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서로마 제국 세번째 황제 「플라비우스 플라키디우스 발렌티니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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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세의 나이에 취임한 황제

'플라비우스 플라키디우스 발렌티니아누스'(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419년 서로마 제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로마 군단 총사령관인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콘스탄티우스 3세)이고, 어머니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의 여동생인 '갈라 플라키디아'였다. 421년에 호노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 3세를 공동황제로 임명하여 서로마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때 동로마 제국의 황제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우스 3세의 황제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콘스탄티우스 3세는 동로마로의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콘스탄티우스 3세가 급사하였고, 호노리우스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낀 갈라 플라키디아는 423년에 자녀들을 데리고 동로마로 도망쳐 의탁했다고 한다. 이 해에 호노리우스도 병사하였기 때문에 서로마에서 황제가 공석이 되었다. 그러자 서로마에서는 '요안네스'라는 관리를 황제로 세우려고 하였고, 이에 동로마의 테오도시우스 2세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카이사르'로 선포하고 서로마 황제로 앉히려고 하면서, 동로마와 서로마가 한차례 충돌하게 되었다. 424년 요안네스는 동로마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라벤나에 농성하면서, '훈족'과 친분이 있는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를 보내 지원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425년 동로마 군단은 아에티우스가 돌아오기 전에 라벤나를 함락시켰으며, 요안네스는 황제로 즉위한지 18개월만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후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정식으로 서로마의 황제가 되었는데, 이때 겨우 6세의 나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모친인 갈라 플라키디아가 섭정으로서 통치하였다.

제2의 스틸리코

한편 아에티우스는 훈족의 용병들을 모아 뒤늦게 라벤나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아에티우스는 동로마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기에는 부담스러웠고, 반대로 갈라 플라키디아는 아에티우스를 물리칠 능력이 없었다. 결국 둘은 타협하기로 하였는데, 아에티우스는 갈리아 지역의 서로마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갈라 플라키디아는 당면한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에티우스는 갈리아 지역을 관리하면서 명성을 쌓았는데, 426년부터 432년에 걸쳐 '서고트족', '프랑크족', '유툰기족' 등을 물리쳤다. 이는 아에티우스 자신을 위한 일이었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서로마의 평화를 유지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동안 북아프리카 속주는 '보니파키우스'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아에티우스와 보니파키우스는 서로마의 실권자로서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아에티우스는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모략을 꾸몄고, 이 때문에 갈라 플라키디아가 보니파키우스를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보니파키우스는 이러한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히스파니아' 지역에 있던 '반달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이를 기회로 반달족은 북아프리카 속주로 침공하였다. 결과적으로 갈라 플라키디아와 보니파키우스 사이의 갈등은 아에티우스의 음모가 들어나면서 해결되었지만, 보니파키우스는 반달족을 저지하지 못하였고, 서로마는 북아프리카 속주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갈라 플라키디아는 아에티우스를 처벌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로 도망쳐 온 보니파키우스를 서로마 군단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것으로 들어내놓고 견제하는 것으로 그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에티우스는 이를 보고만 있지 않았는데, 오히려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남하하였다. 432년 라벤나 근처의 '리미니'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보니파키우스는 아에티우스를 격파했지만, 이때 입은 부상으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두 사람은 이때 1:1 결투를 벌였는데, 보니파키우스는 옆구리를 찔렸지만, 아에티우스를 낙마시켜서 승리하였다고 한다. 패배한 아에티우스는 갈리아로 물러났지만, 보니파키우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하하여 라벤나로 향했다. 결국 아에티우스는 보니파키우스의 직위였던 서로마 군단 총사령관의 직위를 강탈하였으며, 미망인이 된 보니파키우스의 아내와도 결혼하였다고 한다. 이렇게하여 서로마의 실권은 완전히 아에티우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에도 아에티우스는 여러 이민족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는데, 의도가 어찌되었든 그의 활약으로 서로마가 평화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플라비우스 스틸리코'와 더불어 서로마 제국을 지탱한 로마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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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의 아틸라

