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서로마 제국 두번째 황제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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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화

스틸리코의 빈자리를 체운 서로마의 장군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콘스탄티우스 3세)의 젊은 시절에 대한 내용은 거의 알려진바 없다. 콘스탄티우스 3세는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테오도시우스 1세) 집권시절에 로마 군단에 입대한 것으로 보이는데, 테오도시우스 1세 사망 후 로마 제국이 동방과 서방으로 나뉘면서 서로마의 군단에 소속된 것 같다. 그는 서로마 황제인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 휘하에서 군단 지휘관으로 활동한 것 같은데, '플라비우스 스틸리코'가 호노리우스의 후견인으로 서로마를 운영하는 동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내용이 없다. 그러나 스틸리코 사후 410년에 서고트족의 왕인 '알라리크'에 의해 로마시가 약탈된 직후에 호노리우스의 측근으로 두각을 나타내는데, '갈리아' 지역을 차지한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콘스탄티누스'(콘스탄티누스 3세)와 내통한다는 혐의로 일부 관료를 처단하는 등 위세를 들어냈다고 한다. 411년에는 서로마 군단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스틸리코를 숙청하는데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호노리우스의 측근이었던 '올림피우스'를 체포해 처형하였다. 이후 갈리아 지역에서 콘스탄티누스 3세의 세력간에 내분이 일어나자,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로 쳐들어가 콘스탄티누스 3세를 체포하고 처형하였다. 413년에 북아프리카 속주의 총독인 '헤라클리아누스' 반란을 일으켰다. 헤라클리아누스는 호노리우스의 측근으로 서로마의 곳간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 속주를 맡을 정도로 주요한 인물이었는데, 이 때문에 그가 갑자기 반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여러 의문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헤라클리아누스는 올림피우스와 친했고, 또 스틸리코의 처형을 직접 집행했기 때문에, 스틸리코와 가까운 서로마 군단 출신의 콘스탄티우스 3세가 득세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반란을 일으켰다고도 한다. 헤라클리아누스는 3,700여척에 달하는 식량수송선에 병사들을 태워 위장하고, 로마까지 와서 상륙하였다. 이후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서 라벤나로 진군하였는데, 콘스탄티우스 3세가 파견한 진압군에게 대패하였고, 헤라클리아누스 본인은 카르타고로 도망치다가 암살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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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 제국의 2인자

서로마에는 로마시를 약탈한 서고트족이 남아있었는데, '알라리크'는 이미 병사하고, '아타울프'가 뒤를 이어 족장이 되어 그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412년 이들은 식량이 부족해지자 호노리우스와 협상하여, 식량을 받는 대신 이탈리아를 떠나기로 하였다. 아타울프는 서고트족을 이끌고 갈리아로 이동하였는데, 갈리아에는 콘스탄티누스 3세가 사망한 이후 그 잔당들이 모여서 '요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있었다. 아타울프는 처음에는 요비누스와 협상하여 갈리아에 서고트족이 정착할 수 있는 땅을 받으려고 했지만, 413년 협상이 결렬되자 아타울프는 콘스탄티우스 3세와 연합하여 요비누스를 공격하였고, 요비누스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런 아슬아슬한 서로마와 서고트족의 협력관계는 헤라클리아누스의 반란으로 위태로워졌는데, 북아프리카에서 지원되던 곡물이 끊기면서, 서로마는 더 이상 서고트족에게 곡물을 지원할 수 없게되었다. 이에 아타울프는 전에 알라리크가 호노리우스를 압박하기 위해 한번 황제로 추대했었던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다시 황제로 추대하고 지중해 연안의 도시를 점령하였다. 콘스탄티우스 3세는 이러한 서고트족의 움직임에 항구를 봉쇄하며 맞섰고, 서고트족은 다시 바르셀로나로 이동하였는데, 계속해서 항구를 봉쇄하여 교역을 못하도록 막았다. 415년 결국 기근에 시달리던 서고트족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아타울프는 암살당하였고, 최종적으로 왈리아가 서고트족의 왕이 되었다. 서고트족은 서로마와 평화 협정을 맺어, 서고트족이 히스파니아 지역에 거주하는 것을 허용하고 식량을 공급하는 대신, 서로마를 위협하는 이민족과의 싸움을 맡기로 하였다. 또 로마가 서고트족에게 약탈 당하였을때, 호노리우스의 여동생인 '갈라 플라키디아'가 포로로 잡혀갔었는데, 이 협상을 하면서 그녀를 해방해 주었다. 서로마로 돌아온 갈라 플라키디아는 417년 호노리우스의 주선으로 콘스탄티우스 3세와 결혼하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콘스탄티우스 3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421년에 호노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 3세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여 서로마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콘스탄티우스 3세는 명실공히 서로마의 2인자가 되었지만, 이전처럼 자유롭게 쇼나 경기를 관람하는 등의 행동을 할 수 없게 됬다고 불만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3세는 황제가 된지 7개월만에 갑작스럽게 병으로 사망하였다. 아내인 갈라 플라키디아와 자식들은 한때 호노리우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껴 동로마로 피신하기도 하였지만, 후에 다시 돌아와 아들인 '플라비우스 플라키디우스 발렌티니아누스'가 서로마의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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