '두건덕'과의 싸움에서도 공을 세웠는데, 한 번은 전장에서 이세민이 왕세충의 조카인 '왕안'이 타고 있는 말을 탐내자, 울지공이 두 명의 기병을 데리고 가서는 그대로 왕안을 사로잡아 그가 타고 있던 말을 바쳤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622년에는 두건덕의 부하였던 '유흑달'이 난을 일으켰는데, 이때도 '이세적'(서세적)과 함께 포위되었었지만, 울지공이 장정들을 이끌고 포위망을 뚫는 활약을 하였고, 이후 삭주와 농주 등지에서 돌궐군을 격파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당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이후에는 이 공으로 좌이부호군에 임명되었으며, 당나라의 후계자 분쟁인 '현무문의 변'에서도 이세민을 도와 큰 역할을 하였다. 이세민이 당나라의 황제로 등극하자 우무후대장군에 임명되었는데, 그 해 경주도행군총관으로 돌궐군을 격파하고 '아사덕오몰철'을 붙잡아 다시 광록대부에 임명되었다. 울지공은 당나라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상당히 오만해졌는데, 한때 황실 종친인 '이도종'에게 하극상을 벌였다가 이세민에게 직접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후로 처신에 조심하였으나 조정의 대신들과의 불화 등으로 인해 여러 번 좌천되기도 하였다. 643년에는 개부의동삼사가 되었으며, 645년에는 고구려 원정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때 그는 고구려 침공에 대해 부정적이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원정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은 실패하게 된다. 이후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선인이 되겠다고 수행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렇게 한가한 생활을 하다가 659년에 74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울지공은 장수 개인의 능력으로 몇 번이나 위기를 극복하는 활약을 보였고, 이 때문에 그를 '항우'나 '조운' 같은 중국사에 남는 명장으로 평가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활약상을 보면 군대를 지휘하는 능력보다는 개인적인 무력이 상당히 특출 났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