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혁명이후의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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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

비엔나 회의와 왕정복고

181년 '나폴레옹'이 퇴위하면서 전후처리를 위해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유럽 각국의 대표가 모여 '비엔나 회의'(빈 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에서는 혁신적인 내용은 아무것도 없고, 유럽의 상태를 '나폴레옹 전쟁'이전으로 되돌리는 것만을 우선하였다. 회의는 5대 강국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는데, 주요 참가자는 회의의 주재국인 오스트리아의 외무상인 '메테르니히', 영국의 외무상인 '캐슬레이 자작'과 '웰링턴 공작',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국왕, 러시아 제국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 프랑스의 외무상 '탈레랑' 등이었다. 이 회의의 결정사항에 따라 변한 유럽의 국제질서를 '빈 체제'라고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탈레랑이 주장한 '정통주의'에 따른 '프랑스 혁명'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자유주의'와 '국민주의' 활동을 탄압하는데 있었다. 이에 따라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 왕정복고 되었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은 '신성동맹'이 채결하였는데, 점차 그 범위가 확장되어 영국, 터키, 로마 교황령을 제외한 모든 유럽 군주가 참여하는 동맹이 되었다. 영국은 신성동맹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따로 '사국 동맹'(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을 맺었으며, 이후 1818년 프랑스가 참가하여 '오국 동맹'이 되었다. 각 국가는 이를 통해 혁명을 저지하고 현재의 왕정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프랑스 7월 혁명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사망하고 즉위한 '샤를 10세'는 루이 18세보다 더 혁명에 반동적이었다. 정기 간행문을 검열하며 언론을 탄압하고,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외국으로 망명을 떠났던 귀족들에게 토지를 돌려주는 등의 시대착오적인 정책으로 인해 민중의 반발이 다시  크게 일어났다. 1830년 샤를 10세는 군사력을 과시하는 한편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알제리'로 출병하는 등의 행동을 했으나, 국민은 그에 개의치 않고 그대로 파리의 거리를 점거해, 샤를 10세는 다시 영국으로 망명하고 그의 먼 친척인 '루이 필리프'가 혁명세력에 의해 프랑스 왕이 되면서 '입헌군주제'인 '7월 왕정'이 시작되었다. 이 혁명의 불은 네덜란드로 옮겨 붙어, 남 네덜란드가 '벨기에 왕국'으로 독립하였다. 러시아에서는 폴란드 지역에서 '바르샤바 혁명'을 일으켰고, 이탈리아에서는 '카르보나리당'이 일어났지만 각각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군에 진압되었다.

2월 혁명과 프랑스 제2공화국

7월 혁명 때 선거로 왕위에 취임한 '루이 필리프'지만, 당시 선거는 극단적으로 제한된 선거로 국민의 불과 1% 미만 밖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선거제도의 개선을 요구했지만 내각에서 부결되어, 개혁파는 '개혁연회'를 개최하며 전국적인 규모의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불황으로 인하여 사회가 불안한 상태에서 정부가 개혁연회를 금지시키면서, 반발한 민중들이 시위하기 시작했다.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내각이 사임하였으나 민중은 멈추지 않았고, '루이 필리프'는 퇴위하여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이에 임시 정부를 조직하여 새로운 헌법을 의회에서 승인하였다. 1848년에 일어난 일련의 혁명을 '2월 혁명'이라고 부르며, 그 결과 완성된 정부를 '프랑스 제2공화국이라고 한다. 혁명의 불은 다시 유럽 전역에 퍼져,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도 '3월 혁명'이 일어나고, 헝가리나 사르데냐에서는 반란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빈 체제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민주화에 성공한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프랑스 제2제국

나폴레옹 1세의 인기는 어수선한 분위기의 프랑스 국내에서 매우 높아, 제1제국 당시의 추억에 젖어 '보나파르티즘'(보나파르트 주의)이라고 말하는 영웅주의가 만연하고 있었다. 2월 혁명으로 대통령이 된 루이 나폴레옹은 1851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에 가까운 강력한 권한을 손에 넣었으며, 이듬해 국민투표를 통해 '프랑스 제2제국'을 선언하고 '나폴레옹 3세'를 자칭하며 황제에 즉위했다. 나폴레옹 3세는 과거 프랑스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외의 문제에 개입하여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의 향상에 노력했다.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크림 전쟁'에 개입해 러시아를 좌절시키고, 그 강화회의를 파리에서 개최하여 '파리 조약'을 체결하였다. 계속해서 프랑스는 '애로호 전쟁'(제2차 아편전쟁)에 참전하거나 인도차이나에 출병하는 등 식민지 획득에 노력하였으며, 이웃나라인 이탈리아의 통일 전쟁에도 개입하는 등 정권초기에는 비교적 순조로운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멕시코 원정에 실패한 후에는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숙적 프로이센과의 싸움인 '보불전쟁'에서 패배하는 등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스당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포로가 되어 그대로 퇴위하게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파리 개조 사업'이나 철도 정비, 은행 사업 등을 하며 공업과 농업 발전을 촉진시켰으나, 보불전쟁에서 패배하여 알자스-로렌 지방을 잃고 제국은 폐지되며 '프랑스 제3공화국'이 성립되었다.

