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동로마 제국 네번째 황제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레오」
- 역사
- 2023. 5. 16.
아스파르의 집사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레오'(레오 1세)는 401년 '트라키아' 지역에서 태어났다. 레오 1세는 로마 군단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하였으며, 정통파 그리스도 교인이었다고 한다. 당시 동로마에는 '플라비우스 아르다부르 아스파르'가 동로마 군단의 총사령관으로 실세였는데, 레오 1세도 아스파르 휘하에서 지휘관으로 있었다고 한다. 457년 동로마의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 황제가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그는 황제로 추대되었을때 황녀였던 '아일리아 풀케리아'와 결혼하였지만,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형식적인 혼인에 불과했기 때문에 후계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아스파르 가문의 집사였던 레오 1세는 아스파르의 도움으로 황제로 추대될 수 있었다. 아스파르는 '파트리키우스'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는 지휘관이었는데, 그는 로마인이 아닌 이민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전에도 자신의 부하였던 마르키아누스를 황제로 세웠었으며, 이번에도 레오 1세를 황제로 내세우고 그 뒤에서 실권을 행사하려고 했던 것 같다. 당시 원로원에서는 새로운 황제로 마르키누스의 사위이자,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와도 연결되어있던 '프로코피우스 안테미우스'를 지지하였지만, 그의 정통성이나 이후 서로마에서 그가 보여준 적극적으로 황제로서의 통치행위를 하였던 것을 보면, 자신의 권력에 장애물이 될 것으로 생각한 아스파르에 의해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이 안테미우스는 후에 동로마에 의해 서로마 황제로 임명되어 서로마로 향하였다.
로마 황제의 첫 기독교식 대관식
레오 1세는 사실상 아스파르의 승인으로 황제가 되었는데, 동로마 군단에서는 전통에 따라 그를 방패위에 올려서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부터 황제관을 받는 대관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는 동로마의 황제로서 첫번째로 치루어진 것이었다. 레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인 '아나톨리우스'가 집전하는 제관의식을 통해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러한 레오 1세의 대관식 이후에 동로마에서는 대주교가 집전하는 대관식을 통해 황제로 즉위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황제의 대관식을 기독교의 주교가 집전하게 된 것은 동로마에서의 기독교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혈연적 정통성이 없는 황제에게 종교적 권위를 통해 정통성을 보충해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대관식을 이후로도 유럽 여러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아스파르와 대립
아스파르에 의해 황제가 될 수 있었던 레오 1세이지만, 단순히 그의 꼭두각시 행세를 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집권이후 두 사람은 협력하는 관계보다는 견제하는 관계로 변하였다. 직접적으로는 자신의 자식을 고위관료로 임명하라는 아스파르의 권유를 레오 1세가 거절한 것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두사람의 불화는 단순히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레오 1세는 아스파르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그의 세력의 중심을 이루는 게르만계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배제하려고 시도하였다. 먼저 게르만족 중심의 군대를 개편하고 대대적으로 소아시아 지역의 산악민족인 '이사우리아족'을 기용하였다. 이는 황제의 근위대에도 적용되었는데, 근위대에서는 세력이 강한 게르만계를 배제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아예 이사우리아족 중심의 새로운 근위대를 창설하여 대칭으로두어 견제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당연하게도 아스파르와 게르만계 인물들에 저항을 받았고, 레오 1세는 자신에 대한 물 밑에서 일어나는 음모들을 차단하기 위해, 아예 이사우리아 출신의 '타라시코디사 루숨블라데오테스'를 트라키아 지역 군단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견제하였다. 그러나 레오 1세의 이러한 움직임은 기존 기득권층의 신흥 기득권층으로 부상하는 이사우리아족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북아프리카 원정 실패
레오 1세는 안테미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보낸 뒤, 467년 북아프리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반달족의 '가이세리크'를 공격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는 동로마와 서로마에 의한 북아프리카 지역을 수복하기 위한 대대적인 원정이었는데, 총사령관으로 레오 1세의 황후였던 '아일리아 베리나'의 오빠인 '바실리스쿠스'가 아스파르와 황후의 강력한 추천으로 임명되었다. 468년 시작된 원정은 초기에 사르데냐에서 반달족을 몰아내고, 시칠리아 일부 지역을 수복하는 등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가이세리크는 항복을 가장하여 바실리스쿠스를 기만하였고, 바실리스쿠스가 이끄는 연합군의 본대인 대규모 함대를 '본 곶 해전'에서 괴멸시켰다. 이로 인해 원정은 완전히 실패하였고, 동로마는 회복하기 어려운 대규모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 바실리스쿠스는 콘스탄티노플까지 도주하였는데, 레오 1세는 그를 처형하려고 하였지만, 아일리아 베리나의 간곡한 설득으로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스파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는데, 아스파르는 레오 1세의 딸인 '레온티아'와 자신의 아들 '파트리키우스'을 강제로 약혼시키고, 파트리키우스를 '카이사르'로 선포하는 등 황제의 자리 자체를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에 레오 1세는 타라시코디사와 협력하여 471년 아스파르와 그의 아들들을 궁정으로 초청하여 모조리 암살하였다. 그러니 이때 파트리키우스는 부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졌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레오 1세는 자신의 권력은 공공히 할 수 있었지만 대신 다른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아스파르의 빈자리를 노리고 '동고트족'의 '테오도리크'가 나선 것이다. 아스파르의 지위와 영토를 요구한 테오도리크에 대해 한번은 거절하였지만, 레오 1세는 동고트족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이내 협상에 응하여 테오도리크의 요구를 수락하였다.
이교 배척과 최후
기독교 이외의 종교에 대한 배척은 레오 1세의 통치 기간에도 계속되었는데, 472년에는 이교 의식이 이루어진 곳을 소유한 토지나 건물의 주인에게도 처벌을 내리는 정책까지 펼쳤다고 한다. 이러한 정책은 기독교에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겠으나, 이로인해 레오 1세의 인기는 별로 좋지 못했다고 한다. 또 레오 1세 때부터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로 입법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동로마가 로마 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점점 상실해가는 것을 보여준다. 473년에 레오 1세는 타라시코디사와 자신의 딸 '아일리아 아리아드네'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 '플라비우스 레오'(레오 2세)를 공동통치자로 임명하여 정식 후계자로 선포하였으며, 이듬해 7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