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말 삼국시대 동오의 명장, 활의 명수 「태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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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자

만천과해

'태사자'(太史慈)는 중국의 후한말 삼국시대인 166년경 태어났는데, 동래군 황현 출신으로 자는 '자의'(子義)를 썼다. 태사자는 키가 180Cm가 넘는 장신에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닦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데, 거기에 무예도 뛰어났다고 한다. 특히 궁술이 매우 뛰어났는데, 활쏘기에 적합한 원숭이 같이 긴 팔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백발백중으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186년 태사자는 동래군의 주조사로 지냈는데, 한 번은 동래군과 상급 관청인 청주 사이에 문제가 생겨서 빨리 낙양에 보고를 올려야 하는 일이 생겼다고 한다. 이때 군의 대응이 주보다 늦어 문제가 될 뻔하였는데, 태사자가 재빨리 낙양으로 달려가서 주에서 온 사자를 속여 공문을 훼손하였고, 이후 책임을 거론하며 함께 도주하자고 부추겨 그와 함께 낙양성을 떠났다. 그러나 이후 태사자는 틈을 봐서 낙양으로 다시 돌아가 군의 공문을 올려 문제를 해결하였는데, 이로 인해 청주는 불이익을 보게 되었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태사자는 재치 있는 사람으로 큰 명성을 얻었지만, 동시에 청주의 관리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어 한동안 요동 지역으로 피신하여 몸을 숨기게 된다. 한편 189년에 북해의 상으로 부임한 '공융'은 이러한 태사자의 명성을 듣고,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대신 어머니를 돌보아 주었다고 하는데, 193년에 황건적의 잔당인 '관해'와 싸우다가 포위 당해 고립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마침 이때 태사자가 요동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태사자의 어머니는 공융이 위태로운 상황인 것을 알고, 아들 태사자에게 그를 도와주도록 요청하였다고 한다. 공융은 황건적의 포위를 풀기 위해 평원의 상이었던 '유비'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하였으나, 포위망을 뚫고 구원을 요청하러 갈 사람이 없어 곤란한 상태였는데, 마침 태사자가 야밤을 틈타 성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고, 그가 스스로 이 임무를 맡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들어올 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성을 나가려고 할 때도 황건적의 포위망을 뚫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이에 태사자는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내어 밤마다 성 밖으로 나가 활을 쏘는 연습을 하게 된다. 이러한 행동은 사실 매우 뜬금없는 것이긴 한데, 처음에는 황건적들도 밤마다 성 밖에 나와 활을 쏘기를 하는 태사자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이 행동이 계속되자 이내 관심을 끊게 된다. 이것이 바로 태사자가 노리는 것이었는데, 태사자는 황건적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틈을 타서 포위망을 빠져나가 유비에게로 향했다. 이후 태사자는 유비의 도움을 받아 3천 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올 수 있었고, 관해는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고 한다. 이때 사용한 태사자의 계책은 유명한 '삼십육계'의 하나로 '만천과해'라고 하는데, 평범한 행동을 통해 적의 눈을 속여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계책이다. 이처럼 태사자는 무예가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지모도 있는 장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손책과의 대결

태사자는 공융이 처한 곤경을 모면할 수 있도록 도왔지만, 딱히 공융의 휘하에 합류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194년경 '손책'과 '유요'가 대결할 때는 유요의 휘하에 있었다. 태사자와 유요는 고향이 같은 동향 사람이었는데, 태사자는 이러한 인맥을 이용하여 유요 밑에서 벼슬을 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 인물을 잘 보는 것으로 유명했던 '허소'가 유요에게 태사자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말을 하였고, 이에 유요도 태사자를 중용하지 않고 말단 병사나 다름없이 취급하면서 정찰 임무 정도나 맡기었다고 한다. 그래도 태사자는 유요 밑에서 열심히 근무하였던 것 같은데, 하루는 기병 한 명과 함께 정찰을 하던 도중 손책과 조우하게 되었고, 손책이 휘하에 13명이나 되는 기병과 함께 있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 그와 일기토를 벌이게 된다. 두 장수는 상당히 치열하게 싸운 것 같은데, 가히 '용호상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결투였으나, 결국 소란을 듣고 양군의 병사들이 모여들면서 물러나게 된다. 이때 태사자는 손책의 투구를 빼앗았으며, 손책은 태사자의 단극을 빼앗아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태사자가 선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는데, 유요는 예장으로 도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끝까지 태사자를 중용하지 않았다. 결국 태사자는 산에 들어가 산월족과 합류하여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내 손책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포로가 된 태사자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었는데, 이전의 결투로 그를 높이산 손책은 포박을 풀어주면서 자신과 함께 할 것을 권하였다고 한다. 이에 감복한 태사자는 스스로 나서서 유요의 패잔병들을 모아 데리고 오겠다고 청했고, 손책은 기꺼이 이를 들어주었다. 이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태사자가 그대로 도망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고 하는데, 의를 중히 여긴 태사자는 병사를 모아 약속시간까지 돌아왔다고 한다. 이후 태사자는 절충중랑장에 임명되었으며, 오나라의 신하가 되어 손책 사후에는 '손권'을 섬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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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오의 명장

198년에 유요가 죽자 손책의 명을 받아 예장 일대를 정찰하였으며, 그의 정찰 활동을 통해 손책은 예장을 평정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예장 일대에서 활동한 것 같은데, 경계를 맞대게 된 '유표'가 조카 '유반'을 보내 예장의 애현과 서안현 등을 계속해서 침범하였기 때문에, 손책은 202년에 아예 해혼현과 건창현 등 주변의 6개 현을 묶어 관할하도록 하였으며, 태사자를 건창도위로 삼아 이 임무를 맡겼다. 태사자가 손책과 함께 도적을 토벌하러 갔을 때, 적진의 망루 위에서 어떤 도적이 욕을 하며 도발하였는데, 태사자가 활을 쏘아 그의 손을 맞혀 기둥에 메어 놓았다던가, '조조'가 태사자의 명성을 듣고 그에게 '당귀'를 보냈다는 등의 일화가 있기는 하지만, 이후로 전해지는 활약은 거의 없다. 그러나 기존의 행적을 보았을 때 태사자는 손권의 휘하에서도 계속해서 예장 일대에서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태사자는 상당히 뛰어난 장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별 볼 일 없는 최후를 맞이했는데, 그는 206년에 남쪽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가 40세의 젊은 나이로 풍토병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오래 살았다면 동오에서 상당한 공신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하였으며, 이후 그의 아들 '태사형'(태사향)이 계속해서 손권을 섬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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