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서로마 제국 첫번째 황제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
- 역사
- 2023. 5. 5.
고대 로마 제국 52대 황제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는 384년 로마 제국의 황제인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들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테오도시우스 1세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황제로 임명되었고 394년에는 단독 황제로 로마 전체를 통치 영역으로 두었지만, 호노리우스는 희대의 암군으로 불리울 정도로 능력이 모자란 것으로 유명하다. 395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면서, 로마 제국의 영토를 동과 서로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형인 '플라비우스 아르카디우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동방을 관리하였고, 동생인 호노리우스는 '메디오라눔'(현재의 밀라노)에서 서방을 맡아 통치하였다. 이시기의 로마시는 로마 제국의 명목상 수도에 불과하게 된지 오래되었고, 실질적인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이었으며, 그때그때 통치하는 황제에 따라 거점으로 삼는 도시가 사실상 수도의 역할을 하였다. 황제 즉위 당시 호노리우스는 나이가 11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1세 때부터 신임받던 '플라비우스 스틸리코'가 후견인이 되어 통치를 도왔다.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조카이자 양녀인 '세레나'와 결혼하였기 때문에 황실 가족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지휘관으로 로마 군단 총사령관이기도 했다. 호노리우스는 나이가 어렸을 뿐만 아니라 정무에 관심이 없고 무능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제국의 관리는 스틸리코가 도맡아 시행하였다. 이는 동방을 관리하는 아르카디우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로인해 제국의 동방도 관료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
고대 서로마 제국 첫번째 황제
본래부터 로마 제국의 전통적인 적은 북쪽의 '게르만족'과 동쪽의 '페르시아'였다. 그중에서도 게르만족이 일으키는 문제가 크게 확대되었는데, 375년부터 '게르만족 대이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고트족'의 경우는 '훈족'의 압박에 밀려나서 이미 테오도시우스 1세 때부터 서고트족은 로마 제국 영내인 '트라키아' 지역에 이주하고 있었고, 그 대가로 많은 이민족의 병사들로 구성된 군대를 로마 군단에 제공하고 있었다. 로마 군단에 이민족 출신자들이 포함된 것은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기는 하나, 이전의 게르마니아 지역에 로마화된 게르만인들이 로마 군단의 병사로서 군복무를 한 것과는 다르게, 이주한 이민족들이 로마와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전쟁에 참전하는 보조군의 형식과 비슷하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이미 이민족 용병을 모집하여 전쟁을 하는 것도 상시화 되어있었다. 어찌되었든 강력한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들이 제국을 이어받자, 테오도시우스 1세 아래에서 복종하고 있던 서고트족의 족장 '알라리크'는 본색을 들어내어, 서고트족 군대를 이끌고 트라키아 일대와 그리스 지역을 침공하며 약탈을 하였다. 이에 서방 지역에 있었지만 로마 군단 총사령관으로 동방과 서방의 군단을 지휘아래 두었던 스틸리코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단을 이끌고 동방 지역으로 넘어가 알라리크를 저지하였는데, 동방에서는 오히려 스틸리코를 위협으로 느끼고, 그의 동방 소속의 군단에 대한 지휘권을 박탈하였으며, 서방 소속의 군단과 함께 즉시 서방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완전한 진압을 포기하고 서방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는데, 이때부터 로마 제국은 동방과 서방으로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396년에 알라리크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 지역으로 침공하였고, 유명한 그리스 도시인 '아테네', '코린트' 등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397년 스틸리코는 서방의 로마 군단을 이끌고 재빠르게 그리스에 상륙하여 알라리크를 격퇴하였으나, 알라리크가 포위망을 빠져나감으로 완전한 토벌에는 실패하였다. 탈출에 성공한 알라리크는 아예 아르카디우스와 협상하여 로마 제국의 동방과 서방에 걸쳐있는 '일리리쿰' 지역의 로마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인해 동방은 알라리크의 위협에서 일단 벗어날 수 있게 되었지만, 서방은 공식적으로 로마 제국 동방 소속의 알라리크가 서방을 침략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사실상 로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완전히 분열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동로마와 서로마는 공식적으로 내전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서로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비정규적인 방식으로 서로의 이익을 탐했으며, 동시에 서로 간섭 당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였다.
