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의 마지막 명장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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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

반달족 출신의 로마 군단 총사령관

'플라비우스 스틸리코'는 359년 게르만족의 하나인 '반달족' 출신의 로마 군인과 로마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있다. 스틸리코가 같은 시기의 로마인들에게 반야만족으로 멸시당했음에도 로마의 편에서 게르만족들과 싸운 것을 보면 로마인으로서 확고한 정체정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이며, 스틸리코의 아버지도 친로마 성향으로 반달족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스틸리코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바가 없으며, 아버지처럼 로마 군단에 입대하여 군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384년에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 왕국'의 분할에 관한 평화 교섭의 사절로 파견되었다고 한다. 이때 스틸리코는 불과 24세의 나이였는데, 이 교섭에서 상당한 성과를 낸 것 같다. 테오도시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한 후에 스틸리코를 호위대장으로 삼았으며, 자신의 조카딸인 '세레나'를 양녀로 삼아 그와 결혼시켰다고 한다. 이후로도 계속 군사적 임무를 맡아서 한 것으로 보이는데 390년에는 '바스타르네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로마 군단의 고위 사령관 중에 한명으로 임명되었다. 392년에 제국 서방을 관리하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사망하고, 사실상 섭정이자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암살범으로 의심되는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가 '에우게니우스'를 황제로 추대하며, 테오도시우스에 대해 반기를 들자 이를 진압하는데도 참여하였다. 394년에 출정한 아르보가스트를 토벌하는 군단에는 '서고트족'의 족장인 '알라리크'도 참여하고 있었다고 한다. 반란 진압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 공을 기려 스틸리코는 로마 군단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395년에 테오도시우스가 사망하면서 후계자 문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서로마 제국 황제의 후견인

로마 제국은 기존에도 필요에 따라 2명에서 4명까지의 황제가 제국의 영토를 나누어 서로 관리구역을 정하고 통치하기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하나의 나라라는 개념은 계속해서 유지되었지만,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사망 이후 동방을 '플라비우스 아르카디우스', 서방을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가 관리하면서 점차 대립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완전히 분리되어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당시 아르카디우스는 19세, 호노리우스는 11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의 유언에 따라 호노리우스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러나 아르카디우스나 호노리우스 둘다 정무에 관심이 없고 무능하였기 때문에, 스틸리코는 실질적인 섭정으로서 서로마 제국을 관리해야 했다. 동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가 신임하던 갈리아 출신의 재상인 '루피누스'가 아르카디우스의 통치를 도왔다.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던 스틸리코였지만 제국을 운영하는 것은 쉽지 않았는데 사방이 적 투성이였다. 먼저 로마 제국의 전통적인 적인 게르만족과 페르시아가 있었다. 서로마 제국은 페르시아와 멀리 떨어져있기는 했지만, 대신 페르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로마 군단이 자리를 비운 다뉴브 강 지역을 통해서 로마로 쳐들어오는 게르만족을 상대해야 했다. 당시에는 이미 훈족의 압박으로 인해 '게르만족 대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계속되는 게르만족의 침입에 대응해야 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의 루피누스와 관료들이 스틸리코에 대해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협조적인 동로마 제국 또한 스틸리코의 적 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스틸리코가 사실상 전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시기한 많은 서로마 제국의 원로원이나 '올림피우스'로 대표되는 호노리우스의 측근들의 정치적 견제를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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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분서주한 무패의 장군

