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프랑스 프랑스 대혁명의 세 거두 「조르주 자크 당통」
- 역사
- 2024. 2. 25.
왕실 고문회의 변호사
'조르주 자크 당통'은 1759년 프랑스 북동부 샹파뉴 지방의 '아르키쉬르오브'(Arcis-sur-Aube)에서 태어났다. 당통은 유아기에 집의 목장을 기어 다니다 황소에게 공격을 받거나 천연두를 앓는 등의 이유로 얼굴에 흉터가 있었는데, 상당히 호방한 성격이었던 듯 얼굴에 흉터가 있는 것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당통의 아버지는 중급 변호사였지만, 그가 2살 무렵에 사망하면서 가난한 생활을 하였고, 이후 1770년에 어머니가 곡물상인과 재혼하면서 경제상황이 나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13살 무렵에는 집을 떠나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이때 처벌을 받게 된 친구를 감싸고 체벌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내는 활동을 하였으며, 학교장을 설득하여 체벌 금지를 관철시키는 등 정치인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1780년에는 파리에서 사무원으로 활동하며 정착하였으며, 1784년부터 법률 공부를 시작하여 1787년에는 왕실 고문회의의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정치나 혁명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에 당통은 결혼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3명의 자식을 두었다.
자코뱅파의 정치인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는데, 당통은 이때부터 혁명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그는 자원하여 자신이 속한 지역의 경비대에 소속되었다고 한다. 곧 혁명 세력에서 두각을 나타낸 당통은 코르들리에 지구의 의장이 되었으며, 혁명세력 중 급진파인 '자코뱅파'에 속하였고, 1790년에는 정치결사인 '클뢰브 데 코르들리에'(Club des Cordeliers)을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이후 자코뱅파는 1791년에 '샹 드 마르스의 학살' 사건으로 온건파인 '푀양파'와 분리되었는데, 이때 당통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한동안 영국의 런던에서 도피생활을 했다고 한다. 당통은 그 해 말 사면받은 후에 다시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이때부터 당통을 비롯한 급진파들의 정책은 본격적으로 온건파의 방해를 받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통 등은 이러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8월 10일 사건'을 일으킨 것으로 보이는데, 이듬해인 1792년 당통은 시민들을 선동하여 튀르리 궁전을 습격시키는 등 혼란을 가중시키고 왕실을 압박하였다. 결과 이 사건으로 인해 '루이 16세'는 직무를 정지당하고 '탕플 탑'에 유폐되는 등 실질적으로 축출되었고, 그를 대신하여 직무를 대행하게 된 '지롱드파'의 임시 집행위원회는 급진파와의 소통 창구로서 당통을 내각 사법 장관에 임명하였다. 당통은 특히 연설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그는 '프랑스 혁명 전쟁'의 불리한 상황에서 '용기가 항상, 용기가 더욱, 용기가 필요하다'는 유명한 연설을 통해 시민들을 고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당통의 노력도 있어 프랑스는 전쟁에서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었고, '발미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었다. 또 자코뱅파는 이를 기회로 프랑스 공화국을 이끄는 '국민공회'를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로베스피에르와 공포정치
프랑스 혁명시기 자코뱅파는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가 장악하고 '공포정치'를 펼친 것으로 유명하지만, 실질적으로 로베스피에르는 특정 세력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급진파인 자코뱅파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세력은 '장폴 마라'의 영향력 하에 있었고, 당통은 본인의 인기를 바탕으로 나머지 상대적으로 온건적인 이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즉,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파 전체를 아우르는 영향력을 발휘했다기보다는, 강경파인 장폴 마라와 온건파인 당통의 사이를 중재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코뱅파의 리더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자코뱅파의 통치하에 이루어진 프랑스 혁명 당시의 만행들은 로베스피에르 개인의 문제가 아닌, '프랑스 대혁명의 세 거두', 혹은 '자코뱅파의 세 거두'로 불리는 로베스피에르, 장폴 마라, 당통 셋 모두의 책임인 것이다. 그들의 공포를 통한 억압은 한시적으로 정권을 유지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그것만으로 당면한 프랑스의 혼란을 해결할 수는 없었고, 그 공포가 자신들 내부까지 잠식하면서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당통은 평소 여성편력이 심하고 온갖 미식과 향락을 즐기는 낭비벽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도덕을 권장하고 금욕적이던 로베스피에르와의 불화를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결국 당통은 1794년 외국인과 결탁하여 뇌물을 받고 반혁명 세력을 도와준 혐의로 고발되었고, 자신이 만든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을 판결받고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게 된다. 당통의 재판은 당시의 다른 재판들처럼 제대로 된 반론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제 그의 죄상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당통을 비롯한 그의 일파는 완전히 숙청되었고, 결과적으로 로베스피에르는 혼자 공화국의 실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당통은 처형장으로 향하면서 로베스피에르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자 '다음은 당신 차례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3개월 뒤 '테르미도르의 반동'을 통해 로베스피에르도 자신이 처형한 많은 다른 이들처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