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서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한 황제들
- 역사
- 2023. 5. 8.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396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로마 제국의 여러 속주에서 총독을 지냈으며 집정관에도 취임했을 정도의 상당한 유력자였다. 이러한 배경 앞에서 페트로니우스도 411년에 치안관을 맡았으며,
415년경에는 군사 호민관에 임명되었고, 이후로도 계속 공직을 역임하여 433년에는 집정관에 임명되었다. 그 후 이탈리아 총독을 맡았고, 443년에는 두번째로 집정관에 취임하였으며, 445년에 귀족 칭호를 받으면서, 당시 서로마 제국의 실권을 쥐고 있던 서로마 군단 총사령관인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에 버금가는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 453년에 서로마 제국 황제인 '플라비우스 플라키디우스 발렌티니아누스'(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과 아에티우스의 아들이 결혼하면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에티우스가 그의 아들을 황제로 즉위시키려고 할까봐 불안에 휩쌓였다. 이에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에티우스를 암살하기로 하였고, 여기에 페트로니우스도 가담하게 된다. 454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에티우스를 황궁으로 불러들였고, 알현하는 자리에서 아에티우스를 직접 칼로 찔러 암살하였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페트로니우스의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는데,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페트로니우스의 아내를 보고 욕정하였다고 한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거짓말로 속여 페트로니우스의 아내를 황궁으로 불러들여서 강간했다고 한다. 이에 앙심을 품은 페트로니우스는 455년 아에티우스의 부하였던 호위병을 매수하여, 사냥연습을 하고 있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암살하게 하였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서로마 제국의 황제는 공석이 되었는데, 이 때문에 누가 새로운 황제가 될지 논란이 일었다고 한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측근이었던 '막시미아누스', 훈족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던 '마요리아누스', 그리고 페트로니우스 등이 경합하였는데, 페트로니우스는 원로원과 황궁의 관료들, 그리고 군단 병사들을 막대한 뇌물로 회유하여 황제에 취임하게 되었다. 페트로니우스는 자신이 정당성을 공고히하기 위해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아내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결혼하였는데, 그후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 '에우도키아'를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에우도키아는 이때 북아프리카 속주를 장악하고 있던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의 아들 '후네리크'와 약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방적인 약혼 파기에 화가난 가이세리크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하였다고 한다. 또는 황후 에우독시아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암살에 페트로니우스가 연루되어있을 것으로 의심하였기 때문에, 가이세리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페트로니우스가 황제로 즉위한지 두달남짓 지났을때, 로마에는 가이세리크가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고 한다. 사실상 이를 저지할 능력이 없었던 페트로니우스는 원로원을 설득하여 로마를 탈출하여고 하였는데, 이미 그의 호위병과 수행원들은 모두 도망쳐버렸다고 한다. 결국 페트로니우스는 혼자서 로마를 탈출하려고 하였고, 이를 본 성난 군중들이 그에게 돌을 던져서 돌에 맞아 죽었다. 로마로 쳐들어온 가이세리크는 교황이었던 '레오 1세'와 협상하였고, 기독교와 관계된 시설을 약탈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여, 상당히 온건하게 로마를 약탈했다고 한다. 이때 황후 에우독시아와 두 딸들을 포함한 많은 로마 시민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에파르키우스 아비투스
'에파르키우스 아비투스'는 385년경에 태어난 갈리아계 로마 귀족이다. 421년에는 세금과 관련된 문제로 '콘스탄티우스 3세' 황제를 알현하였고, 425년경에는 사절로서 서고트 왕국을 방문하여, 당시 왕자였던 '테오도리크 2세'와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이후 아에티우스 휘하에서 군생활을 하였는데, 서고트족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많은 협력을 받아내었다. 451년에 '훈족'의 '아틸라'가 갈리아 지역으로 침공하자, 서고트 왕국을 찾아가 동맹을 맺었고,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에게 승리하는데 기여하였다. 이후 아에티우스가 암살당하면서 은거한 것 같은데, 455년에 페트로니우스의 명령으로 다시 서고트 왕국을 찾아가 서로마 황제로서 지지를 얻어내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페트로니우스가 로마에서 사망하자, 아비투스는 갈리아 속주민들과 서고트족의 지지를 받아 서로마 황제로 추대되었다. 황제가 된 아비투스는 테오도리크 2세에게 보답하고자 서고트족이 '히스파니아' 지역으로 확장하는 것을 용인해 주었다고 한다. 이후 갈리아에서 세력을 정비한 아비투스는 로마로 향했고, 원로원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에서도 일단 아비투스를 황제로 인정해주었다. 아비투스는 로마를 약탈한 가이세리크를 몰아내기 위하여 수차례 전투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아비투스의 부하였던 '플라비우스 리키메르'가 명성을 얻었다. 곧 로마에서는 갈리아계 귀족들이 득세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생겼고, 계속되는 반달족의 약탈로 인해 식량부족 현상이 지속되자, 리키메르는 이를 이용하여 아비투스를 축출하려고 했다고 한다. 아비투스는 갈리아로 돌아가서 군대를 모아왔지만, 이탈리아에서 리키메르와 벌인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리키메르는 아비투스를 주교로 임명하고 쫒아냈다고 한다. 아비투스는 457년에 사망하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원로원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고도 하고, '율리우스 발레리우스 마요리아누스'에게 살해당했다고도 한다.