443년 훈족의 왕이 된 '아틸라'는 동로마를 괴롭히면서 영토와 재물을 요구하고 있었다. 한편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나였던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는 문란한 생활을 하다가 임신한 사실이 발각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궁정으로 일종의 유배를 보내졌었는데, 수녀원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답답한 생활을 하면서 유력한 원로원 의원과 정략 결혼하게될 처지가 되자, 450년 아틸라에게 청혼을 하면서 지참금으로 서로마 영토의 절반을 약속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문제가 커지가 동로마에서는 호노리아를 다시 서로마로 돌려보내버렸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이런 문제를 일으킨 누이를 처형하려고 하였으나, 어머니인 갈라 플라키디아가 말려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갈라 플라키디아는 얼마지나지 않아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에 아틸라는 목표를 동로마에서 서로마로 바꾸고 451년에 갈리아 지역으로 침공을 개시하였다. 훈족과 친분이 있었던 아에티우스는 선물을 보내는 등 협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않자,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1세'와 연합을 꾀하고, '알란족'을 설득하여 훈족을 돕지 못하게 하는 등 치밀한 준비를 하였다. 아틸라는 갈리아 지역의 여러 도시를 약탈하고, '아우렐리아눔'(현재의 오를레앙)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서로마 군단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자 포위를 풀고 평원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벌어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에티우스와 서고트 연합군은 아틸라를 물리치고 승리하였는데, 이는 훈족도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보여준 전투하고 한다. 하지만 전투 내용을 보면 서로마 군단의 전략적 승리라기 보다는 너무 강한 훈족이 전선에서 돌출되었기 때문에 역으로 포위되는 형상이 되어 패배하였다. 어찌되었든 한번 패배하여 후퇴했던 아틸라는 이듬해인 452년에 다시 서로마로 쳐들어왔는데, 이번에는 이탈리아로 침공하였다. 아틸라는 이탈리아 북부를 돌아다니면서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고, 이에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라벤나를 떠나 로마로 피난하였다고 한다. 아에티우스가 서둘러 이탈리아로 향하기는 했지만 서고트족을 포함한 이민족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틸라를 저지할 수 없었고, 아틸라는 과거 수도였던 '메디올라눔'(현재의 밀라노)까지 점령했다고 한다. 이때 교황이었던 '레오 1세'가 직접 아틸라를 찾아가 협상하였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협상 후 아틸라는 훈족을 이끌고 이탈리아에서 철수하였다. 그 후 453년에 아틸라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서로마는 아틸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해체와 사망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집권기 동안 서로마 제국의 해체가 가시화 되었는데, 439년에 북아프리카 속주를 반달족에게 완전히 빼앗겼으며, 그 이후로 되찾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 속주를 장악한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는 함선을 이용하여 시칠리아를 포함하여 지중해 서부에서 해적질을 하며 약탈을 일삼았다. 또 446년에는 사실상 407년에 일어난 '콘스탄티누스 3세' 반란 이후로 영향력을 상실한 '브리타니아' 지역에 대해 최종적으로 포기하였으며,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속주에서도 상당한 범위에서 이민족에 의해 영향력을 상실했다. 453년에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과 아에티우스의 아들이 결혼하였는데,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이를 빌미로 아에티우스가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추대할 것이라고 의심하였다고 한다. 이때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었던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와 환관이었던 '헤라클리우스'가 이를 눈치채고 아에티우스에 대한 암살 음모를 꾸몄고, 454년 황실 궁전에서 아에티우스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알현하던 도중, 황제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직접 아에티우스를 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이러한 암살 내용에 비추어보면,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암살에 대해 명령한 것인지, 신하들이 암살 계획을 가져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진언한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이로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권력에 대한 위험이 사라진 듯 했지만, 이듬해인 455년 이번에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페트로니우스에게 암살당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페트로니우스의 아내 '루시나'에게 욕정하여, 루시나를 속여 황궁으로 불러내어 강간하였다고 한다. 이에 앙심을 품은 페트로니우스가 아에티우스의 부하였던 호위병과 짜고, 사냥연습을 하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암살하였다고 한다. 이로서 서로마 제국에서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막을 내리고, 서로마 제국은 멸망을 향해 한발 더 내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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