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프랑스 프랑스 혁명을 공포로 물들인 정치가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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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어린 시절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는 1758년에 프랑스 북부 도시인 아라스에서 태어났다. 로베스피에르의 집안은 귀족은 아니었으나 부유층에 속했는데, 그의 선조들은 관료와 상인으로 활동하며 부를 축적하였고, 그의 조부는 아라스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는데, 로베스피에르의 부모는 그를 임신하게 되어 서둘러 결혼하였고, 그로 인해 그의 조부와 불화가 생겨 사이가 소원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로베스피에르의 어머니는 그가 6세 무렵인 1764년에 난산으로 사망하였고, 아버지도 약 2년 후에 행방불명되면서 로베스피에르와 남동생은 외조부집에, 여동생들은 고모들 집에 맡겨졌다고 한다. 이와 별개로 로베스피에르는 어렸을 때부터 상당히 뛰어났던 것 같은데, 그가 8세로 중학교에 해당하는 아라스의 콜레주에 입학했을 때는 이미 읽기와 쓰기를 할 줄 알았다고 한다. 1769년에는 주교의 추천을 받아 파리의 '리세 루이르그랑'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는데, 리세 루이르그랑이 상당한 명문학교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의 학문적 성취에 대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때 '루이 16세'가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로베스피에르는 성적 우수자 자격으로 학생들을 대표하여 축사를 낭독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날은 비가 내렸을 뿐만 아니라 루이 16세가 늦게 도착하였기 때문에, 학생들은 비를 맞으며 몇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게다가 루이 16세는 기념식이 끝나자마자 곧장 돌아갔으며,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학생들에게 어떠한 감사의 표시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그가 왕족과 귀족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또 로베스피에르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으며, 찢어진 옷을 입거나 해진 신발을 신고 다닐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경험들이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삼부회와 정치 입문

1780년 로베스피에르는 졸업 후 벅학 학위를 받아 아라스 지방 법원의 판사가 되었으나, 1년여 만에 그만두고 아르투아 주 고등법원의 변호사로 자리를 옮겼다. 변호사 로베스피에르는 상당히 유능했던 것 같은데, 그는 법률가로서 성공하여 꽤 괜찮은 소득을 얻을 수 있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 법률 상담이나 변론을 해주는 등 사회 활동을 통해 명성을 쌓아나갔다. 그는 상당히 진보적인 사람이었는데, 당시부터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거나, 법적 처벌에 대해 신분에 관계없이 평등해야 한다고 요구하였으며, 유죄가 선고된 자의 재산 몰수에 대해 반대하고, 서자들의 처우 개선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여러 개혁적인 행보를 펼쳤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통해 정치적인 명성을 얻은 로베스피에르는 1789년 '삼부회'가 소집되자, 지역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제3신분인 평민들의 대표로 대의원에 선출될 수 있었다. 이후 개혁을 원하는 평민층과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귀족과 주교 계층 간의 불화로 삼부회가 파행되었는데, 로베스피에르는 이때 있었던 '테니스 코트의 서약'에서 45번째로 맹세하였으며, 새로 결성된 국민의회에서 500회에 가까운 연설을 하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하였으나, 이때까지 그는 크게 주목받는 정치인은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 초기동안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파'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급진파인 '산악파'로 분류되는 인물이었지만, 당시에는 온건파로 분류되는 '지롱드파'가 주도권을 쥐고 혁명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루이 16세 일가가 파리를 떠나 도주한 '바렌 사건'이 일어나면서 군주제를 지지하던 왕당파와 지롱드파는 점차 시민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고, '프랑스 혁명 전쟁'이 시작되면서 혼란이 가중되자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파는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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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공회와 공포정치

1792년 있었던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프랑스 군대는 상당히 불리한 상태에 있었는데, 그들은 군 경험이 풍부한 기존의 귀족 출신 지휘관들을 군대에서 쫓아냈으며, 국민군대를 새로 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훈련도 부족한 상태였다. 자연스럽게 프랑스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는데, 자코뱅파 등 급진주의자들은 이를 왕정을 완전히 폐지할 기회로 이용하려고 하였고, 그해 8월에 파리에서 대대적인 시민 봉기가 일어나면서 이 같은 움직임은 성공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는 왕정이 완전히 폐지되고 프랑스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일어난 시민들의 폭력적인 행위와 학살 등을 지지한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파는 '국민 공회'에서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또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에 일어난 '발미 전투'에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경미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포기하고 철수하면서 프랑스 혁명은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93년에 프랑스 혁명 정부가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면서 프랑스에서 다시 전운이 감돌게 된다. 