율리우스 발레리우스 마요리아누스
'율리우스 발레리우스 마요리아누스'는 42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갈리아의 로마 귀족 집안 출신으로 대대로 로마 군인 집안이었다고 한다. 마요리아누스도 아에티우스 휘하에서 군생활을 하였으며, 리키메르와는 친구였다고 한다. 아비투스가 리키메르에 의해 축출된 후에, 457년 마요리아누스가 리키메르에 의해서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리키메르는 근 1년간 시간을 끌었는데, 리키메르는 순수한 게르만 혈통인데다 로마에서는 이단으로 취급되는 아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황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위가 공석이었기 때문에 원로원과 군단의 반발이 계속되었고, 쳐들어온 이민족을 격퇴하고 귀환하던 중에 갑작스럽게 병사들에 의해 마요리아누스가 황제로 추대되자 리키메르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인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서로마에서의 실권은 실제로는 계속 리키메르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마요리아누스의 황제 즉위는 동로마에서도 인정 받았는데, 이 당시 동로마도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레오'(레오 1세)가 막 황제로 즉위한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에 별탈없이 인정된 것 같다. 마요리아누스는 이렇게 얼렁뚱땅 황제가 된 것 같지만, 그 능력은 생각보다 뛰어났던 것 같다. 458년 마요리아누스는 안정적인 세수 확보와 세금 횡령을 막기위한 법을 제정하였고, 이 해 여름에 반달족의 군대가 캄파니아 일대에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하자, 즉시 군단을 이끌고 내려가 그들을 격퇴하였다. 마요리아누스는 계속되는 이민족의 침공에 최대한 대비하고자 모든 로마인들의 무장을 허용하는 법령을 선포하고, 여러 이민족 출신의 용병대를 모집하는 등 서로마 군단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서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2세는 자신이 후원하던 아비투스가 축출된 것에 격노하였는데, 그는 마요리아누스를 서로마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마요리아누스는 서로마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 남부 지역으로 진군하여 서고트족 군대를 격파하였고, 테오도리크 2세와 협약을 맺어 갈리아 남부 지역에서의 서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마요리아누스는 그대로 갈리아 남부 지역 일대를 평정하였고, 서로마에서 이반하였던 여러 도시들에게 벌금을 매기고, 포로로 잡은 '부르군트족'들을 강제로 로마 군단에 편입시켰다고 한다. 459년에는 히스파니아 지역으로 원정에 나섰는데, 이 원정의 성공으로 서로마 제국은 히스파니아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였고, 서고트 왕국의 영향력은 상당히 축소되었다. 460년에는 갈리아계 귀족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출신의 로마 귀족들도 중용하면서 로마 내에서 정치적 영향력도 상당히 확대되었고, 원로원과도 상당히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461년에는 북아프리카 속주를 되찾고자 함대를 이끌고 나섰는데, 이러한 계획이 내부에서 누설되어 가이세리크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서로마 함대는 반달족 함대에게 기습을 당하여 괴멸되었고, 마요리아누스는 원정을 포기하고 로마로 귀환하였다. 이때 마요리아누스는 전통에 따라 이탈리아에 상륙하자 군단을 해산하고 소수의 인원으로 로마로 향하였는데, 리키메르가 이 패배를 구실로 병사들을 이끌고 귀환 도중인 그를 기습하여 체포하였고, 고문 끝에 살해하였다. 이는 리키메르가 마요리아누스가 자신의 아래에서 벗어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리비우스 세베루스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황제가 되기 전에 삶에 대한 내용은 알려진바가 거의 없다. 리키메르는 마요리누스를 살해한 후 황제를 지명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반달족 왕인 가이세리크가 자신과 연관있는 '올리브리우스'를 황제에 앉히라고 압박하였다고 한다. 리키메르는 3개월간 시간을 들인 후 로마 귀족들과 원로원의 지지를 얻을 수 있고, 이민족의 조력자를 갖지 못한 원로원 의원이었던 세베루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세베루스의 황제 즉위는 아무런 명분도 없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을 포함하여 인접해 있는 모든 세력은 세베루스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상 세베루스는 리키메르의 꼭두각시로 황제로 추대된 것이다. 이때 갈리아 지역에는 '아에기디우스'가 세력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는 아에티우스 휘하에서 군생활을 하였으며, 아에티우스가 암살된 이후로도 군단을 이끌고 일대를 관리하고 있었고, 마요리아누스에 의해 갈리아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갈리아 남부를 회복할때도 함께하였으며, 히스파니아 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원정에도 함께 하였다. 