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과학의 아버지 「앨런 튜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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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사진

외골수 천재

'앨런 매시슨 튜링'(Alan Mathison Turing)은 1912년 영국 런던의 마이다 베일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공무원이었고, 이 때문에 튜링은 이스트 서식스의 헤이스팅스 자치구에 있는 세인트 레오나드의 할아버지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튜링은 6세부터 현지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학교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였는데, 3주 만에 읽기를 깨우치는 등 재능을 보였고, 당시 학교의 교장도 그를 천재로 인정하였다고 한다. 13세가 된 1926년에는 도싯주의 셔번에 있는 기숙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이때 있었던 총파업으로 인해 교통 정체가 생겨 입학식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튜링은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는 97Km나 되는 거리를 혼자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여 참석하였다고 한다. 후에 그는 차를 기다리는 것이 귀찮아서 50Km를 뛰어 목적지에 도착한 일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화를 보면 튜링은 어떤 목적과 그에 대한 해결 방법을 정하면, 상당히 무리해 보이는 일도 돌파해 내는 약간 외골수적인 면모를 볼 수 있기도 하다. 이러한 성격 때문인지 튜링은 수학과 과학 외에, 특히 고전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 같고, 이 때문에 셔번의 기숙학교 교사들 중 일부는 과학만 배우고 싶으면 차라리 다른 학교를 가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튜링은 그곳에서 꿎꿎히 학업을 이어나갔는데, 이듬해인 1927년에는 한 번도 공부한 적 없는 미적분의 고급 문제들을 혼자서 풀어냈다고 한다. 1928년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연구에 대해 접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튜링은 겨우 16세의 나이였지만 이미 그의 연구에 대해 상당 부분 이해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이 시기 친구인 '크리스토퍼 모컴'과 만났는데, 그 또한 수학에 상당히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고, 두 사람은 함께 어려운 수학 문제들을 풀며 놀았다고 하며, 모컴은 튜링에게 상당히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컴은 1930년에 오염된 우유를 마셔 소결핵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고, 튜링은 큰 슬픔을 느껴 그의 어머니에게 추모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튜링이 모컴의 사망에 충격을 받아 무신론이나 물질주의에 빠졌다고 말하기도 하며, 모컴이 튜링의 첫사랑으로 동성애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

졸업 후 튜링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첫 입학시험에서 한 번에 합격했지만, 장학금을 타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시험을 쳐서 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킹스 컬리지에서 학부과정과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재학 중에 이미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고 한다. 튜링은 1936년에 '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이라는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그가 이후 창안하는 '만능 튜링 머신'의 개념과 노이만형 컴퓨터에 있어 이론적 토대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수학 논문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이후 박사과정은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에서 진행하였는데, 이때 프린스턴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던 유명한 수학자인 '존 폰 노이만'과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프린스턴에서 학업을 마친 튜링에게 노이만은 조교로 미국에 남아 연구를 계속할 것을 권했다고 하는데, 튜링은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영국으로 귀국하여 케임브리지로 돌아갔다. 1939년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는데, 이때 튜링은 영국 정보국의 권유를 받아 'GC&CS'(브레츨리 파크)에서 독일의 '애니그마' 암호를 해독하는 일을 맡았고, '튜링 봄브'를 개발하여 이를 효과적으로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다. 독일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자신들의 암호가 해독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하는데, 이러한 튜링의 업적으로 종전이 2년이나 앞당겨졌으며, 최대 1400만 명의 목숨을 구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모두 극비로 취급되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후 튜링의 공적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고 한다. 또 튜링 봄브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노하우들은 후에 만들어지는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디지털 전자 컴퓨터로 평가되는 '콜로서스'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1948년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초기형 디지털 컴퓨터인 '맨체스터 마크1'의 개발에도 참여하였으며, '폰 노이만형 컴퓨터'의 구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는 등 컴퓨터 과학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1950년에는 '인공지능'과 관련한 논문을 쓰기도 하였는데, 당시에는 인공지능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는 '기계 지능'이라는 단어로 그것을 표현하였다. 이때 그는 '튜링 테스트'라는 것을 고안하였는데, 이는 지금도 인공지능을 평가하는 데 사용되는 테스트들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그 외에도 튜링은 생물학에도 관심이 많아 생물학 논문도 암호학 논문만큼 많이 발표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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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 최후와 재평가

튜링은 상당히 독특한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그는 동료들이 자신의 머그컵을 자꾸 사용하자 그것을 쇠사슬로 묶어 놓기도 하였으며, 봄에는 꽃가루를 조심해야 한다며 방독면을 쓴 채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굉장히 위트 있고, 또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운동도 좋아하는 스포츠 맨으로, 한때 동료 수학자였던 '조안 클라크'와 약혼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파혼했는데, 튜링이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튜링은 이 동성애 때문에 고통받게 되었는데, 그는 39세였던 1952년 당시 19세의 '아놀드 머레이'와 연애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후 튜링의 집에 도둑이 드는 일이 발생하였고, 심지어 머레이가 자신이 도둑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튜링은 그를 경찰에 신고하였다. 문제는 당시 영국에서는 동성애가 불법이었는데, 튜링은 평소에도 자신이 동성애자인 것을 숨기지 않았으며, 경찰에도 머레이와의 관계에 대해 진술했다는 것이다. 결국 사건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결말을 맞게 되어 튜링이 동성애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사실 당시에 튜링은 대단한 국가유공자였지만, 이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외부에서는 그저 한 명의 대학 교수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튜링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을 때 함께 체스를 즐겼던 인물 중에 소위 '케임브리지 5인조'로 유명한 소련의 간첩들이 포함되어 있어, 튜링은 간첩으로 의심받기도 하였으며, 결국 법원에서 유죄를 판결받아 화학적 거세형을 처분받았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54년에 튜링은 자택에서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사인은 '사이안화 칼륨'(청산가리) 중독이다. 많은 사람들은 튜링이 화학적 거세형으로 여성 호르몬을 투여받으면서 생긴 스트레스로 인해 죽음을 택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가 법적 처벌을 받으면서 기밀 업무에서 제외되는 등 연구에서 소외당해 죽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으며, 그의 가족들은 단순히 실험 중의 사고로 중독되어 죽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튜링이 해외로 빠져나가 적국으로 망명할 것을 우려한 영국 정보부가 암살했다는 음모론적인 이야기들도 있다. 어찌 되었든 이로 인해 인류와 영국은 뛰어난 천재이자 유능한 과학자를 어처구니없는 일로 잃게 된 것인데, 이 일은 후에 제2차 세계 대전에 있었던 일들이 기밀이 해제되어 공개되면서 재평가 되게 된다. 튜링의 업적에 대해 알게 된 사람들은 정부를 비난하기 시작하였고, 2000년대에 와서는 동성애 등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운동이 적극적으로 일어나면서 이러한 요구가 더 거세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튜링은 사후 59년 만인 2013년에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에 의해 특별 사면 되었으며, 2021년에는 새로 발행되는 50파운드 신권에 튜링의 모습이 들어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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