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공포에 떨게한 훈족의 마지막 왕 「아틸라」
- 역사
- 2023. 5. 9.
훈족의 아틸라
'아틸라'는 406년 '훈족'의 '문주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문주크는 당시 훈족의 왕인 '루아'의 동생이었다. 435년에 루아가 사망하자, 아틸라의 형인 '블레다'가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이때 아틸라가 블레다와 함께 공동으로 왕이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블레다는 명목상의 왕으로 아틸라가 실권을 쥐고 있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내용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아틸라가 블레다의 동생으로서 훈족의 2인자가 되어 어느정도 독자적인 세력을 이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훈족의 세력은 매우 강성하였는데, 이미 370년경부터 고트족을 비롯한 많은 게르만족들을 공격하여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시켰다. 이렇게 게르만족을 밀어내고 그 자치를 차지한 훈족은 필연적으로 로마 제국과 만나게 되었다. 먼저 훈족은 가까운 동로마 제국과 접촉하였는데, 아틸라는 438년경 다뉴브 강변에서 이루어진 블레다와 동로마 제국의 사절단과의 회담에 참가한 것으로 역사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회담은 양측 모두 말에 탄채로 진행하였는데, 이 협상의 결과로 동로마 제국은 매년 훈족에게 지급하던 황금의 양을 두 배로 인상하고, 다뉴브 강 유역에 안전한 무역시장을 개설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으로 탈출하는 훈족 도망자들에 대해 이들을 받아주지 않도록 하는 내용이 결정되었다. 이 협상의 내용으로 비추어보면 당시 이미 동로마 제국은 사실상 훈족보더 결코 높은 위치에 잊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러한 협상 내용에도 불구하고, 훈족은 '마르구스'의 주교가 훈족 왕족들의 무덤을 도굴한다는 이유를 들어 무역시장에 있던 동로마 상인들을 살해하였고, 인근의 '비미나키움'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442년에는 다뉴브 강 인근의 로마의 요충지였던 '나이수스'(현재의 니시)도 점령하여 훈족의 영역이 되었다. 그러나 아틸라는 블레다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틸라는 전투가 한창인 중에 동로마 제국의 관료들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자신에게 보상금의 지급을 요청하거나, 동로마 제국으로 탈주한 훈족의 귀족의 신병을 넘기도록 요구하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445년경 블레다가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사냥 중 일어난 사고로 인해 죽었다고 한다. 혹은 아틸라가 왕이 되기 위해 블레다를 암살했다는 설도 있다.
동로마 제국과 아틸라
447년 아틸라는 이전 나이수스 요새를 점령하였을때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철수하였었는데, 시칠리아 원정군이 복귀한 동로마 제국이 배상금 지급을 미루면서, 동로마 제국으로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하였다. 이는 아틸라 이전의 훈족들이 국경 인근 지대를 약탈하면서 배상금을 받아내었던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는데, 아틸라는 훈족과 인근 지역의 여러 이민족들로 구성된 대규모 병력을 거느리고 쳐들어갔다. 아틸라는 주요 요새와의 싸움은 피하면서, 지나가는 도시들에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여, 동로마 제국에 공포와 혼란을 퍼트렸다. 이때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많은 건물이 무너지고 큰 피해를 입었으며, 주요 방어 시설과 성벽도 피해를 입었다. 이에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훈족과 마주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게르만족 출신의 '아르네글리스쿠스'에게 군단을 주어 '트라키아' 지역에서 아틸라를 저지하도록 하였다. 훈족은 이 싸움에서 적지않은 피해를 입었지만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지휘관인 아르네글리스쿠스를 전사시켰다. 결국 훈족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달하였지만, 시간을 번 테오도시우스 2세는 성벽을 수리하여 이에 대비할 수 있었고, 별다른 공성무기가 없었던 아틸라는 도시를 점령할 수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보호받고 있어 난공불락에 가까웠기 때문에, 아틸라는 도시를 포위한 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와중에 병사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퍼지면서 전투는 소강상태 빠졌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도 수도가 포위된 상태에서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평화협상이 이루어졌고, 아틸라는 막대한 배상금과 다뉴브 강 일대의 영토를 보장받았다. 449년에 아틸라는 더 많은 영토를 요구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냈는데, 이때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아틸라의 부하 중 한명을 회유하여 암살을 계획하였다고 한다. 도중에 아틸라의 부하가 다시 마음을 바꾸면서 암살은 실패로 끝났는데, 아틸라는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을 모두 살려서 돌려보냈을 뿐만 아니라, 그 목에 암살에 대한 대가로 지급한 황금의 두 배를 걸어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돌려보냈다. 이 일화를 통해 당시 몰락해가던 동로마 제국과 훈족과의 상하 관계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서로마 제국과 아틸라
