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영국 명예혁명으로 쫓겨난 왕 「제임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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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요크의 공작

'제임스 2세'는 1633년 영국의 왕 '찰스 1세'와 프랑스 출신 왕비 '앙리에타 마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왕의 차남으로 태어나자마자 요크의 공작이 되었으며, 3살 때는 해군 제독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왕실의 후손에 대한 관례로 실제로는 명예직에 불과하였다. 제임스 2세는 우직하고 모범적인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형인 '찰스 2세'와 함께 공부하였고, 커서도 계속 형을 보좌하며 따랐기 때문에 형제간에 사이가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영국의 국내 상황이 별로 좋지 못했는데, 1639년부터 시작된 '삼왕국 전쟁'과 '잉글랜드 내전'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었고, 제임스 2세도 1646년에 의회파에 잡혀 포로가 되었다가 1648년에 네덜란드로 탈출하였다고 한다. 1649년에는 급기야 찰스 1세가 '올리버 크롬웰'을 중심으로 하는 의회파에 의해 처형되었고, 제임스 2세는 형과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에서 지내게 된다. 찰스 2세가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선포되는 등 잉글랜드의 왕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제임스 2세는 군에 입대하여 군생활을 하였는데, 당시 벌어진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전쟁에서 그는 초기에 프랑스의 명장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휘하에서 복무하였다고 하며, 여기에서 상당한 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쟁 중간에 프랑스는 올리버 크롬웰의 잉글랜드 연방을 정식 정부로 인정하여 조약을 맺는 등 영국 왕실과 사이가 틀어졌기 때문에, 제임스 2세는 다시 스페인 편으로 돌아서서 역시 프랑스의 명장인 '루이 2세 드 부르봉콩데' 휘하의 스페인 군대에서 복무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제임스 2세의 군 복무 경험은 이후로도 큰 도움이 되었는데, 영국에서 올리버 클롬웰이 사망한 후 1660년에 왕정복고가 일어나 찰스 2세가 다시 왕으로 복귀했을 때 제임스 2세는 이번에는 정식으로 영국 해군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으며, 이후 벌어진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과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지휘하는 등 큰 역할을 하였다. 이때 그는 북아메리카의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뉴네덜란드의 뉴암스테르담을 무혈점령하였는데, 이 공을 기려 뉴암스테르담은 이후 그의 작위를 따라 '뉴요크'(뉴욕)로 불리게 된다. 게다가 제임스 2세는 단순히 군사적 재능만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그는 뛰어난 행정가로 영국 해군을 개혁하여 효율적으로 관리되도록 하였고, 귀족과 젠트리들이 해군 장교로 활동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유입시켰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잉글랜드 연방 출신의 장교들도 차별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 출세할 수 있도록 보장하였다. 또 왕족으로서 백성들에 대한 의무도 충실이 이행하려고 노력하였는데, 1666년에 일어난 '런던 대화재' 당시에는 책임자가 되어 화재 진압을 위한 조직을 설립하였으며, 유언비어에 대해 적극 해명하고 손수 물통을 들도 나르는 등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 타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였고, 덕분에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종교 갈등

