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남북조시대 남조를 망친 우주대장군 「후경」
- 역사
- 2023. 11. 14.
혼란스러운 남북조시대
'후경'(侯景)은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의 인물로 본래 흉노의 하나인 '갈족' 출신이지만, 이들은 선비족과 동화되어 함께 중원에 진출하였다고 한다. 후경은 남북조 중 북조에 해당하는 북위에서 국경을 지키는 일반 병사였는데, '육진의 난'이 일어났을 때 북위의 실력자 중 한 명이었던 같은 갈족 출신인 '이주영'을 도와 공을 세웠고, 이후 이를 인정받아 출세하여 정주자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북위의 황제였던 '효장제'는 자신보다 권세가 있는 이주영을 경계하였고, 530년에는 그를 암살하면서 북위는 큰 혼란이 시작되게 된다. 곧 이주영의 인척들인 이주씨들이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다시 이주영의 부하였던 '고환'이 득세하여 532년에 새 황제를 세웠는데, 그가 북위의 마지막 황제인 '효무제'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효무제와 고환이 권력을 두고 다투게 되었는데, 534년 고환은 효무제가 자신을 습격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먼저 낙양으로 쳐들어갔으나, 효무제는 이를 피해 장안으로 도주하여 '우문태'에게 의탁하였고, 이로 인해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나뉘게 되었으며, 이때 후경은 동위에서 고환의 휘하로 합류하였다고 한다. 후경은 동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였다고 하는데, 사도에 하남대행대로 임명되어 하남지역에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으며, 고환을 따라 동위를 공격하는데도 여러 번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고 한다.
북조에서 남조로
고환은 평소에 후경을 매우 신뢰하였다고 하는데, 그는 후경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하남을 마음대로 다스리도록 하였으나, 후경은 평소에 공공연히 고환이 죽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며 야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546년 고환은 동위를 정복하는데 실패하고 상심하여 큰 병을 얻었는데, 그의 후계자 '고징'은 후경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를 의심하였다. 이듬해인 547년 고환이 사망하였는데, 고징은 후경을 경계하여 이 사실을 공표하지 않고 있었지만, 후경은 고환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선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후경은 처음에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하남의 13주를 담보로 하여 서위에 의탁하려고 하였는데, 서위의 우문태를 이를 받아주지 않았고, 이에 당시 남조인 양나라에 다시 투항하였다. 고징은 처음에 '한궤'를 보내 후경을 진압하게 하였는데, 후경이 4개 주를 넘기는 대가로 서위로부터 지원군을 얻게 되자 일시 퇴각하였다. 한편 양나라에서도 후경의 귀순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는데, 많은 신하들이 이를 거절해야 한다고 했지만, '양무제'는 자신이 북쪽이 땅을 얻는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양나라에서는 후경을 하남왕에 봉하고 도독하남하북제군사 대행대로 삼아 사실상 하남의 땅을 그대로 통치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로서 양나라는 명분상이지만 하남의 땅을 회복하고 국경이 황하에 닿게 되었고, 양무제는 이러한 업적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그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사이 서위와 후경의 사이는 다시 틀어져버렸고, 이에 고징은 아버지 고환의 죽음을 공표하고 '모용소종'을 사령관으로 삼아 다시 하남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이때 양무제는 조카인 정양후 '소연명'을 보내 후경을 돕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양나라와 동위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게다가 548년에 후경은 모용소종에게 대패하였으며, 후경 본인은 탈출에 성공하였지만 소연명이 동위에 포로로 잡히게 된다. 결국 양나라는 하남지역은 얻지도 못한 채 후경이라는 근심거리만 얻게 된 꼴인데, 후경은 양나라로 도망쳐 수양에 이르러서는 그곳을 지키고 있던 '위암'을 압박해 성문을 열게 하였으며, 입성하자마자 위암을 죽이고서는 수양을 차지해버렸다고 한다.
