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남북조시대 동진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 「사안」
- 역사
- 2023. 10. 17.
풍류인 사안
'사안'(謝安)은 중국의 오호십육국시대인 320년경에 '동진'의 회계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안석'(安石)을 썼다. 그의 가문은 명문인 양하 사씨 집안인데, 본래는 예주 진군에 살았지만 '영가의 난'이 일어나자 전란을 피해 강남으로 도망쳐 회계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사안은 어렸을 적부터 총명하여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성장하여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왕희지 등과 어울리며 청담을 논하기만 하였다고 한다. 사안도 왕희지처럼 명문가의 자제로서 태어날 때부터 부와 명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성취에 더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이윽고 40세가 다돼서야 관직에 나아갔는데, 동생 '사만'이 조정에서 실각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당시 동진의 최고 권력자 중 하나였던 '환온'의 사마가 되었다고 한다. 사안은 본래 귀족 출신으로 이제 벼슬까지 하게 되었지만 그 소탈한 성품은 바뀌지 않았는데, 그는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도 계속 그러했기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하루는 시골로 귀향하려는 사람이 저잣거리에서 사안을 보고 아는 체를 하였는데, 사안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안부를 물으며 노자돈은 가지고 다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사람이 수중에 '포규선' 5자루 밖에 없다고 했는데, 사안이 그중에 하나를 골라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자, 인근의 선비들이 앞다투어 포규선을 구했기 때문에 가격이 몇 배나 올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재상이 되어서도 거들먹거리지 않았기 때문에, 당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풍류를 즐기는 습관도 그대로였는데, 사안은 재상의 신분이었음에도 때때로 기녀를 데리고 동산을 거닐며 풍류를 즐겼고, 그때 지은 시가 온 도시에 유행이 될 정도였다고도 한다.
환온의 야심을 저지하다
사안은 환온의 휘하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출세하였지만 이내 환온과 멀어졌으며, 자신의 능력과 명성으로 시중과 이부상서를 지내는 등 두각을 나타내었다. 당시에 환온은 사실상 동진을 완전히 장악하여, 371년에는 황제인 '사마혁'을 폐위시키고 '간문제'를 새로 세우는 등 위세가 대단하였다. 그러나 간문제는 그때 이미 고령이었는데, 이듬해인 372년에 간문제가 사망하자, 당시 10세에 불과했던 그의 어린 아들을 새로 '효무제'로 세웠고, 환온은 효무제를 압박하여 황제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였다. 이때 사안과 '왕담지' 등이 나서서 이를 저지하였는데, 동진의 실권은 사실상 환온이 모두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환온의 명분이 부족한 점을 이용하여 차일피일 시간을 끄는 전략을 택했다. 사안은 환온에게 대놓고 섭정이 되어달라는 편지를 써서 선수를 치기도 하였는데, 이 편지에서 그는 환온에게 '제갈무후'가 되어달라며 야심을 버리고 신하의 위치를 지키라는 의미의 문구를 쓰기도 하였다. 환온은 처음에는 이들의 말에 따랐으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대놓고 황위를 찬탈할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는데, 환온도 상당한 고령이었기 때문에 사안의 시간 끌기 전략에 휘말려 찬탈을 시작도 못하고 373년에 62세의 나이로 병사하게 된다. 이때 환혼이 동진을 접수했다면 또 어떻게 되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사안 등의 활약으로 동진의 운명이 조금 더 길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비수 대전
화북지방에 저족이 세운 나라인 '전진'은 한때 동진의 북벌로 인해 국가 존망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잘 극복하였고, 이후 동진이 잇따른 북벌 실패와 내란을 겪는 동안 국력을 크게 신장시켜 화북을 완전히 제압하고 중원의 패자로 등극하였다. 전진을 크게 발전시킨 황제 '부견'은 그 후 눈을 남쪽으로 돌려 중원 통일을 목표로 하였는데, 383년에는 100만에 가까운 대군을 모아 대대적으로 동진을 침공하였다. 이때 사안이 정토대도독이 되어 동생 '사석'과 조카 '사현' 등을 이끌고 전진의 군대를 막았는데, 당시 동진의 군대는 겨우 8만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상황은 동진에게 매우 불리하였지만 전진의 대군에게도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전진의 100만 대군은 여러 민족이 혼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속력이 크게 부족하였다. 특히 '주서'라는 자는 본래 동진의 신하였다가 양양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어쩔 수 없이 항복한 자였는데, 부견은 아무 의심 없이 그를 기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진에 항복을 권하는 사자로 보내기도 하였다. 사자로 온 주서는 항복을 권하기는커녕 전진군의 약점을 알려주며 결전을 종용하였고, 사안도 전진군 내부의 한족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이반을 하도록 종용하였다. 결국 전투가 시작되자 전진의 대군은 스스로 와해되기 시작하였고, '비수 대전'의 결과 멸망하게 된 것은 동진이 아니라 전진이었다. 이는 사안이 두 번째로 동진을 큰 위기에서 구한 것이었는데, 이로써 양하 사씨들은 동진에서 개국 공신인 낭야 왕씨에 견줄 수 있는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견제와 몰락
큰 공을 세운 사안은 태보의 자리에 올랐으며, 화북의 혼란을 틈타 북벌을 추진하였는데, 하남 일대를 수복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사안의 영향력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한 황족인 '사마도자' 등의 견제로 좌절되게 된다. 동진에서는 이미 '왕돈'이나 '환온'같은 실권을 쥔 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찬탈을 시도하는 등, 귀족들에 의한 권력 싸움으로 큰 혼란을 몇 번이나 겪었고, 사마도자도 사안이 환온처럼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얼마 안 있어 사안은 조정에서 퇴출되어 광릉보구로 좌천되었으며, 385년에는 65세의 나이로 병사하게 된다. 이후 387년에 비수대전에서 큰 공을 세운 사현도 사망하면서 사씨 일족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 감소되게 된다. 사안의 사후 아들 '사요'가 작위를 이어받았지만 요절하였고, 다시 손자 '사해'도 자식이 없이 요절하면서 사안의 봉작은 폐지되었으며, 사안의 차남 '사염'의 자식인 '사혼'도 '유유'와 대적하였다가 멸족당하면서 사안의 대는 끊어져 동진의 멸망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