로베스피에르는 평소에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였음에도 적극적으로 루이 16세의 처형을 진행하였고, 그와 자코뱅파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포함하여 많은 왕족과 귀족들을 국민의 적으로 선포하였으며, 여러 누명을 씌워 그들을 처형하면서 시민들의 지지를 확고히 하는데 이용하였다. 또 혁명에 반대하는 이들을 잔혹하게 탄압하였는데, 그들은 공안위원회, 보안위원회, 혁명재판소 등의 기관을 이용하여 수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로 보내 처형하였다. 그 중에는 범죄자나 반혁명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단순히 범죄에 연루된 사람부터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이들도 포함되어있었다. 로베스피에르가 정권을 장악한지 단 1년 만에, 파리에서 그가 단두대로 보낸 사람이 17,000명이 넘었다고 하며, 그 외에도 지방 곳곳에서 반혁명파를 숙청한다는 명목으로 3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대포를 쏴 죽이는 등 학살을 자행하였다고 한다. 특히 '방데 전쟁'에서 일어난 학살이 유명한데, 프랑스 혁명 정부는 방데 일대에서 반혁명을 이유로 최소 12만에서 최대 60만 명에 달하는 이들을 잔혹한 방식으로 학살하였다. 잔혹한 처벌과 탄압을 통해 공포감을 조성하여 대중들을 복종시키는 통치방식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이를 지칭하는 '공포정치'라는 말은 이 시기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파의 통치행태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로베스피에르와 프랑스 혁명의 몰락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를 통해 프랑스 공화국의 실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프랑스의 혼란을 종식시킬 수 없었는데, 계속되는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여전히 불리한 상태였으며, 기근이 계속되면서 식량부족 문제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식량난과 물가상승이 계속되자 시민들의 불만과 분노가 누적되기 시작하였으나,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파는 정적인 지롱드파와 왕당파를 축출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었으며,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현저히 부족하였다. 1794년 4월에는 자코뱅파의 거물이자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동맹이었던 '조르주 자크 당통'마저 부패 혐의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는데, 어느 누구든 언제든지 처형될 수 있다는 이러한 공포감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결국 자코뱅파 내의 온건파에 속하는 '푀양파'가 지롱드파와 손을 잡는 결과를 불러오게 되었다. 이렇게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로베스피에르 개인은 본래 지방에서 일어나는 학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고 하는데, 그는 당통이 숙청되고 정권을 한 손에 쥐게 되자 이들을 처벌할 계획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1794년 7월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 나가 연설하였는데, 이들을 직접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공회 안에 반혁명파가 아직 존재한다며 2시간 동안이나 이들을 비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특정인을 거론하지 않은 이러한 협박에 가까운 연설에 공회에 참석한 많은 의원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고, 피로감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장랑베르 탈리앵'과 '자크니콜라 비요바렌' 등이 단상에 올라 로베스피에르를 비난하면서 의원들을 선동하자 분위기가 극적으로 반전된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회를 빠져나와 몸을 피했지만 고발당해 체포되었고, 그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 것처럼 변변찮은 재판을 통해 만장일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한때 프랑스 공화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로베스피에르가, 자신이 시행한 공포정치 끝에 스스로 처형한 다른 많은 이들처럼 단두대에 끌려가는 처지가 된 것으로, 이 사건을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라고 한다. 로베스피에르는 개인적으로는 혁명, 자유, 평등,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는 혁명주의자였지만, 그가 원했던 원치 않았든 간에 그와 자코뱅파의 공포정치 아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이 때문에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를 축출한 이들도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는데, 이후 정권을 잡은 '총재정부' 또한 당면한 프랑스의 혼란을 잠재우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정권을 잡고 군주제로 회귀하게 되면서, 사실상 이 시기의 프랑스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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