로마 역사상 최악의 암군
스틸리코는 서로마 제국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397년에 북아프리카 속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401년에 '라이티아' 지역에 침입한 이민족을 격퇴하였으며, 403년 스틸리코가 없는 틈을 노리고 이탈리아로 쳐들어온 알라리크도 스틸리코가 돌아와서 격퇴하였다. 이때 알라리크는 궁지에 몰렸지만 스틸리코는 평화협상을 진행하고 알라리크를 살려보내주었다. 405년에 스틸리코는 '라다가이수스'가 이끄는 동고트족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는데, 이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갈리아와 북이탈리아 일부 지역을 포기한 것 때문에,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많은 로마 시민들과 정적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407년에는 '브리타니아' 지역에서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콘스탄티누스'가 '콘스탄티누스 3세'를 자칭하면서 반란을 일으켰고, 곧 브리타니아 지역의 모든 로마 군단을 이끌고 비어있는 '갈리아'로 건너와 장악하였으며, '히스파니아' 지역에까지 쳐들어갔다. 이때 서로마 제국은 브리타니아에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이후에도 되찾지 못했다. 이 와중에 호노리우스는 408년 사실상 혼자서 서로마를 지탱하고 있던 스틸리코를 의심하여 처형해버렸다. 또 이어서 이민족으로 구성된 군단 병사들을 학살했기 때문에, 서로마를 지키고 있던 상당수의 병력이 탈출하여 알라리크에게 투항해버렸다. 그러자 반란에 대항하게는게 불가능해진 호노리우스에게 콘스탄티누스 3세는 자신을 공식 황제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결국 호노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 3세를 공식 황제로 인정해주는 대신 평화를 얻었다. 이때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의 세력을 흡수하여 재기하였는데, 그는 스틸리코의 복수를 내세워 다시 이탈리아로 침공하여 로마시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알라리크는 로마시에서 거액의 배상금만 받고 물러났는데, 이 때문에 알라리크의 목적이 영토나 약탈이 아니라 무력시위를 통해 서로마 제국에서의 자신의 입지와 영향력을 높이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알라리크는 호노리우스에게 다뉴브 강 이남에서 베네치아 해안에 이르는 영토에 대한 서고트족의 영향력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호노리우스는 이 요청을 거부하였다. 사실 호노리우스는 이전에 알라리크가 침입하였을때 이미 수도를 천연 요새인 라벤나로 옮기고,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가 포위되어도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이에 409년 알라리크는 다시 로마로 향하여 이번엔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황제로 세워서 호노리우스를 압박하였다. 하지만 호노리우스는 아무런 호응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협상하러 온 알라리크를 급습하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 410년 결국 화가난 알라리크는 로마 약탈을 감행하였는데, 약탈은 3일간이나 이어졌으며, 많은 역대 황제들의 영묘가 도굴되었고, 궁전과 교회들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많은 로마 시민들이 포로로 끌려갔는데, 이 중에는 호노리우스의 여동생인 '갈라 플라키디아'도 있었다고 한다. 호노리우스는 사실상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 지역을 잃은 데다가, 이번 사건으로 이탈리아 지역에서도 민심을 잃자, 이번에는 콘스탄티누스 3세가 이탈리아로 진군하였으나, '콘스탄티우스 3세'가 이끄는 로마 군단에게 격퇴되었다. 411년 콘스탄티누스 3세는 부하들에게 배신당하여 아를에서 포위당하였는데, 서로마 군단 총사령관이 된 콘스탄티우스 3세가 이 기회에 갈리아를 되찾기로 하여 아를로 진군하였고, 배신한 콘스탄티누스 3세의 부하를 격파하고 콘스탄티누스 3세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413년에 북아프리카 속주의 총독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반란도 콘스탄티우스 3세가 진압하였다. 417년에는 서고트족과 평화협상을 체결하여 갈라 플라키디아가 로마로 귀환하였고, 이에 호노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 3세와 결혼시켰다. 418년에는 서고트족의 히스파니아 지역에의 이주를 허가하고 대신 로마를 위협하는 이민족을 상대하게 하였다. 421년에는 아예 콘스탄티우스 3세를 공동황제로 임명하고 서로마 제국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후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준비하던 콘스탄티우스 3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아내이자 자신의 여동생인 갈라 플라키디아와 자식들을 해치려고 하였기 때문에, 그녀들은 동로마로 도망쳤다고 한다.
호노리우스의 업적과 최후
호노리우스는 서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동안 사실상 제대로 한 것은 없었다. 그가 공식적으로 한 것이라곤 기독교를 제외한 이교를 핍박한 것 뿐이다. 또 취미로 닭을 키웠는데, 그 중 한마리에게 '로마'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고 한다. 알라리크가 로마를 약탈했을때, 전령이와서 로마가 파괴되었다고 하자, 자신의 닭이 죽었다며 슬퍼하였다고 한다. 전령이 다시 닭이 아니라 로마 도시가 약탈 당했다고 전하자, 자신의 닭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안심하였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423년 호노리우스는 병사하였는데, 자식도 없었고 후계자를 지명하지도 않았었다. 이 때문에 동로마로 피신해 있었던 콘스탄티우스 3세와 갈라 플라키디아의 아들인 '플라비우스 플라키디우스 발렌티니아누스'가 동로마의 도움을 받아 귀국하여 서로마의 황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