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해적의 황금시대 두 번째로 세계 일주를 완수한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
- 역사
- 2023. 11. 7.
노예 밀무역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는 1540년경 영국 남부의 타비스톡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본래 농부였으나 후에 개신교의 목사로 전직하였다고 한다. 드레이크는 12명의 형제들 중 장남으로 10세 무렵부터는 친척이자 작은 배의 선장이었던 '윌리엄 호킨스' 휘하에서 뱃일을 하며 경험을 쌓았다고 하는데, 호킨스 선장은 드레이크의 업무태도를 꽤 마음에 들어 한 것 같고, 가족이나 후계자도 따로 없었기 때문에 유산으로 배를 드레이크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이 배를 팔아버리고서는 여행에 나섰고, 이후 또 다른 친척인 '존 호킨스'의 휘하에 합류하여 노예 운송선에서 선원 생활을 계속하였다. 당시에 스페인은 신대륙의 노예무역에 대해 자신들과 포르투갈에만 허용하고 있었는데, 존 호킨스는 포르투갈의 노예 운송선을 탈취하는 등 사실상 해적이나 다름없는 행위를 통하여 사업을 시작하였으며, 이 밀무역이 상당히 수익이 좋았는지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도 여기에 투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곧 스페인의 견제를 받기 시작하였으며, 운이 좋지 않았는지 한 차례 사업이 실패하기도 하였는데, 그다음 항해인 1567년에는 폭풍을 만나 함대가 큰 피해를 입었고, 어쩔 수 없이 멕시코만에 있는 스페인의 항구에서 수리를 받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사이 스페인 총독의 함대가 인근에 도착하였는데, 스페인 함대는 곧 호킨스의 함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호킨스와 드레이크는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다른 모든 것을 그곳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드레이크는 자신이 선장으로 있던 '주디스 호'를 이끌고 혼자 빠져나갔는데, 이러한 행동은 나중에 다른 배를 타고 간신히 영국으로 귀환한 호킨스에 의해 크게 비난당하였다. 이 사건은 드레이크가 해적으로 활동하면서 집요하게 스페인을 괴롭히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도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을 해주어야 할 것 같다.
카리브해의 해적
드레이크는 157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해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주로 카리브해를 배회하며 스페인 선박이나 마을을 습격하였으며, 1572년에는 파나마 인근에서 스페인 수송선을 약탈하다가 내륙에서 파나마로 금, 은 등의 귀금속들을 운반하는 행열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게 된다. 이듬해인 1573년 드레이크는 프랑스 해적들과 손잡고 이 행열을 습격하였는데, 지나친 약탈물의 규모 때문에 전부 들고 갈 수 없었고, 결국 일부는 인근에 묻어두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때 약탈한 금과 은덩이들의 숫자가 2만 개가 넘었다고 하는데, 이 어마어마한 양의 재물을 들고 영국으로 귀환한 드레이크는 그중 일부를 자발적으로 영국 정부에 헌납하였다고 한다. 드레이크는 정식으로 영국 정부로부터 사략 허가를 받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탈물의 일부를 자발적으로 상납하였다고 하며, 아마 호킨스의 휘하에 있을 때부터 알게 된 정부 인사나 귀족들과의 연결고리가 있거나 후원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덕도 있었는지, 스페인은 영국에 드레이크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무시되었고, 드레이크도 스페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는지 한동안 은둔 생활을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두 번째 세계 일주
1577년 드레이크는 여러 세력의 투자를 받아 다음 항해를 준비하였는데, 그 목적은 남미 지역에서 스페인에 대한 약탈과 태평양으로 진입하는 것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드레이크는 자신의 기함인 '골든 하인드 호'와 4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플리머스에서 출항하였는데, 출항 직후 폭풍우를 만나 한번 좌절되었지만 수리를 마친 후 재차 플리머스에서 출항하였다. 드레이크 함대는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포르투갈의 상선을 나포하여 함대에 추가하는 등 성공적인 항해를 시작한 것처럼 보였지만, 대서양을 건너면서 큰 피해를 입어 두 척의 함선을 침몰시켰고, 아르헨티나 인근 해안에서 다시 한 척을 더 포기해야 했다. 