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말 삼국시대 최후의 승리자, 서진의 고조 「사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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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팔달

'사마의'(司馬懿)는 중국의 후한말 삼국시대인 179년경에 태어났으며, 자는 '중달'(仲達)을 썼다. 사마의의 집안은 당대의 손꼽히는 명문가 중 하나로, 그 근거지는 하내군 온현으로 수도인 낙양에서 조금 거리가 있기는 하였지만, 할아버지인 '사마준'도 영천태수로 관직 생활을 하기도 하는 등 지역 향리들과 일족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으며 지역 호족들의 리더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아버지인 사마방도 정직하고 공정한 관리로 평판이 자자했는데, 본인 스스로는 물론 자식들의 교육도 매우 엄격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사마의를 비롯한 8명의 형제들 모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보고 '사마팔달'이라고 불렀으며, 그중에서도 사마의가 가장 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사마방은 문관직인 경조윤과 무관직인 기도위를 모두 거친 것으로 보아 문무 양쪽에서 모두 뛰어났던 것 같은데, 사마의도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았는지 정치적 수완뿐만 아니라 군사적 재능 또한 비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전란의 시대

사마의는 낙양에서 벼슬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낙양에서 함께 생활하였는데, 후한말 전란이 심화됨에 따라 '반동탁연합'이 결성되고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하는 등 혼란이 이어지자 맏형인 '사마랑' 등 친족들과 함께 고향인 하내군으로 낙향하였으나, 다시 하내태수 '왕광'의 폭정이나 반동탁연합군의 약탈을 예상하고 여양까지 피난 갔다고 한다. 그 후 온현으로 다시 돌아와서도 대기근이 발생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지만 사마랑과 함께 공부에 매진하였다고 하는데, 지역을 장악한 부유한 호족 집안이었던 만큼 기근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덜 불편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에 '양준', '최염'같은 이들이 사마의와 만났는데, 그들은 모두 사마의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사마의가 23세가 된 201년에는 군의 추천으로 상계연으로 추천되었는데, 당시 사공의 자리에 있던 '조조'가 그의 소식을 듣고 등용하려고 하였지만,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이때 조조가 사마의를 의심하여 밤중에 사람을 보내 확인하게 하였다고 하는데, 사마의가 계속 집안에 누워만 있었기 때문에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낮에 갑자기 비가 내리자 사마의는 황급히 나가 햇볕에 말리던 책들을 거두어들였는데, 이 모습을 여종에게 들키게 되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내 '장춘화'가 후환이 될 것을 염려하여 여종을 죽여 입막음하였으며, 이후 스스로 집안일을 챙기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사마의가 조조의 임관 권유를 거절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는 조조와 원소가 대립하고 있던 시기로, 사마랑이 조조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만약 조조가 원소에게 지더라도 집안을 지키기 위해 거절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또 이 이때 사마의는 장춘화에게 큰 빚을 진 셈이 되었기 때문에, 이후 아내를 함부로 하지 못하는 공처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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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의 충신

208년 승상이 된 조조는 다시 사마의를 불러들였는데, 조조는 그를 문학연으로 삼고자 사람을 보내면서 다시 한번 거절하면 잡아들이라고 명령하였고, 사마의도 이를 두려워하여 조조 휘하에 임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의 행동은 좀 이상한데, 조조는 막상 사마의를 관직으로 불러들이고서는 그를 의심하여 중용하지 않았고, 후계자인 '조비'에게도 사마의를 경계하도록 경고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조가 위왕으로 책봉된 것은 216년이고, 조비가 세자로 책봉된 것은 이듬해인 217년으로, 당시 조조가 사마의의 역모나 역심에 대해 걱정했다기보다는 후계자인 조비에게 부하들에 대한 경계를 일깨워 줄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마의를 가까이하던 조비가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고, 사마의는 이러한 의심을 풀기 위해 직접 가축을 돌보는 하찮은 일다 마다하지 않았으며, 밤을 새워가며 하급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등 노력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노력이 도움이 되었는지 사마의는 조조의 의심을 풀고 조비와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성공하였고, 조조의 휘하에서 황문시랑, 의랑, 승상 동조속에 이어 주부로 전임하는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출세하였다. 사마의는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굴복시키자 곧바로 익주를 공격할 것을 건의하거나, '관우'에 의해 형주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천도를 막고 '손권'을 끌어들여 해결하는 대책을 제시하는 등 충분한 역량을 보여주었고, 조비의 휘하에서 '진군', '오질', '주삭'과 함께 4우라고 불리며 큰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220년에 조조가 사망하자 그 장례를 치르는 역할을 맡았으며, 조비가 선양을 받아 정식으로 위나라의 황제가 되자 안국향후에 봉해졌고, 상서우복야로 임명되었다. 224년에는 다시 상향후로 봉해졌으며, 무군대장군 가절에 급사중과 녹상서사를 겸임하였는데, 조비는 사마의를 크게 신임하여 자신이 동쪽을 맡을 때는 서쪽을, 서쪽을 맡을 때는 동쪽을 맡아달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비는 난세를 평정하지 못하였는데, 그는 오나라와 다투면서 국력을 소비하였고, 그 사이 '이릉대전'에서 패했던 촉나라가 국력을 회복하여 '제갈량'이 북벌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조비는 226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아들 '조예'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사마의와 '조진', '조휴', '진군'에게 후사를 부탁하였다.