프랑스 제3공화국과 파리 코뮌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퇴진 후, 프랑스는 '아돌프 티에르'를 대통령으로 하는 공화제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이때 파리에서는 사상 최초의 파리시민이 세운 사회주의 자치정부인 '파리 코뮌'이 수립되지만 정부군에 의해 진압된다. 비록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존속되었지만 이들의 활동은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면 프랑스 제5차 혁명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1875년에는 '제3공화국 헌법'이 제정되어 양원제 의회를 확립했고, 1881년에는 '튀니지'를 보호국화 하였으며, 1887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가 성립, 1892년에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의 '삼국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 '러불동맹'이 결성하게 된다. 한편 국내에서는 '블랑제 사건'이나 '드레퓌스 사건' 등 사회적 갈등이 극단적으로 치닫는 사건이 잇따르고, 혼미한 상황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시기에는 영국의 식민지 정책과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이 부딪히게 되는데, 특히 아프리카에서 영국은 이집트에서 남쪽으로 아프리카를 종단하는 정책을 취하고, 프랑스는 서아프리카에서 대륙을 횡단하는 정책을 취하여, 1898년 수단에 있는 파쇼다 마을에서 충돌하여 '파쇼다 사건'이 일어나지만 프랑스의 양보로 손쉽게 해결되었다. 이를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는 급속하게 가까워져서 1904년에는 '영불 협상'이 맺어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과의 사이는 계속 악화되어, 1905년 프랑스가 모로코를 차지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독일의 '빌헬름 2세'가 모로코의 '탕헤르'를 방문하고 자신의 요트에서 모로코의 독립과 주권국가임을 선포하는데 이를 '제1차 모로코 위기'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스페인에서 '알헤시라스 회의'가 열렸고, 프랑스의 모로코에 대한 권리가 인정되면서 독일의 모로코 진출은 실패로 돌아가며,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 중 하나가 된다. 당연히 모로코 측의 반발이 강하여, 모로코 지역 주민들에 의해 일어난 반란에 프랑스군이 개입하자, 1911년 독일이 모로코의 '아가디르 항'에 군대를 파견하면서 다시 갈등이 생겨 '제2차 모로코 위기'(아가디르 위기)가 발생한다. 그 해결을 위해 국제협상이 계속되어 모로코는 프랑스령으로 인정되고, 대신 독일은 프랑스령 콩고의 일부를 할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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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1914년 8월에 독일 제국이 프랑스에게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전쟁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3국 협상'과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3국 동맹의 구도로 그들의 영토와 식민지까지 합하여 거의 전 세계를 말려들게 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기본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비스마르크 이후 식민지 획득에 의욕적인 독일과 그것을 방해하려고 하는 프랑스가 각각 대립하고, 또 발칸 반도에서는 러시아의 '슬라브 주의'와 독일의 '게르만 주의'가 대립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단초가 되었다. 독일은 동부 전선에서는 러시아와, 서부전선에서는 프랑스와 각각 대치하였다. 1914년 독일과 러시아가 맞붙은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은 한때 위기에 빠지지만, 이윽고 러시아에 대승리하게 된다. 같은 시기 프랑스와는 '마른강'에서 전투 치렀다. 독일군은 파리 동쪽을 흐르는 마른강까지 진격하였으나 그때까지 후퇴를 계속하던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공세로 돌아서고, 동부전선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지원군을 차출해서 보내면서 전선에 공백이 생겨, 결국 마른강에서 철수하게 되면서 전선은 교착되고 전투의 양상은 지루한 '참호전'으로 옮겨가게 된다. 1915년 4월 이탈리아가 삼국동맹을 이탈하고 삼국협상과 '런던 조약'을 체결하면서 연합국으로 돌아서고, 1917년 3월 러시아에서 '3월 혁명' 일어나면서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면서 부르주아와 사회주의자들의 연합 정권인 '케렌스키 임시정부' 탄생하였다. 1916년에는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 등에서 일진일퇴하였고, 이후 1918년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면서 연합국은 반격하기 시작하여, '제2차 마른강 전투'에서 연합국과 미군에게 독일군이 패배하면서 전세가 기울기 시작한다. 같은 해 말 '킬 군항의 반란'을 시작으로 '독일 11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독일 황제인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독일은 군주제를 포기하고 공화정으로 전환하였다.