그러나 이러한 제임스 2세의 인기는 주로 정치권력과는 무관한 서민층을 기반으로 하고 이었으며, 그가 어디까지나 왕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는데, 그는 긴 내전의 기간 동안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에서 지내면서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이러한 그의 종교적 믿음은 개신교 국가인 영국에서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여담이지만 찰스 2세도 기독교였다고 하는데,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 사실을 끝까지 숨겼고, 임종에 이르러서야 몰래 고백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 영국인들, 정확히 말하자면 잉글랜드 내의 개신교들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했는데, 그들의 아버지인 찰스 1세는 개신교도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결국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 때문에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개신교보다는 가톨릭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 이후로 가톨릭과 개신교 간에 극심한 종교 분쟁을 겪었고, 영국 내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탄압하며 수차례 대상을 바꿔가며 학살에 가까운 진압을 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영국은 이미 개신교 국가로 가톨릭 세력이 거의 영향력을 상실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거부반응을 나타냈는데, 이는 사실 일반 평민들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이야기로 귀족들과 정치나 종교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소수자인 그들이 이끌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이 종교 문제는 다시 정국의 화두가 되었는데, 찰스 2세는 여러 애인들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식을 보았지만, 정실부인인 왕비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고, 결국 제임스 2세가 유력한 왕위 후보자로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제임스 2세는 개종을 권유받기도 하였지만 거절하였고, 해군에서 물러나는 등 공직에서 거리를 두어야 했으며, 찰스 2세는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대신 제임스 2세의 자식인 '메리 2세'와 '앤 스튜어트'를 개신교로 키우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또 1677년에는 메리 2세를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 '윌리엄 3세'와 결혼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중재하였으나, 개신교도들은 여전히 개신교 국가인 영국에 가톨릭 왕이 군림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결국 1678년에는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였던 '타이터스 오츠'가 가톨릭 신자들이 찰스 2세를 암살하고 제임스 2세를 왕으로 앉히려고 한다는 소위 '교황의 음모'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타이터스의 고발 내용은 날조로 드러났지만 이 사건은 상당한 파장을 불러오게 되었고, 결국 제임스 2세는 한동안 잉글랜드를 떠나 스코틀랜드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회에서는 가톨릭 신자가 왕이 될 수 없도록 법을 제정하려는 시도를 하거나, 찰스 2세의 사생아인 몬머스의 공작 '제임스 스콧'을 왕위에 올리려고 하는 등 강경책을 포기하지 않았고, 불안함을 느낀 찰스 2세는 아예 의회를 해산해 버리게 된다. 당시 의회는 제임스 2세의 왕위 계승을 인정해야 한다는 온건파인 '토리당'과 가톨릭교도는 왕이 될 수 없다는 강경파인 '휘그당'으로 나뉘어 정쟁을 하고 있었는데, 토리당도 휘그당도 모두 개신교 세력이었기 때문에 찰스 2세가 안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찰스 2세의 강경책에 대해 강경책으로 맞선 정책은 결국 1683년 '라이 하우스 음모'라는 결과를 불러오게 되었는데,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를 모두 암살하려고 시도했던 이 개신교도들의 음모는 불발되었지만, 이러한 광신에 가까워 보이는 행동들은 국민들의 반감을 불러오게 되었고, 덕분에 제임스 2세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일부 회복하는 등 1684년에 다시 해군 최고사령관의 자리로 복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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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국가의 가톨릭 왕

1685년 찰스 2세가 사망하자 제임스 2세는 뒤를 이어 영국의 왕좌에 오를 수 있었다. 제임스 2세의 즉위에 대해 공공연히 반대하는 자들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의회는 그를 영국의 왕으로 인정하는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제임스 2세를 기다린 것은 반란이었는데, 일부 개신교도들이 제임스 스콧을 중심으로 '몬머스의 난'을 일으켰다. 반란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진압되기는 하였으나 문제가 있었는데, 먼저 즉위 초부터 개신교도들이 공공연히 왕에 대해 반감을 드러냈다는 것과 제임스 2세 휘하의 판사들이 본보기 삼아 반란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하면서 더욱 반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이후 제임스 2세와 개신교 세력들은 계속해서 반목을 거듭하게 된다.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신자로서 영국 내에서 가톨릭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바랬던 것 같은데, 그가 이를 위해 행한 정책들은 개신교도들에 의해 거절되었고, 그가 이 정책들을 관철시키기 위해 가톨릭 신자들을 중용하면서, 개신교도들의 그가 영국을 가톨릭 왕국으로 되돌리려고 한다는 의심은 더욱 깊어져 갔다. 이것이 개신교도들의 과도한 믿음과 의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별도의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충돌은 1687년 제임스 2세가 '신교 자유령'을 선언하면서 극으로 치닫게 된다. 이것은 당시 유럽에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내용으로 사실상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 가까운 내용이었는데, 이는 당연하게도 당시 영국을 장악하고 있던 기득권층인 영국 국교회 세력에 의해 극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당시 영국 국교회 세력의 목적은 이후 제임스 2세가 몰락한 후에 발표된 '관용령'의 내용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데, 관용령에는 신교 자유령처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표면적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에 대해 가톨릭과 유대교를 제외하고 있으며, 영국 국교회를 제외한 다른 신자들이 공직에 진출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이듬해인 1688년 제임스 2세는 이러한 내용을 교회를 통해서 전파될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렸고, 이에 캔터베리 대주교를 포함한 7명의 영국 국교회 성직자들이 재고할 것을 요청하였고, 제임스 2세는 이들을 체포하도록 하는 등 강경책으로 대응하였다. 제임스 2세의 이러한 행위는 가톨릭 신자로서 차별받은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의도도 있었겠지만, 동시에 어떤 종교를 믿는 지와 관계없이 영국의 백성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왕으로서의 행위 이기도 했다.