제갈량과 사마의

사마의의 업적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제갈량의 북벌에 맞선 것일 것인데, 사실 227년부터 7년간 5회에 걸쳐 이루어진 북벌 중 사마의가 직접 맞선 것은 두 번 밖에 되지 않는다. 사마의는 조예가 즉위한 이후 무양후로 봉해졌으며, 오나라의 공격으로부터 형주를 방어하는데 성공하여 표기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사마의는 1차 북벌이 시작된 227년에는 완에 있었는데, 상용을 다스리고 있던 '맹달'이 이반 할 조짐을 보이자 이를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본래 조예는 맹달이 배반할 것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하는데, 사마의는 때를 놓칠 것을 우려하여 먼저 맹달에게 서신을 보내 안심시켜 시간을 끌었으며, 이후 8일 만에 군대를 이끌고 상용까지 진군하여 16일 만에 항복을 받아 맹달을 처단하였다고 한다. 맹달이 제갈량과 내통하면서 완에서 상용까지 1,200리에 달하니 족히 한 달은 걸릴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하는데, 대략 480Km를 8일 만에 행군한 셈이다. 그러는 동안 '마속'이 산 위에 진을 치는 등 제갈량의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1차 북벌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고, 230년 3차 북벌이 끝난 이후에는 대장군에 대도독이 되어 조진과 함께 촉나라에 반격하기도 하였지만, 안 좋은 기후 등의 이유로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고 후퇴함으로 역시 제갈량과 맞붙지는 못했다. 이듬해인 231년에 4차 북벌이 있었는데, 조진은 중병이 들어 얼마 후 사망하였기 때문에, 조예는 대신 사마의를 장안으로 보내 이를 격퇴하도록 하였다. 위나라의 군대는 기산 인근에 자리 잡은 촉나라 군대와 맞붙었는데, 노성 인근에서 몇 차례 전투를 벌이다가 촉나라 내부에서 보급문제로 인해 정치적 분쟁이 발생하면서 제갈량이 북벌을 포기하고 후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장합'이 촉나라군을 추격하다가 전사하게 되었는데, 사마의가 말렸지만 무리하게 장합이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장합이 병법을 들어 추격을 거부하였지만 사마의가 억지로 보냈다가 복병을 맞나 전사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고 한다. 이후 사마의는 장안에서 계속 관중 지역을 관리하였는데, 주변 사람들이 촉나라가 다시 쳐들어 올 것을 걱정하여 미리 군량을 쌓아놔야 한다고 진언하였지만, 사마의는 제갈량이 군량이 부족해서 여러 차례 북벌을 실패하였기 때문에 3년간은 오지 못 할 것이라며 지역을 안정시키는데 주력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제갈량의 5차 북벌은 234년에 시작되었는데, 만반의 준비를 갖춘 촉나라군은 오장원을 장악하였고, 이후 위나라군에 의해 진군이 막히자 아예 자리를 잡고 둔전을 시작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제갈량도 마냥 오장원에 눌러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는데, 그는 사마의에게 장신구와 여자 옷을 보내어 도발하기도 하였지만, 분노한 사마의를 주변에서 말려 출전하지 않았으며, 조정에서도 '신비'를 군사로 보내어 위나라군이 출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결국 두 군대는 싸우지 않고 계속 대치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사마의가 제갈량이 보낸 사자에게 제갈량에 대해 물었고, 이때 사자가 제갈량이 여러 업무를 직접 처리하면서 소식한다는 이야기를 하였으며, 이를 들은 사마의가 제갈량이 오래 못 갈 것이라고 답하여 '식소사번'이라는 고사가 생겼다고 한다. 사마의의 말처럼 제갈량은 건강을 해쳐 얼마 안 가 사망하였는데, 이 때문에 촉나라군이 퇴각을 시작하자 사마의가 이를 추격하였지만, 이내 촉나라군이 대오를 바로잡고 반전하자 군을 물렸다. 이것을 본 백성들이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물리쳤다는 말을 남겼다고 하며, 촉나라군은 진형을 갖추어 무사히 퇴각에 성공하였고, 사마의는 후에 다시 추격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235년 사마의는 태위의 자리에 올랐는데, 조진과 조휴 등 실권을 갖고 있던 동료들이 차례차례 사망하면서 점차 권세가 강해졌고, 238년에는 요동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공손연'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아 원정을 떠났는데, 그는 이 과정에서 양평의 15세 이상의 남자 7,000여 명을 처형하는 등 악명을 쌓게 된다. 사마의는 1년 만에 원정을 마치고 귀환하였는데, 돌아오는 과정에 장안으로 돌아오라는 명령과 낙양으로 오라는 두 가지 명령을 동시에 받게 된다. 이에 심각함을 느낀 사마의는 급히 낙양을 향했는데, 조예는 죽기 전에 사마의를 만나 당시 8세에 불과했던 후계자 '조방'을 '조상'과 함께 보필하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고평릉 사변