드레이크는 도중에 함대의 공동 사령관인 '토마스 다우티'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하거나, 그를 옹호하는 목사를 파문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지만, 1578년에 성공적으로 '마젤란 해협'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서 드레이크는 마젤란 해협을 두 번째로 통과하는 기록을 세웠지만, 태평양에 도달한 함대는 다시 격렬한 폭풍을 만나게 되었고, 결국 세 척의 배 중 다시 한 척을 침몰시켰으며, 다른 한 척은 영국으로 귀환하도록 하였다. 이후 드레이크는 골드 하인드 호 한 척만을 이용하여 항해를 계속했는데, 이때 드레이크는 상당히 남쪽으로 떠밀려가게 되었고, 거기서 '혼곶'과 '드레이크 해협'을 최초로 발견하게 된다. 이후의 항해는 매우 순조로웠는데, 드레이크의 함대는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항해하면서 약탈을 계속하였고, 그들은 항해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다. 이제 드레이크에게 남은 과제는 안전하게 본국으로 귀환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그동안 겪은 악천후와 스페인의 위협 때문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에 회의적이었고, 결국 남은 선택지는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를 지나는 것뿐이었다. 골드 하인드와 나포한 한 척의 함선을 합친 두 척으로 구성된 함대는 북미로 항해하여 최적의 지점을 물색하였고, 1579년 몇 주에 걸쳐 충분히 함대를 정비한 후에 태평양을 횡단하는 항해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몇 달간의 항해 끝에 인도네시아의 말루쿠 제도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다시 인도양을 건너 아프리카 최남단인 희망봉을 지나 1580년에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얼마 후 드레이크의 함대는 성공적으로 플리머스로 귀환하였고, 드레이크는 '페르난디드 마젤란' 이후로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세계 일주를 달성한 모험가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세계 일주를 할 때 태평양을 횡단하면서 필리핀과 동남아시아를 지나가는 방식으로 일본이나 중국을 건너뛰었으며, 인도양을 건널 때도 인도를 거치지 않았는데, 이는 엄밀히 따지자면 세계 일주가 아닌 지구 횡단 정도로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드레이크는 역사에 남을 업적을 이룩하였으며, 또 엘리자베스 1세에게 엄청난 양의 재물을 바치기도 하였는데, 그 가치는 영국의 한 해 국고 수입보다 많은 정도였다고 한다. 이 전리품들 또한 이전처럼 스페인의 함선을 약탈하여 얻은 것이었는데, 엘리자베스 1세는 이번에도 드레이크를 처벌하라는 스페인의 요구를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드레이크를 영국 해군 중장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후 드레이크는 대놓고 영국 해군을 끌고 다니며 해적질을 하였고, 이러한 그의 행위는 영국과 스페인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드레이크가 세계 일주를 마치고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바친 재물을 기반으로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세워졌다고도 하는데, 이러한 점을 보면 드레이크가 영국의 발전에 기여한 정도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칼레 해전
드레이크는 한동안 정치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1581년에는 플리머스의 시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85년 '영국-스페인 전쟁'이 벌어지자 여왕의 명령을 받아 스페인에 대한 선제공격을 개시하였는데, 드레이크는 스페인 본토인 이베리아 반도와 카리브 해의 식민지를 돌아다니며 항구 도시들을 습격하고 약탈하였다. 이는 드레이크가 평소에 하던 해적질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이러한 그의 행위는 생각보다 효과적이어서 스페인의 공격 준비를 지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 드레이크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1587년에 있었던 그의 습격 때문에 스페인은 '무적함대'의 준비를 소홀하게 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후에 많은 지휘관들과 병사들이 질병으로 사망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588년 스페인의 함대는 본격적으로 영국 본토를 향해 출항하였는데, 드레이크는 '찰스 하워드' 공작의 휘하에서 부사령관으로 함대를 지휘하였다. 