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말 삼국시대 위나라 제일의 공신 「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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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대단한 명문가 출신

'순욱'(荀彧)은 중국의 후한말 삼국시대인 163년경에 태어났는데, 예주 영천군 영흠현 출신으로 자는 '문약'(文若)을 썼다. 순욱이 집안은 대단한 명문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조부 '순숙'은 '순자'의 11세손이라고 하고, 당대에 신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았으며, 죽은 뒤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를 기려 사당을 세웠다고도 한다. 아버지 '순곤'은 상서에 제남상을 지냈고, 숙부인 '순상'은 '동탁'이 정권을 잡았을 때 사공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순욱이 아직 4살이었을 때 당시 권세를 휘두르던 환관인 '당형'이 자신의 딸과 혼인시켰다고 하며, 후에 그의 주군이 되는 '조조'보다도 좋은 가문 출신이다. 순욱은 개인적으로도 뛰어났던 것 같은데, 그는 용모가 단정하고 수려하다고 표현되며, 당대의 명사였던 '하옹'은 그를 보고 왕을 보좌하는 재능이 있다는 평을 남겼다고 한다. 순욱은 젊었을 때부터 영천태수 아래에서 주부로 관직을 지냈으며, 189년에는 효렴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수궁령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동탁의 휘하에서 관직을 지내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것 같고, '반동탁 연합'이 결성될 즈음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였다고 한다. 고향에서 순욱은 기주목이었던 '한복'의 초빙을 받아 기주로 향했는데, 그가 도착하기 전에 원소가 거병하여 기주를 장악하였고, 이때 순욱의 형 '순심'이나 동향 사람인 '신평', '곽도' 등은 원소의 휘하에 합류하였으나 순욱은 원소를 따르지 않았다. 이 시기 '조조'는 원소와 함께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191년 조조가 동군에서 흑산적을 물리치고 동군 태수가 되자 순욱은 조조의 휘하에 합류하게 된다. 순욱이 자신을 따르자 조조는 자신의 장자방이라고 추켜세우며 기뻐하였고, 그를 사마로 삼아 함께 다녔다고 한다.

내정을 담당하는 안주인

순욱은 조조가 세력이 약할 때는 직접 종군하기도 했던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는 근거지를 맡아 관리하는 일을 주로 하였는데, 194년 조조가 서주의 '도겸'과 겨룰 때도 근거지인 연주를 맡아 관리하였으며, '장막'과 '진궁' 등이 '여포'를 불러들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이를 간파하고 '하후돈'을 불러들여 견성을 지켜냈는데, 덕분에 조조의 가족들이 무사할 수 있었으며, 연주 일부를 끝까지 사수하여 세력이 와해되지 않도록 유지할 수 있었다. 이때 서주에서 돌아온 조조는 먼저 서주를 다시 공략하려고 하였는데, 순욱이 나서서 근거지인 연주를 되찾는 것을 우선시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195년에 여포는 서주의 '유비'를 의지하여 달아났고 조조는 정식으로 연주목이 되었는데, 이때 '헌제'가 장안을 탈출해 낙양으로 향했다. 이듬해인 196년에 순욱과 '정욱' 등이 조조에게 천자를 모실 것을 강하게 권하였고, 이에 조조가 낙양에서 천자를 영접하였으며, '허도'로 옮겨 새 도읍으로 삼았다. 이 공으로 조조는 대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순욱도 시중에 상서령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천자를 등에 업은 조조는 이때부터 실권과 명분을 손에 쥐고 천하를 논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순욱은 조조에게 수많은 인재들을 추천하기도 하였는데, '순유'와 '종요', '희지재', '곽가' 등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세력에 합류하면서 조조는 패자의 길에 더욱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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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장자방

순욱은 근거지를 관리하느라 전선에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조조는 틈틈이 서신을 보내 순욱과 책략을 의논하였다. 조조는 완에서 '장수'와 겨룰 때부터 원소와의 결전을 염두에 둔 것 같은데, 순욱은 이에 대해 조조의 세력이 원소에게 충분히 대항할만하다고 평하며 결단을 독려하였고, 동시에 서주의 여포를 해결하는 것이 선결과제임을 상기시켰다. 또 '관도 대전'에서도 조조가 마음을 굳게 다잡을 수 있도록 도왔으며, 관도에서 원소가 패배한 이후 유표를 공격하려는 조조에 대해, 먼저 원소의 잔당들을 완전히 섬멸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그 결과 조조는 하북의 패자로 거듭날 수 있었고, 203년 순욱은 이 공으로 만세정후에 봉해졌다. 이후로도 조조는 계속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순욱과 상의하였고, 그뿐만 아니라 순유, '순연', 순심, '순열' 등 순씨 일가가 조조의 휘하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순욱은 조조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고, 자신의 딸을 순욱의 장자인 '순운'에게 시집보내 사돈을 맺기도 하였다. 조조의 휘하에서 순욱은 대단한 위세를 갖게 되었지만, 항상 겸손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녹봉을 받아도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어 집에 남는 재산이 없었다고 한다.

최후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는 점차 갈라지게 되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200년 조조의 암살을 모의한 죄로 처형당한 동승의 일이 있은 후에, 헌제의 황후였던 '복황후'가 두려움을 느껴 아버지인 '복완'에게 조조를 없애달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복완은 이 일을 도모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결국 순욱과 처남인 '번진'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때 순욱은 일이 크게 될 것을 우려한 듯 덮어두었으나, 번진은 후에 조조에게 이 일을 밀고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순욱은 이 일이 문제가 될까 두려워 조조의 자식을 새 황후로 삼으라고 권하였다고 하는데, 이미 알고 있던 조조는 순욱이 이 일을 자신에게 숨긴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였고, 이 때문에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한나라의 존망의 문제로 갈라섰다고도 하는데, 세력이 커짐에 따라 주변에서 조조를 황제로 삼으려는 자들이 나타났고, 이 때문에 한나라의 존속을 목표로 했던 순욱과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두 사람의 사이가 어땠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데, 212년 순욱은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생전에 썼던 일기들을 죽기 전에 모두 태워버렸다고 한다. 순욱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문이 많이 생기는데, 그는 동오를 정벌하러 가는데 참여했다가 수춘에서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도 하고, 조조가 내린 빈 찬합을 보고서 그 속뜻을 읽고는 스스로 독을 먹고 죽었다고도 한다. 순욱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알 수 없으나, 덕분에 그는 한나라의 최후의 충신으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하며, 이후로도 순씨나 순욱의 자식들은 위나라에서 계속 높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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