베르사유 조약과 워싱턴 체제

1919년 연합국은 전쟁에서 패배한 동맹국의 처우를 결정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파리 강화회담'을 열게 된다. 회담에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등 동맹국을 제외한 32개국에서 참가하였다. 독일과 연합국은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로서 독일은 국외의 모든 식민지를 포기하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랑스에 넘겨주며, 폴란드 지역을 독립시키는 등 많은 영토를 잃었고, 군비 제한 및 막대한 배상금으로 인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의 불씨를 남기게 된다. 각각의 나라에는 서로 다른 조약이 맺어져, 오스트리아는 '생제르맹 조약'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분열되어,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로 나뉘게 되었다. 불가리아는 '뇌이 조약'으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을 맺었고, 오스만 제국은 '세부르 조약'으로 튀르키예 이외의 지역의 영토를 모두 상실하면서 현대의 튀르키예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존의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영국과 프랑스가 나누어 가져서, 영국 위임통치령인 '팔레스타인'과 프랑스 위임통치령인 '시리아' 및 '레바논'이 설치되었다. 1921년에는 미국 대통령 '워렌 하딩'의 주재로 '워싱턴 회담'이 열려, 군축 및 국제 질서를 조율을 위한 회의를 진행했다. 태평양 방면의 섬인 속지와 섬인 영지에 관한 4개국 조약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이 태평양 지역에서 현상을 유지하고 외부의 위협에 서로 협력하는 애용의 조약. 주요 강대국인 5개국의 해군 군축을 위한 해군 군비제한 조약, 태평양 지역의 현상 유지와 외부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4개국 조약, 중국의 영토 보전과 문호 개방 등을 정한 9개국 조약이다. 프랑스는 전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에 엄격하게 대해 , 1923년에는 전쟁 배상금 지불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벨기에와 함께 독일의 루르 지역('루르 점령')을 군사적으로 점령한다. 1924년 미국의 재무장관이었던 '찰스 도스'는 '도스 플랜'을 제시하였는데, 독일은 극심한 인플레이션 현상에 의한 경제난으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상금 조건을 완화하는 내용의 중재안을 제시한다. 이로 인해 독일은 제국 은행이 다시 설립되고, 미국이 차관을 제공하는 등 해결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1925년에는 '로카르노 조약'을 맺어 독일과 벨기에 및 프랑스와의 국경안정보장과 라인란트의 영구 비무장화를 규정하는 등  국지적 안전보장을 요구하였다. 1928년에는 미국과 프랑스의 주도로 '켈로그-브리앙 조약'이 맺어지는데, 전쟁을 위법화 하고 전쟁포기에 관한 내용을 최초로 실체화하였다. 1929년에 '영 플랜'이 발표되어 도스 플랜 이후에 다시 한번 독일의 전쟁배상금을 조정하여 대폭 감액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독일의 경제도 계속 혼란스러워졌다.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 대통령 '힌덴부르크'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면서 나치 독일이 탄생하게 된다. 곧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은 '전권 위임법'을 통과시켜 권력을 확고히 한 후에 반대하는 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고, 1934년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국민투표를 통해 독일의 총통으로 취임하면서 독일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 히틀러는 '독일 재군비 선언'을 1935년에 하여 베르사유 조약을 폐지하고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시작한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는 등 영토확장 야욕을 보였지만, 새로운 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1938년 '뮌헨 협정'을 통해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주며 눈앞에 문제를 못 본 척하게 된다. 결국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제2차 세계대전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독일과 슬로바키아,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1940년에는 중립국인 덴마크와 노르웨이에  침략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1940년 5월 10일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침공했다. 나치 독일은 항복한 프랑스에 '필리프 페탱'을 총리로 하는 괴뢰 정권 '비시 프랑스'를 세우지만, '샤를 드골'은 영국으로 건너가 망명 정부인 '자유 프랑스'를 결성하였다. 이로서 사실상 프랑스 제3공화국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그 후 4년간 프랑스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운영되게 되었다가, 1944년에 미국의 '아이젠하워'를 사령관으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기점으로 파리가 탈환되면서 비시 정부가 붕괴되었다. 다음 해인 1945년 5월에 독일이 항복, 8월에는 일본이 항복하는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하게 된다.

프랑스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6년에 '프랑스 제4공화국 헌법'이 성립되어, 1947년에는 정식으로 '프랑스 제4공화국'이 탄생한다. 1946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독립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프랑스는 1954년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의 패배하면서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된다. 1954년 일어난 '알제리 전쟁'(알제리 혁명)에서는 프랑스 내부에서도 현상유지파와 독립파로 나뉘어, 군사적으로는 승리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알제리의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1956년에는 영국과 이스라엘과 함께 '제2차 중동전쟁'(시나이 전쟁)을 일으켜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점거하여 운하에 대한 영향력을 되찾아 오려하였지만 국제 여론의 압력을 받아 포기하게 된다. 이후 1958년 알제리 주둔군은 쿠데타를 감행, 나폴레옹의 고향인 코르시카 섬을 점거하였고,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쿠데타 세력의 조건을 수용하여 샤를 드골을 임시 총리로 임명하였다. 드골은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이원집정부제'를 실시하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1959년 '프랑스 제5공화국'이 탄생하여 지금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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