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시대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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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토

평민 출신의 집정관

로마는 기본적으로 귀족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였지만, 공화정시기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이나 '호르텐시우스법' 등 일련의 개혁이 진행되면서 점차 평민들의 정치참여도가 높아졌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는 '라티움' 지방의 소도시인 '투스쿨룸' 출신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공직과는 좀 먼 위치에 있는 듯하였다. 카토는 스스로 농업론을 저술할 정도로 농업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그의 총명함을 알아본 로마의 명문 귀족인 '발레리우스 가문'의 후원을 받아 '쿠르수스 호노룸'이라고 하는 소위 로마의 출세 코스를 밟으면서 로마 정계에 뛰어들었다. 쿠르수스 호노룸은 재무관, 조영관, 법무관, 집정관, 감찰관의 직위를 순서대로 거치면서 공직경험을 쌓는 것으로 로마 원로원에서는 이를 명예로운 것으로 여겼다. 역사가들은 그를 그의 증손자에 해당하는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와 구별하기 위하여 '대 카토'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의 충돌

카토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구한 영웅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의 갈등은 로마사에서 매우 유명함과 동시에 큰 의미를 가진다. 두 사람의 갈등의 경위에는 몇 가지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우선 스키피오는 코르넬리우스 가문에 속하고 카토를 후원하는 발레리우스 가문과는 적대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 카토에 있어서는 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카토가 처음 고발한 것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니라 그의 형제였는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개인이 아닌 그 가문을 표적으로 삼은 고발로 보는 시선도 있다. 카토는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밑에서 재무관으로 종군하였는데, 이때부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지휘한 군단의 군율 문제나 재무적 방만함을 고발하는 등 갈등이 있었다고도 한다. 당시 로마 원로원에서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언동이나 행동을 문제시하는 의원들이 있었는데, 그가 매우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에 높은 공직을 경험하였으며, 동시에 큰 공을 쌓아 많은 로마 시민들의 인기 아래에서 정치를 행했기 때문에, 그의 월권행위나 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을 우려하며 견제하였다. 특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반발하고 있었던 것이 '이탈리아의 방패'라고도 불렸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인데, 카토는 그의 영향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카토 개인으로 봤을 때도 평민 출신으로 귀족의 후원을 받아 정치적 영향력을 얻은 그와, 로마의 명문 귀족 출신으로 아주 젊은 나이로 집정관이 되어, 지금은 전쟁영웅 취급을 받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비교하면 열등감이나, 혹은 질투심 같은 것이 있었을 수도 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일련의 고발에서 유죄를 선고받지는 않았으나, 그의 방만한 행동으로 인해 정계에서 은퇴하여 로마를 떠나 쓸쓸히 죽게 된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사망 후 로마 원로원은 카토가 주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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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토가 원한 카르타고의 멸망

카토는 로마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여 '카르타고'가 항복의 조건으로 외교권한과 군사권한을 상당히 로마에게 빼았겼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를 멸망해야 된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원로원에서도 반드시 카르타고를 몰락시켜야 한다고 연설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카토가 직접 카르타고를 둘러보았을 때, 카르타고는 패전한 국가임에도 활기가 넘쳤는데, 이는 카르타고가 지중해에서 지리적 위치가 좋고 해상무역이 발달하여 국력을 회복하는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다. 어느 날 카토는 카르타고산 무화과를 들고 원로원에 나와 '로마에서 불과 3일 위치에 이런 크고 멋진 무화과가 나오는 땅이 있다'며 로마를 위해 카르타고를 멸망시켜야 한다고 연설하였다고 한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이후 카토의 정적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었는데,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마찬가지로 카르타고에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키피오 나시카는 로마가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경쟁상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카르타고를 존속시켜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카토의 원로원에서의 영향력은 상당했고, 결국 기원전 149년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면서 카르타고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카르타고 주민들은 모두 노예로 팔렸고, 성벽과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그 도시 터 마저 완전히 갈아엎고 소금을 뿌려 불모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카토는 제3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85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카르타고의 최후를 보지는 못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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