그런데 이때 드레이크는 기행을 저질렀는데, 영국 해협에서 그는 밤동안 스페인 함대를 추격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였지만, 도중에 약탈하기에 적합해 보이는 스페인 함선을 발견하였고, 이후 완전한 잠행상태로 항해하여 이 배를 약탈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영국 함대는 길을 잃고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드레이크 자신도 한동안 함대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스페인 함대와의 전투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스페인 함대가 칼레 인근에 정박한 후에 다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영국 함대에서는 화약 등 인화성 물질을 가득 실은 배를 보내 터트려 화공을 펼치는 작전을 시행하였는데, 이것은 드레이크가 제안한 작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결과적으로 화공 자체는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였지만, 대신 스페인 함대의 대열이 흐트러졌으며, 회피기동을 하기 위해 많은 스페인 선박들이 닻줄을 끊는 등 피해를 보았다. 이후 영국 함선들은 흐트러진 스페인 함선들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드레이크는 전투보다는 좌초된 배들을 약탈하는데 더 열을 올렸고, 결국 화가 난 하워드 공작에 의해 부사령관에서 해임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영국 함대는 스페인 함대에 대해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데는 실패하였는데, 그러나 북해의 폭풍이 불면서 스페인 함대는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폭풍으로 인해 영국 함선도 피해를 보기는 하였지만, 이전의 작전으로 닻줄이 끊긴 스페인 함선들의 피해가 훨씬 컸고, 인근에 대피할 항구도 없었던 스페인 함대는 본국으로의 귀환을 강요받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스페인 함대는 더 큰 타격을 입게 되는데, 그들은 무방비 상태로 영국 함대의 공격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영국 해협을 통과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스코틀랜드 북쪽을 돌아 북해를 통해 귀환을 시도하였다가 폭풍과 전염병 등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스페인 무적함대는 영국 함대가 아닌 북해에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담이지만 드레이크의 기행들은 전쟁 후 비난이나 처벌받아 마땅한 행위였는데, 그는 부사령관에서 해임된 후 한발 먼저 본토로 돌아갔으며, 스페인 함선에서 약탈한 재물들을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바치며 거짓 변명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여왕이 이것을 믿었을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영국은 막대한 전비를 지출할 여력이 없는 상태였고, 이 때문에 드레이크가 가져온 재물들은 여왕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영국의 역습과 말년
영국은 칼레 해전 이듬해인 1589년 스페인에 역습을 가하기로 하였는데, 드레이크는 함대를 이끌고 수리중인 무적함대의 잔존 함선들을 격파하고, 포르투갈에서 반란을 획책하는 등의 임무를 띠고 출항하였다. 그러나 스페인 북부 항구에서의 공격은 격퇴되어 완전히 실패하였고, 리스본에서 포르투갈의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지상군과의 협력에도 차질을 빚으면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여기에 더해 드레이크는 마을을 약탈하다가 민병대에게 공격당해 피해를 입었으며, 영국으로 복귀하는 도중에 두 척의 함선을 나포당하는 등 이번에는 영국이 크게 패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11,000여 명에 달하는 선원과 병사들을 잃었다고 하는데, 이는 영국과 스페인의 규모를 생각했을 때 무적함대 손실에 비견될 만한 정도로, 이후 영국은 대서양에서 스페인과 전면적인 해전을 벌일 역량을 완전히 상실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영국의 해적을 이용하는 방식의 공격은 여전히 유효하였고, 이는 영국에게 소위 '해적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기간 동안 톡톡한 이익을 보장해 주었다. 이때부터 드레이크의 운이 바닥난 것 같은데, 그는 죽을 때까지 항해를 계속하였지만 이후로 커다란 성과를 올리는 것에 실패하였다. 1595년에는 라스 팔마스를 공격하는데 실패하였고, 카리브해에서 스페인의 식민지를 공격하는 것에도 번번이 실패하였다. 푸에르토리코의 산후안에 있는 엘 모로 성을 공격할 때는 그가 탄 함선에 포탄이 명중하기도 하였고, 파나마를 정복하려는 시도도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1596년에는 포르토벨로 인근에서 스페인 수송선을 노리고 정박하고 있었는데, 드레이크는 여기서 55세의 나이로 병사하게 된다. 그의 시신은 납으로 된 관에 넣어져 바다에 수장되었는데, 오늘날까지 여러 다이버와 보물 사냥꾼들이 그의 관을 찾아 수색작업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드레이크는 악명 높은 해적으로 범죄를 일삼았지만, 고향인 영국에서는 영웅 취급을 받으며 귀족의 작위를 받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의 최후는 선상에서 병으로 사망한 것이지만, 그래도 다른 유명한 해적들처럼 처형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편에 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