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영국 제2차 세계 대전을 이겨낸 왕 「조지 6세」

반응형

인물사진

병약하고 소심한 왕자

'조지 6세'는 1895년 영국 노퍽 주의 샌드링엄 하우스에서 태어났는데, 당시는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시기로, 그는 할아버지인 '에드워드 7세'와 아버지인 '조지 5세', 그리고 형 '에드워드 8세'에 이은 왕위 계승자 4위였다. 조지 6세는 영국의 왕족으로 상당히 유복한 생활을 하였지만, 어렸을 적부터 병약한 체질에 심한 말더듬이 증세가 있었으며, 겁 많고 소심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본래 왼손잡이였는데, 오른손잡이로 교정을 받는 등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은 이러한 그의 성격에 더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러나 조지 6세는 차남으로 왕위는 형이 물려받을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담은 덜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09년에는 오스본에 있는 왕립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의 소심한 성격 때문이었는지 다른 생도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10년에는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하여 조지 5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일본의 경우도 그렇지만 왕위 계승권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심리상태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할 정도다. 괴롭힘의 영향도 있었는지 조지 6세의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1911년에는 별 무리 없이 다트머트에 있는 왕립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고, 1913년에는 사관후보생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1914년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는데, 이때 조지 6세도 'HMS 콜링우드' 호에서 근무하였다고 하며, '유틀란트 해전'에도 참전하였다고 한다.

요크 공작

조지 6세는 1918년 왕립 해군 항공대의 훈련소에서 장교로 생활하였으며, 1919년에는 대위 계급으로 퇴역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컬리지에서 역사와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 시기 그의 형 에드워드 8세는 여자 문제로 왕실의 골치를 썩였는데, 에드워드 8세는 자신이 사귀던 유부녀의 친구를 그에게 소개해주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조지 6세가 소개받은 여자도 유부녀였고, 왕실에서는 이 때문에 그가 에드워드 8세의 영향을 받아 잘못된 성벽을 갖게 될까 봐 상당히 우려했다고 한다. 결국 조지 5세는 조지 6세를 정식으로 요크의 공작으로 임명하는 것을 대가로 그녀와 헤어지도록 했다고 하는데, 요크의 공작위는 본래 왕위 계승자 2위인 그가 당연히 받아야 할 작위기도 했지만, 그의 성격상 그러한 조건이 없었어도 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찌 되었든 이후 조지 6세는 요크 공작으로 공식 행보를 이어나갔는데, 주로 탄광과 공장, 철도 등 산업 기반 시설들을 시찰하였기 때문에 '산업 공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행동 덕분에 노동자들 사이에서 크게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가 이러한 행보를 하게 된 것에는 차기 왕의 동생으로서 형을 지지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하기 위한 것도 있었겠지만, 동시에 그가 왕위에 오를 것까지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1923년에는 스코틀랜드의 귀족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혼인하였는데, 조지 6세는 그녀와 만난 1920년부터 결혼을 결심했던 것으로 보이며, 왕실에서도 처음에는 두 사람의 사이에 대해 반대하였지만, 그의 한결같은 마음과 그녀의 성품을 직접 본 후에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혼인에 찬성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히려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 영국 왕실의 일원이 된다는 부담감 때문에 두 번이나 거절하였고, 세 번째에 가서야 간신히 허락했다고 하며, 사실 당시 에드워드 8세가 하고 다닌 행실을 생각해 보면 왕실에서는 이 정도 혼인 상대면 감지덕지였을 것이다.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후에 두 딸인 '엘리자베스 2세'와 '마거릿 로즈'를 낳았다.

반응형

갑작스러운 즉위

결혼 이후 조지 6세도 원만한 대회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한 것 같은데,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언어 치료사인 '라이오넬 로그'를 초빙하여 말더듬이 치료를 받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한다. 또 여러 차례에 걸쳐 해외여행을 다니는 등 대외 인지도를 넓히기 위한 행동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자메이카를 방문하였을 때는 흑인들과 함께 테니스를 치는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열린 마인드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1936년 조지 5세가 사망하자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당시 에드워드 8세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조지 6세가 왕위 계승권자 2위가 되었다. 당시 에드워드 8세는 42세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미혼이었는데, 그는 젊은 시절부터 문란한 생활을 즐겼으며, 특히 여러 유부녀들과 불륜 관계를 지속하였고, 이때는 미국 출신인 '월리스 심프슨'과 사귀고 있었다. 이러한 에드워드 8세의 행적은 왕위에 상당히 큰 위협으로 작용하였는데, 심지어 그는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겠다는 이야기까지 하게 된다. 당연하지만 이러한 막장 행보는 의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그러자 에드워드 8세는 즉위한 지 1년도 안되어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 결과 조지 6세가 갑작스럽게 영국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고, 에드워드 8세가 아직 대관식도 치르지 않았었기 때문에, 부랴부랴 그의 대관식을 변경하여 조지 6세의 대관식으로 치르게 된다. 본래 조지 6세는 형과 사이가 매우 좋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련의 갑작스러운 과정들은 소심한 조지 6세 부부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었고, 이 때문에 에드워드 8세와 조지 6세 부부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나 이 시기는 대영제국에 상당히 어려운 시기이기도 했는데,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이 발표된 이후로 제국은 차츰 해체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있었으며, 몇 년 후인 1939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도 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과 사망

조지 6세는 소심한 성격과 심한 말더듬이로 인해 즉위하기 전부터 큰 우려를 받기도 하였지만,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을 잘 추슬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대전 시작 전에 조지 6세는 평화파였던 '네빌 체임벌린'을 지지하며 최대한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전쟁이 불가피해진 이후에는 '윈스턴 처칠'과 매주 한번 점심식사를 같이 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정부를 도왔다고 한다. 전쟁 동안 조지 6세는 런던을 떠나지 않고 지켰는데, 그는 버킹엄 궁전과 윈저 성을 오가며 생활했으며, 한 번은 독일의 폭격에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일반 국민들과 같이 정부의 배급을 받으며 생활하였고, 끊임없이 국민들을 독려하여 독일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시켰다고 한다. 또 폭격 피해 현장이나 군수 공장 등을 방문하였고, 국내외 각지에 주둔한 군부대를 방문하는 등 전쟁 중인 국가의 군주로서의 의무를 다하였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는 1945년 독일에 대한 승전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이 거대한 전쟁의 결과는 대영제국의 입장에서 긍정적으로만 다가오지는 않았는데, 전쟁 이후 제국의 해체가 가속화되어 1947년에는 영국령 인도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독립하였으며, 이에 따라 인도 제국의 황제에서 인도의 왕과 파키스탄의 왕으로 격하되기도 하였다. 이런 식으로 대영제국은 해체되어 영연방으로 재편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1948년에 미얀마와 팔레스타인, 1949년에 아일랜드 등이 연방에서 탈퇴하여 독립하였다. 또 전쟁은 조지 6세 개인에게도 별로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는데, 그는 과로와 과도한 스트레스, 잦은 흡연 등으로 인해 폐암에 걸려, 왼쪽 폐를 절제하는 등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말년에는 딸인 엘리자베스 2세와 사위 필립 공에게 공무를 맡겨야 했다고 하며, 1952년에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사망하였다. 조지 6세는 소심한 성격에 말더듬이로 일반적으로 지도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라고 생각되는 전형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는 행동과 결과로 그러한 것들이 실제 지도자와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개인적인 삶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승리 등 당시 영국의 역사적 업적을 모두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왕으로서 당시의 영국을 이끌어간 인물 중 한 사람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