명예혁명

이러한 제임스 2세의 종교 정책은 여전히 개신교 세력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때까지는 반발이 그리 심하지는 않았는데, 제임스 2세는 이미 고령으로 아들이 없었으며 그의 두 딸은 모두 개신교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한 시기의 문제로 치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늦둥이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가 태어나게 되었고, 이는 개신교 세력을 포함하여 다른 왕위 계승자들 사이에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또 제임스 2세는 반란을 진압한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그대로 상비군화 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는데, 이러한 행위도 개신교 세력을 크게 자극하게 된다. 사실 통일 된 섬나라인 영국에서 지상군을 상시 유지시키는 것은 당시에는 재정 낭비나 다름없었는데, 제임스 2세가 어떤 의도로 이러한 시도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개신교 세력은 제임스 2세가 군사력을 이용해 권력을 휘두른 올리버 크롬웰처럼 자신들을 탄압하는 데 사용하려고 한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서로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사이 개신교 귀족들 중 일부가 네덜란드에 있던 메리 2세와 남편 윌리엄 3세와의 접촉을 시도하였고, 이들을 개입시켜 제임스 2세를 축출시킬 음모를 세우게 된다. 당시 메리 2세는 왕위 계승권 1위에 있었으나 갑자기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권좌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윌리엄 3세도 네덜란드와 더불어 영국에서도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음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게 된다. 제임스 2세나 프랑스의 '루이 14세'도 도중에 이러한 시도에 대해 눈치챈 것 같은데, 루이 14세는 제임스 2세에게 프랑스 군대를 보내 돕겠다고 청했다고 하는데, 제임스 2세는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군이 개입할 경우 영국 내부의 혼란이 가중될 것과 개신교도 국민들로부터 외면받을 것을 생각하여 이를 거절한 것 같다. 또 이때 제임스 2세는 이미 상비군으로 상당한 수준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어 격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한 것 같은데, 상황은 그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돌아가게 된다. 막상 윌리엄 3세가 영국에 상륙하자 총사령관을 포함하여 많은 개신교 귀족들과 병사들이 그에게 돌아섰으며, 둘째 딸인 앤 스튜어트 조차 아버지를 배신하고 윌리엄 3세에게 투항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제임스 2세는 저항을 포기하고 그대로 국내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가고자 하였으나 도중에 어부에게 붙잡혀 런던으로 압송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영국 국내에는 제임스 2세를 지지하는 세력이 충분하였고, 런던에서도 그는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하였는데, 이에 대해 개신교 세력들은 가톨릭 세력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윌리엄 3세는 제임스 2세에게 찰스 1세의 죽음을 상기시키며 압박하여 프랑스로 망명하도록 유도하였다.

실각과 몰락

결국 제임스 2세는 해가 가기 전에 윌리엄 3세의 의도대로 프랑스로 몸을 피하였고, 의회는 제임스 2세가 프랑스로 도피하려고 시도한 사건을 빌미로 영국의 왕위가 공석임을 선포하였으며, 사전에 계획했던 대로 메리 2세를 왕위에 앉히고 윌리엄 3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들은 의회가 요구한 '권리장전'에 동의하였는데,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의회와 국민의 권리에 대한 내용도 담겨있지만, 동시에 가톨릭교도는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점도 명시하였다.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는 이후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스코틀랜드의 왕위도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스코틀랜드와 특히 아일랜드에서는 이러한 잉글랜드 의회의 조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듬해인 1689년 제임스 2세는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아 아일랜드에 상륙하였고, 이에 아일랜드 의회는 제임스 2세가 여전히 아일랜드의 왕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1690년에 제임스 2세는 '보인 전투'에서 윌리엄 3세에게 패하였고, 그로 인해 다시 프랑스로 쫓겨나면서 그의 지지 세력은 완전히 와해되게 된다. 여담이지만 '명예혁명'은 혁명의 과정에서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아 명예롭다는 의미로 명예혁명이라고 불리는데, 사실은 혁명 당시에도 일부 희생자들이 있었으며, 혁명 직후 개신교도들의 폭동과 이후 가톨릭 세력의 반란 등으로 더 많은 희생자들이 나왔다. 또 제임스 2세와 윌리엄 3세가 아일랜드에서 벌인 전투도 명예혁명의 일련의 과정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후 제임스 2세는 루이 14세의 원조를 받으며 계속 프랑스에서 생활하였는데, 1696년 루이 14세의 폴란드의 왕으로 즉위하라는 제안을 거절한 이후에는 그마저 끊기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백성들과 자식들에게도 배신당한 제임스 2세는 그렇게 프랑스에서 계속 생활하다가 1701년에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렇게 일련의 혁명 과정은 순조롭게 마무리될 수 있었지만, 이후 제임스 2세를 영국의 정통 왕위 소유자로 보는 '자코바이트' 나타나는 등 영국 왕실의 권위는 한동안 위협받게 된다. '권리 청원'과 잉글랜드 내전부터 명예혁명과 권리 장전 공포되기까지 영국은 큰 혼란을 겪으면서 시민들이 권리와 지위가 크게 향상된 것으로 평가되지만, 사실 그 내부에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종교 싸움부터 의회의 이권 다툼까지가 존재하는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 영국의 의회 정치는 그저 결과적으로 얻어진 것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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