아에기디우스는 리키메르와 세베루스에게 반기를 들었고, 갈리아 북부에 있는 '수시오눔'(현재의 수아송)을 거점으로 삼고 반란을 일으켰다. 462년 리키메르는 군단을 보내 이를 진압하게 하였지만 패배하였고, 아에기디우스가 갈리아 북부지역을 방어하는 동안, 갈리아 남부 지역은 다시 부르군트족이 차지하였다. 히스파니아에서도 리키메르와 세베루스에게 반기를 들어 지휘관들이 서고트 왕국에 투항해버렸다. 이로서 리키메르와 세베루스는 마요리아누스가 집권하는 동안 회복했던 서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모두 잃었다. 아에기디우스를 처단하기 위해 이번에는 서고트 왕국이 테오도리크 2세에게 서로마의 도시를 넘겨주며 원군을 요청하였지만 아에기디우스에게 패배하였고, 한동안 소강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아에기디우스는 이민족들 사이에서 영토를 지키다 464년에 사망하였는데, 전염병으로 병사했다는 설과 리키메르가 보낸 암살자에게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세베루스도 465년에 사망하였는데, 세베루스 또한 자연사 했다고 하기도 하고, 리키메르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프로코피우스 안테미우스
'프로코피우스 안테미우스'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의 사위로, 황제의 인척이자 고위 귀족들과도 인연이 있었다. 리키메르는 세베루스가 사망한 이후에 동로마 제국의 허락을 구한다면서, 아무도 황제로 추대하지 않고 시간을 끌고 있었다. 한편 당시 동로마 제국에서는 '플라비우스 아르다부르 아스파르'가 실권을 잡고, 꼭두각시 황제로 자신의 평민출신 부하인 레오 1세를 앉혀놓고 있었다. 이에 아스파르는 정치적 입지상 부담스러운 위치에 있던 안테미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추대하여, 사실상 서로마로 쫒아내었다. 467년 서로마로 향하던 안테미우스는 뜻밖의 만남을 갖게 되었는데, 바로 '달마티아' 사령관이었던 '마르켈리누스'와 만났다. 마르켈리누스는 마요리아누스의 부하로, 마요리아누스가 리키메르에 의해 살해된 후에 반독립세력으로 지내고 있었다. 안테미우스가 서로마 황제로 즉위한다는 것을 알게된 마르켈리누스는 안테미우스에게 협력하기로 하여, 사실상 이탈리아 지역에 국한 되어있던 서로마 제국의 영향권 안에 달마티아가 다시 포함되게 되었다. 로마시에 도착한 달마티아는 리키메르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등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테미우스는 그리스인이었고, 이교인이자 철학자인 친구를 집정관에 앉히거나, 주화에 헤라클레스를 새기는 등의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기독교 중심의 서로마에서 별로 지지받지 못하였다. 또 안테미우스는 의욕을 가지고 황제의 역할에 노력하였기 때문에 리키메르와 좋은 관계를 지속할 수 없었고, 결정적으로 안테미우스를 지지하는 마르켈리누스가 리키메르에게 정치적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안테미우스의 황제 자리는 위태로울 수 밖에 없었다. 이 해에 동로마 제국은 북아프리카 속주를 회복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 계획을 발표하였는데, 이 원정에 서로마 제국도 참여하기로 하였다. 이에 마르켈리누스가 먼저 시칠리아에서 반달족을 몰아내었다. 마르켈리누스는 이어서 아프리카 원정에도 참여하려고 하였지만, 리키메르의 반대로 시칠리아를 방어하는 임무에 주력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은 468년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반달족에 의해 대패하여 원정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또 시칠리아에 있던 마르켈리누스도 암살당하였는데, 그 진상은 알 수 없으나 리키메르에 의해 암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 대대적인 승리를 기회로 가이세리크는 다시 한번 올리브리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추대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 와중에 안테미우스는 갈리아 남부에서 서고트 왕국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지휘관하여으로 군단을 파견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으며, 안테미우스의 아들도 전사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리키메르는 올리브리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추대하였고, 472년에 로마에 있는 안테미우스를 공격하여 살해하였다. 그러나 리키메르 역시 얼마 안가 급사하였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올리브리우스와 글리케리우스