후경의 난
후경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양나라의 신하들을 차라리 근심거리가 없어져서 잘되었다고 했는데, 수양에서 후경이 전쟁에 진 자신을 처벌해 달라는 서신을 보내자, 이를 받아본 양무제는 후경을 남예주목으로 삼았다. 한편 고징은 포로로 잡은 소연명을 이용하여 양나라와의 관계를 다시 되돌리려고 하였는데, 그는 소연명에게 다시 화친하자는 뜻을 넌지시 밝히며 양나라에 서신을 쓰도록 하였다. 이때 고징이 화친을 청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때문에 양나라 내부에서는 이를 가지고 갑론을박하였는데, 한편에서는 후경을 들어 고징이 화친을 들어 후경이 난을 일으키도록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반대하였고, 다른 편에서는 후경과는 상관없이 이참에 일단 화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후경은 양나라에서 버림받을까 불안한 상태에 빠졌는데, 그는 양나라 조정에 간섭하려다 실패하자 아예 동위의 공문을 위조하여 후경과 소연명을 바꾸자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양무제는 이 서신이 위조된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하였고, 그가 이에 동의하는 서신을 보내면서 후경은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게 된다. 당시 후경의 세력은 별 볼 일 없었는데, 그의 주력은 이미 하남에서 대패할 때 대부분 흩어졌으며, 수양으로 도망칠 때는 800여 명의 병사들만 따랐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추정하였을 때 처음에 후경의 세력은 1,000명에서 2,000명 정도 수준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양나라는 '후경의 난'을 진압하는데 실패하였는데, 양나라에서는 여러 황실의 친족들이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양무제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이가 많았으며, 신하들 또한 패를 나눠 이들에 협력하는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경이 난을 일으키자 제일 먼저 양무제의 조카이자 한때 황태자였던 '소정덕'이 그에게 협력하였는데, 소정덕은 큰 배 수십 척을 보내어 후경이 장강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돕는 등 사실상 반란의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되자 후경은 진격할 때마다 점점 세력이 불어났는데, 수도인 건강성에서는 남문을 지키는 책임자가 겨우 완전무장한 기마병 1명을 보고서는 도망쳐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상황이 되어서도 대도독이었던 '유중례'는 상황을 방관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는 양무제의 여섯째 아들이었던 '소윤'과 짜고 반란이 성공하도록 일부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후경의 세력은 부지런히 불어났는데, 그가 약탈을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빈민과 부랑자들이 모여들었고, 최종적으로는 10만에 가까운 군세를 이루었다고 한다.
우주대장군 후경
건강성을 포위한 후경은 한때 화의를 청하여 군대를 물리겠다고 약속하기도 하였는데, 도중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차일피일 시간을 끌더니 다시 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미 건강성은 식량이 떨어져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지경이었고, 결국 549년에 후경은 건강성을 함락시키고 양무제를 사로잡게 된다. 후경에게 협력했던 소정덕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궁궐로 들어섰으나, 후경이 때를 기다리자며 시중대사마 직위를 주고 기다리게 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고 후경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살해되었다. 이후 양무제는 후경에 의해 감금되었다가 굶어 죽었고, 후경은 양무제의 삼남을 황제로 세워 '간문제'로 삼았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후경이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후경은 스스로 상국에 우주대장군, 도독육합제군사의 자리에 올랐으며, 간문제의 딸인 '율양공주'를 데려다 혼인하는 등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였고, 간문제가 다른 신하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고립시키면서, 한편으로 잔혹한 약탈과 학살을 일삼는 등 자신에게 대적하지 못하도록 공포정치를 펴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2년 후인 550년에는 아예 간무제에게 양무제의 증손자인 예장왕 '소동'에게 제위를 넘겨주도록 강요하였고, 이후 사람을 시켜 그를 살해하였으며, 그나마도 3개월 후에는 다시 선양을 통해 소동에게서 황제위를 넘겨받는다. 이로서 후경은 국호를 '한'이라고 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는 내친김에 황제에 오른 것 같은 인물로, 황제로서 조상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어야 하는데, 자기 할아버지 이름도 몰라 부하들이 알려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후경은 오군, 오흥, 회계 등 양나라의 영토를 하나씩 점령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살인, 방화, 약탈 등 잔혹행위를 일삼았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외면받았다. 또 이 시기 강남에 큰 재해가 들어 상황이 좋지 못했는데, 여기에 더해 전쟁을 일삼으면서 재정도 부족한 상태였으나, 후경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릉을 점령하기 위해 또 군대를 움직였다. 그러나 여기서 후경은 상동왕 '소역'의 부하인 '왕승변'과 '진패선'이 이끄는 군대에 대패하였고, 진릉으로 도주했다가 다시 가흥으로 도주하는 등 거듭 쫓기게 되었다. 송강까지 가서는 바다를 통해 도주하였는데, 이때 후경에게는 수십 면의 심복과 배 한 척만 남았다고 하며, 상황이 급해지자 자식들마저 바다에 버리면서 도망쳤다고 한다. 결국 552년 후경은 부하인 '양곤'의 배신으로 사망하였으며, 그 시체는 왕승변에게 보내져 목은 강릉 성문에 걸렸고, 시체는 건강성 시장 바닥에 버려졌는데, 건강의 백성들이 그를 증오하여 갈가리 찢어서 뜯어먹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