아르보가스트의 반란을 진압한 로마 군단은 스틸리코의 지휘아래 있었기 때문에 서로마의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정식으로 서고트족의 왕으로 취임한 알라리크는 이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켜 서고트족을 이끌고 비어있는 '트라키아' 지역으로 침공하였고, 이에 위기를 느낀 아르카디우스가 스틸리코에세 동로마 소속의 군단을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스틸리코는 휘하의 군단을 이끌고 알라리크를 저지하였는데, 군단을 이끌고 동로마 지역까지 넘어온 스틸리코에게 위협을 느낀 루피누스로 대표되는 동로마측의 방해로 알라리크를 놓치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스틸리코는 동로마에서의 지휘권을 박탈당하였기 때문에, 동로마 소속의 군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시켰는데, 이때 불만을 가진 동로마 군단의 병사들에 의해 루피누스가 살해당하였다. 이 사건이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스틸리코가 배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원로원에서는 스틸리코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였으며 동로마에 있는 그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였다고 한다. 스틸리코가 물러가자 알라리크는 다시 그리스 일대를 침략하여 여러 도시들을 괴롭혔는데, 397년에 스틸리코가 다시 서로마 군단을 이끌고 그리스로 넘어왔고 재빠르게 진격하여 알라리크의 군대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알라리크는 포위망을 빠져나왔고, 동로마 제국과 협상하여 아르카디우스에 의해 정식으로 '일리리쿰' 지역의 동로마 군단 사령관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토벌을 포기하고 서로마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또 알라리크가 동로마와 서로마 사이에 걸쳐있는 일리리쿰 지역의 사령관이 되면서, 명목상 동로마 군단을 이용하여 서로마를 침공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동로마와 서로마는 되돌아 올 수 없는 분열의 강을 건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엎친데 덮친격이라고 이 해에 북아프리카 속주의 총독 '길도'가 반란을 일으켜 서로마를 이탈하고 동로마에 가담하게 된다. 동로마와 서로마가 분열해 있는 상태에서 북아프리카 속주는 로마시에 식량을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에 급히 병력을 모아 길도의 동생인 '마스케젤'에게 지휘를 맡겼다. 그런데 스틸리코는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절차를 중요시 했는데, 그는 먼저 원로원을 통해서 길도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원정의 허가를 얻었다. 이러한 스틸리코의 행동은 원칙을 중시하고, 원로원을 존중한 그의 강직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이 점은 동시에 그의 약점이 되었는데, 사실상 로마 제국 말기에 실권없는 원로원을 챙기느라 여러 정치적 방해를 받았고, 원칙을 중요시하여 사실상 로마의 적인 알라리크를 도와주는 동로마 제국의 폐단을 눈감아 주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멸망을 막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북아프리카의 반란은 조기에 진압할 수 있었지만, 스틸리코의 앞에는 아직도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401년 알라리크는 동고트족의 '라다가이수스'와 동맹을 맺고, 반달족과 '알란족' 등과 함께 '라이티아' 지역으로 침공하게 하였다. 스틸리코는 이를 방어하기 위해 군단을 이끌고 라이티아의 국경 지대로 향했는데, 이 틈을 노리고 알라리크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지역으로 쳐들어왔다. 당시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메디오라눔'(현재의 밀라노)까지 위협에 처하자 스틸리코는 급히 서로마 전역에 흩어져 있던 군단을 모았다. 호노리우스는 메디오라눔을 빠져나와서 갈리아 지역으로 도주하였는데, 도중에 알라리크의 기병대에게 따라잡히자, 인근 마을인 '아스타'의 요새에 숨었다고 한다. 이에 스틸리코는 선봉대를 이끌고 알라리크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요새에 진입하였고, 후발대가 알라리크의 군대를 포위할 준비를 하였다. 402년에 벌어진 '폴렌티아 전투'에서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군대를 격파하였는데, 이때 알라리크의 아내를 포로로 잡을 정도로 크게 승리하였다고 한다. 이어진 403년의 '베로나 전투'에서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군대를 포위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알라리크와 평화협상을 하기로 하였다. 이 때문에 서로마에서는 스틸리코가 알라리크와 내통하고 있으며, 일부로 그를 살려보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스틸리코는 일부로 알라리크를 살려준 것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명목상이긴 하나 알라리크가 동로마 제국의 신하이기 때문에 동로마와 서로마 간의 내전을 우려하여 살려주었다는 말도 있고, 어찌되었든 알라리크가 일리리쿰 지역의 강자로서 해당 지역을 제압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의 사망 후 다른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동로마 제국이 위태롭게 되는 것을 우려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405년에는 라다가이수스가 게르마니아에서 동고트족과 '수에비족', 반달족, '부르군트족' 등을 이끌고 서로마로 진군하였는데, 그 규모가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남자가 약 20만명에,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비전투인원까지 합하면 4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이미 로마 시민권이 확대로 인해 로마 군단의 병사로 복무하는 것에 대한 메리트가 상당히 저하되어있었기 때문에, 이미 이전부터 군단에 필요한 병사들의 상당부분을 이민족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또한 군단 병사들의 주축이되었던 자영농이 몰락한지 이미 오래되었고, 대부분 농노가 되었기 때문에 군단 병사들의 질은 저하되고, 그 병사들을 모으는 것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이에 스틸리코가 간신히 모은 로마 군단 병사의 숫자는 3만정도에 불과했고, 이민족의 보조군으로 나머지를 충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로 라다가이수스의 대군을 전선에서 상대하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스틸리코는 이탈리아와 로마시를 중심으로 방어하는 전략을 세웠다. 스틸리코는 병력을 모으면서 라다가이수스가 이탈리아로 들어올때까지 기다렸고, 라다가이수스가 피렌체를 포위하자, 군단을 이끌고 라다가이수스의 병력을 다시 포위하였다. 보급이 끊긴 라다가이수스의 군대는 완전히 와해되었고, 라다가이수스는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 처형되었다. 전투 후에 일부 이민족들은 로마 군단에 투항하여 로마 병사가 되기로 자원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노예로 팔렸다고 한다. 스틸리코는 동고트족을 물리치고 로마를 위기에서 구했지만, 라다가이수스가 피렌체까지 오는 동안 내버려둔 것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스틸리코의 최후