올리브리우스의 생애 전반에 대해서는 알려진 내용은 거의 없는데, 그는 로마나 이탈리아 태생으로 추정된다. 확실한 것은 올리브리우스는 북아프리카 속주를 차지하고 있던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와 인연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가이세리크는 461년경에 한번 올리브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도록 리키메르를 압박하였으며, 465년 세베루스가 사망했을때도 다시 한번 올리브리우스를 황제로 추천하였다고 한다. 결국 올리브리우스는 472년에 리키메르에 의해 추대되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리키메르는 무려 5명이나 황제를 앞세워 놓고, 뒤에서 실권을 쥐고 서로마 제국을 좌지우지 하였으나, 올리브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한지 40일 만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서로마의 주도권은 올리브리우스가 아닌, 리키메르의 조카였던 '군도바트'가 장악하였다. 올리브리우스는 즉위한지 1년도 체우지 못하고 병사하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올리브리우스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군도바트가 암살했다고 한다. 올리브리우스를 제거한 군도바트는 473년 리키메르의 부하였던 달마티아 출신의 '글리케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글리케리우스는 이미 상당히 몰락한 서로마 제국을 지키기 위해 이탈리아로 쳐들어오는 고트족에게 공물을 주어 갈리아로 향하게 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하였다. 또 동로마 제국에게 정식 황제로 인정받기 위해 474년에 동로마 제국에서 원하는 사람을 집정관으로 임명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끝까지 서로마 제국의 정식 황제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게다가 글리케리우스를 황제로 세운 군도바트도 브루군트족의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로마를 떠나버렸기 때문에, 서로마에 글리케리우스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한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레오 1세는 '율리우스 네포스'를 파견하여 이탈리아와 갈리아, 달마티아 등 서로마 지역을 통치하도록 하였고, 475년 율리우스 네포스는 동로마 군단을 이끌고 '오스티아'에 상륙하였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글리케리우스는 라벤나에서 항복하였고, 율리우스 네포스는 그를 폐위시키고 살로나의 주교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이후는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글리케리우스의 최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율리우스 네포스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율리우스 네포스는 43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본래 로마 제국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동로마 제국의 달마티아 지역 군단 사령관이었다고 한다. 475년에 동로마 제국 황제인 레오 1세의 명령으로 동로마에서 찬탈자로 취급한 서로마 제국 황제인 글리케리우스를 몰아내고, 서로마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율리우스 네포스가 글리케리우스를 폐위시키자, 그의 지지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또 리키메르의 세력을 이어받았던 '오레스테스'가 이민족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어린 아들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황제로 추대하였고, 이에 율리우스 네포스는 자신의 근거지인 달마티아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오레스테스는 자신을 도와준 이민족들에게 약속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 이에 이민족들의 리더였던 '오도아케르'는 476년 로마로 쳐들어가서 오레스테스를 살해한 후에 라벤나로 가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다. 이후 오도아케르는 황제가 되지 않고 왕이 되었는데, 리키메르처럼 꼭두각시 황제를 세우고 조종하는 것 보다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이 더 났다고 생각한 것 같다. 왕이 된 오도아케르는 서로마 황제가 쓰는 관을 동로마로 보냈기 때문에 서로마 황제위는 동로마로 이전된 것으로 생각되며,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율리우스 네포스는 그 후로도 계속 서로마 황제를 자칭하였고, 동로마 제국도 율리우스 네포스만 정식 황제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율리우스 네포스를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로 보기도 한다. 율리우스 네포스는 계속해서 달마티아에서 지냈는데, 480년 그는 자택에서 글리케리우스의 지지자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이후 서로마 제국의 황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서로마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폐위된 이후에도 계속 이탈리아에서 연금을 받으면서 평화롭게 살다가, 500년경 혹은 511년경에 사망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