239년 사마의는 조방이 즉위한 후에는 태부의 자리에 올랐는데, 입궐할 때도 수레를 탈 수 있게 하는 등 많은 특권을 받았지만, 실권 자체는 조상이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사마의의 위세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는데, 그는 계속된 전란으로 인해 국력이 소모되었기 때문에, 부역을 축소하고 황실의 낭비를 줄이도록 하는 등 위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여러 정책을 상주하였다고 한다. 241년에는 오나라가 다시 형주를 공격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이를 격퇴하였고, 그 공으로 봉토가 늘어 4개 현에 달했으며, 11명의 자식들 모두 열후에 봉해졌다고 한다. 이후로도 사마의는 몇 차례 오나라군을 격파하였는데, 반면 조상을 촉 원정에 실패하는 등 성과를 내지 못하였고, 그 시기심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인지 사마의와 조상은 점차 대립하게 된다. 247년 사마의의 아내 장춘화가 사망하였는데, 당시 조상은 '하안', '등양', '정밀' 등과 함께 조정을 전횡하고 있었고, 이에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드러누워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당시 사마의는 70을 바라보는 고령으로 아내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기 때문에, 그의 병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상 등이 정권을 탈취할 준비를 하면서 그를 경계하였는데, 사마의는 조조가 처음 자신을 등용하려고 했을 때처럼 철저히 연기를 하며 그들을 속였다. 249년 조방은 아버지 조예의 능인 고평릉으로 참배를 하러 갔는데, 이때 조상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심복들까지 모두 함께하여 낙양을 비우게 되었고, 사마의는 이틈을 노리고 아들 '사마사', '사마소'와 함께 미리 준비해 둔 사병 3,000명을 동원해 낙양을 점거하며 정변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실상 황제는 성 밖에 있었으며, 조상은 대장군으로 군권을 가지고 있던데 반해 사마의의 영향력은 낙양 인근에만 미치고 있었는데, 사마의도 그러한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상에게 관직만 박탈하겠다며 항복할 것을 재촉하였고, 조상도 여기에 고스란히 넘어가 대장군 인수를 넘기고 항복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실질적으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는데, 결국 얼마 안 가 조상 일파는 반역죄로 모두 처형되게 된다. 이후 위나라의 실권은 사실상 사마의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조방이 사마의에게 승장의 자리와 '구석'을 내렸지만, 사마의는 모두 사양하였다고 한다.

진나라의 건국

251년 사마의는 직접 출병하여 '왕릉의 난' 진압하기도 하였지만, 73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는 역사적으로 위나라를 배신하고 찬탈하여 '서진'를 세운 것으로 유명하지만, 실제 사마의는 고평릉 사변에도 불구하고 일단 죽을 때까지 위나라의 신하로서 있었다. 그가 사망한 후에는 사마소가 뒤를 이어 진왕의 자리에 올랐으며, 이때 사마의는 선왕으로 사후 추존되었고, 후에 손자 '사마염'이 원제 '조환'에게 선양을 받아 서진을 세우면서 서진의 '고조'로 추존되게 된다. 사마의가 위나라를 찬탈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가지고 있었다면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결국 사후에 서진의 황제가 되었고, 그 서진이 촉나라와 오나라를 제압하고 중원을 통일하면서 위나라, 촉나라, 오나라로 시작된 중국의 삼국시대는 진나라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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