450년경부터 아틸라는 동로마 제국에서 서로마 제국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아틸라가 서로마 제국 황제인 '플라비우스 플라키디우스 발렌티니아누스'(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인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의 청혼을 받아들이면서, 지참금으로 서로마 제국 영토의 절반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당시 호노리아는 시종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가 임신을 하고, 또 시종을 서로마 황제로 세우려고한 반역 음모에 연루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사실상 유배되어 온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 불만이 있던 호노리아는 당대 강자였던 아틸라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자신의 반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을 알게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아틸라가 몰고 올 위험을 피하기 위해, 즉시 호노리아를 서로마 제국으로 돌려보냈다. 뿐만 아니라 훈족에게 유약한 모습을 보이던 테오도시우스 2세는 얼마 안가 낙마사고로 사망하였고, 훈족에게 강경한 태도인 군인출신의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가 새로 황제로 추대되면서, 서로마 제국을 보다 손쉬운 상대로 판단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451년 아틸라는 훈족과 다양한 이민족으로 구성된 혼성군을 이끌고 '갈리아' 지역으로 침공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주력 훈족 기병은 페르시아와 반목하는 '아르메니아'를 지원하기 위해 보냈기 때문에, 전력이 상당히 저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틸라의 서로마 제국 침공 경로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는데, 라인강 북부일대부터 남하하면서 도시를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서로마 제국은 갈리아 총사령관인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나서 대적하였는데, 그는 훈족에 볼모로 끌려갔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아틸라와도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아에티우스는 처음에 아틸라와 접촉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이는 거부되었다. 이에 아에티우스는 서고트족과 연합하고, 다른 이민족들이 아틸라와 협력하지 않도록 하는 등 준비를 단단히 하였고, 아틸라가 포위하고 있던 '아우렐리아눔'(현재의 오를레앙)으로 향했다. 이어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의 훈족은 대패하였는데, 아에티우스가 추격을 꺼리는 덕분에 아틸라는 근거지로 후퇴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452년에 다시 서로마 제국으로 쳐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이탈리아 북부지역으로 침공하였다. 아틸라는 난공불락의 요새인 '아퀼레리아'를 3달 동안 공격하여 완전히 파괴하였다고 한다. 아에티우스는 아틸라를 저지하기 위해 갈리아에서 급하게 이탈리아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다른 이민족의 지원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섵불리 덤비지 못하였다. 아틸라는 한때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메디올라눔'(현재의 밀라노)을 점령하였고, 여러 도시들을 점령하면서 로마로 향했는데, 도중에 교황 '레오 1세'가 아틸라를 찾아와 평화협상을 제안하였다고 한다. 당시 어떤 내용의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틸라는 이 협상을 수용하고 철수하였다.
훈족의 마지막 왕
훈족은 중앙 집권 국가가 아닌, 여러 부족들이 왕을 중심으로 뭉친 연합체에 가까운 성격이었는데, 아틸라가 왕이 된 이후에는 좀 더 중앙 집권적인 방향으로의 변모를 꾀하였다. 아틸라는 당시 군사적인 면에서는 세계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훈족의 힘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 아래에 독립적인 세력을 가진 2인자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로마와 그리스 지역 출신의 유능한 외국인 관료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이러한 변화를 주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을 인접국으로 두게 되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틸라의 이러한 행보는 453년 아틸라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결국 실패하게 되었다. 아틸라는 자신의 목조 궁전 '일디코'에서 새로운 아내와 결혼하였고, 그날밤 갑작스럽게 대량의 피를 흘리고 사망하였다고 하는데, 어떤 이유로 사망하였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내용은 없다. 아틸라가 사망한 후 그의 자식들은 권력을 가지고 분쟁을 일으켰고, 이후 훈족에 협력하였던 이민족들이 반기를 들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렇게 한때 '신의 채찍'이라고까지 불리우며, 로마 제국과 유럽의 이민족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훈족은 완전히 와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