서로마 제국은 당장의 위험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게르만족의 위협이 이것으로 영원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때 알라리크가 이탈리아 국경지대에 진을 치고 무력시위를 하면서, 서로마 영내에 고트족이 이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원로원은 이러한 요구에 반대하였는데, 스틸리코가 이들을 설득시켜서 간신히 승인을 얻어냈다고 한다. 이미 사실상 서로마 제국의 역량만으로 이민족의 침입을 완전히 배제하는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스틸리코는 고트족의 협력을 얻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스틸리코의 태도는 이민족의 편을 든다며 로마 시민들에게 비난당했다. 뿐만 아니라 성장한 호노리우스 또한 스틸리코와 거리를 두면서, 그를 비난하는 자들과 함께 하였다. 이때 동로마에서는 아르카디우스가 사망하고, 아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가 승계하였는데, 호노리우스는 동로마 제국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스틸리코는 호노리우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408년 스틸리코는 호노리우스가 '티키눔'(현재의 파비아)에 있는 로마 군단을 시찰하겠다고 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는데, 당시 파비아에는 스틸리코에 적대적인 군단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군단의 병사들은 이미 올리피우스에게 매수되어있었는데, 황제가 시찰하는 동안 함께 방문한 스틸리코의 측근들을 암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스틸리코를 지지하던 군단 지휘관들이 이에 대한 복수를 하고, 나아가서 스틸리코를 황제로 추대하려고까지 하였으나, 스틸리코는 이를 거부하고 호노리우스가 있던 라벤나에 자진 출두하여 처형당하였다. 이후 스틸리코의 아들도 곧바로 처형당했으며, 스틸리코의 측근들도 숙청되었다. 또 스틸리코의 지휘하에 있던 이민족 용병들도 서로마 군단의 손에 학살당하여서, 대다수는 도망쳐 알라리크에게 가담하였다고 한다. 결국 서로마 제국을 지탱할 수 있는 구심점이 사라지면서,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의 복수를 구실로 이탈리아 침공을 단행하였고, 410년에 로마시는 역사상 두번째로 약탈을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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