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의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 역사
- 2023. 1. 21.
로마의 명문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당주이자 영웅의 동생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본명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로 역대 로마 황제중 최초로 '카이사르'를 가문의 성씨가 아니라 황제를 뜻하는 명사로 사용하였다. 본래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였는데 이후 성장하여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 바꾸었다. 그의 이름에서 많은 것들을 알 수 있는데, 먼저 '삼니움 전쟁' 당시 '아피아 가도'를 건설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나,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하여 로마시민들에게 '로마의 검'이라고 불린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등으로 유명한 로마의 명문 귀족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당주이다. 로마 제국의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도 원래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으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입양되어 '율리우스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시기의 로마 제국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티베리우스의 동생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의 자식으로, 로마의 영웅으로 '게르마니아 정벌'에서 공적을 많이 세운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동생이기도 하다. 게르마니쿠스는 비록 젊은 나이에 병사하여 황제가 되지 못하였지만, 로마 제국의 3번쨰 황제인 '칼리굴라'의 아버지로 클라우디우스는 그 삼촌이 된다. 칼리굴라는 시민들에게는 인기가 많았지만, 그의 방만한 제국 경영은 비판받았는데, 즉위 4년만에 그의 근위대장이었던 '카시우스 케이레아'에게 암살당하였다. 그때 카시우스는 클라우디우스도 살해하려 하였지만, 다른 근위대장인 '아레키누스 클레멘스'에게 보호되어, 이후 황제의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취임하였다. 그의 취임은 로마 원로원에 의해 승인되긴 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근위대의 군사력에 의해 황제가 된 것이기 때문에, 이후 군사력이 로마 황제를 결정하는 군인황제 시대의 예가 되었다.
갑작스런 황제 취임
클라우디우스는 어렸을적에 소아마비를 앓아서, 걸을때 한쪽 다리를 절었고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집안에서는 부끄럽게 생각하였으며, 사실상 그는 황제의 자리와는 인연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칼리굴라가 암살당할 당시 후계자가 따로 지정되어있지 않았으며, 황비와 자녀까지 모두 살해당하였기 때문에 남은 황제 혈족이 없었다. 당시 원로원에서는 황제 일가가 암살당하였기 때문에 공화정 시기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는 것 같지만, 결국 근위대의 힘에 의해 클라우디우스가 즉위하면서 제국은 유지되었다. 당시 클라우디우스는 50세로 그때까지는 역사와 법을 연구하고 서적을 정리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한다. 그는 장애로 인하여 군복무 경험이 없고 집정관에도 취임한 적이 없으나, 그의 아버지와 형의 후광으로 로마 군단병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고, 성격이 온화하고 성품이 나쁘지 않아서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나쁘지 않았다. 41년 혼란한 로마의 분위기에 더해 암살범들의 체포와 처형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황제로서 권력을 잡게 된다.
로마의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클라우디우스는 기본적으로 전대 황제들에서부터 계속되는 정책들의 연장선 상에 있었지만, 군사정책에서는 황제 본인이 직접 출정하여 지휘하며 군단의 충성을 확인하였다. 그는 '달마티아' 속주의 반란이나, '트라키아' 문제 등을 해결하였고, 43년에는 브리타니아 원정을 결정하여 '카라타쿠스'를 공격하였으며, 브리타니아인 왕 11명의 항복을 받아내고, '브리타니아를 정복한 자'라는 뜻의 '브리타니쿠스'라는 존칭을 받으며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로마 내부적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이미 속주가 된지 오래된 '갈리아'계 로마인들을 대거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유능한 해방노예 3인을 황제의 비서로 활용하면서, 내각을 개편하고 행정부서들을 세분화 시키면서 관료제를 확대하여 로마의 행정 효율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그가 이탈리아 외부의 사람들을 중용한다고 견제를 받았으나, 반대로 로마의 권력을 황제 중심으로 더 공고히 하고 원로원이나 외부 세력의 개입을 축소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클라우디우스는 어렸을때부터 장애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가 적었기 때문에 자연히 가정교사나 해방노예들과 친숙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중에서도 '나르키수스', '칼리스투스', '팔라스'라는 그리스인 해방노예를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 두고 로마를 통치했다고 한다. 클라우디우스는 통치하는 동안 원로원을 정중하게 대우하며 예의를 지켰지만, 황제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해방노예 비서들을 통해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행태는 그의 몇몇 정책들과 함께 원로원에서는 상당히 불만이었던 것 같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공공시설물에도 신경을 써서, 칼리굴라 시대에 진행했던 상하수도 사업을 이어 받아 계속 진행했으며, 로마의 첫번째 항구이었던 '오스티아' 항구를 개선하여, 번듯한 수도의 외항으로서 기능을 향상시켜, 로마시로의 곡물 운송과 가격 조절 문제를 해결하였다.
로마의 두 악녀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그의 장애와 어린시절부터 황제의 자리와 관련이 적었던데 반해, 황제로서의 정치력이나 행정능력이 모자람이 없음을 잘 보여주었는데, 사생활에 대해서는 그다지 평가가 좋지 못하다. 그에게는 해방노예들과 제국을 운영하는 것 말고도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아내 문제 였다. 로마의 역사상 유명한 악녀로 평가 받는 이들 중에 '발레리아 메살리나'와 '율리아 아그리피나'(小아그리피나)가 있는데, 둘은 바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3번째와 4번째 황비이다. 그는 장애와 그의 소심한 성격 때문에 두번째 아내인 '아일리아 파이티나'를 제외하고 아내들에게 상당히 무시당했던 것 같다. 그의 3번째 아내인 메살리나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고발을 일삼고, 고발당해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재산을 착복하기를 일삼았으며, 남편이자 황제인 클라우디우스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원로원 의원인 '가이우스 실리우스'와 결혼식까지 올렸다가, 간통과 중혼, 국가반역죄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러나 소심한 클라우디우스는 아내였던 메살리나를 동정하여 처벌을 미루었고, 결국 그의 비서였던 해방노예들이 그녀가 숨어있던 '루쿨루스 별장'에 사람을 보내어 살해하였다고 한다. 네번쨰 아내인 율리아 아그리피나는 조카이자 칼리굴라의 누이였는데, 클라우디우스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율리우스 가문이 아닌 클라우디우스 가문에 남아있는 것에 대한 정치적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아그리피나는 다음 황제가 되는 '네로'의 어머니로, 그녀는 결혼 전부터 여러 정치적 음모에 연관되어 있었으며, 결혼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이미 친아들인 '브리타니쿠스'가 있었음에도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나은 자식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네로)를 다음 황제에 앉히려고 하였다고 하며,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독버섯에 중독되어 사망하자, 그녀가 독살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이러한 아내들의 악녀행각에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책임도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었기 때문에,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인기는 낮고, 무능한 황제로 취급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