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영국 국가와 결혼한 여왕 「엘리자베스 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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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혼란스러운 왕실

'엘리자베스 튜더'(Elizabeth Tudor)는 1533년 영국의 그리니치에서 영국 왕 '헨리 8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인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났다. 헨리 8세는 총 6명의 왕비를 두었는데, 당시 유럽은 기독교 지배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동양과 달리 황제나 왕들도 일부일처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결국 헨리 8세가 새로운 왕비를 얻기 위해서는 이혼을 통해 이전의 결혼을 무효화해야 했는데, 그중에서도 앤 불린은 엘리자베스가 3살 무렵인 1536년에 헨리 8세에 의해 간통죄로 고발되어 유폐되었다가 겨우 3주 만에 처형되었다. 앤 불린이 처형되면서 엘리자베스는 사생아 취급 되었으며, 공주의 칭호와 왕위 계승권도 박탈당하는 등 불안정한 신분이 되었다. 이 시기 왕실에는 엘리자베스와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바로 헨리 8세가 첫 번째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자 엘리자베스의 이복언니인 '메리 1세'로, 그녀 또한 어머니가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면서 엘리자베스와 같은 비슷한 처지로 격하되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는 별로 좋지 못했는데, 메리 1세의 신분이 강등된 이유가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 때문이었으며, 이후 앤 불린이 메리 1세를 매우 괴롭혔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에서도 엘리자베스는 공부를 좋아하는 매우 총명한 소녀였으며, 이복동생인 '에드워드 6세'가 태어난 후에는 공주의 신분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으며,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왕비인 '캐서린 파'의 도움을 받아 여러 저명한 학자들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후계자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6세가 그 뒤를 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캐서린 파는 에드워드 6세의 삼촌이 되는 '토마스 시모어' 남작과 조용히 결혼하였으며, 엘리자베스도 캐서린 파와 함께 시모어 남작과 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14세의 엘리자베스에게 시모어 남작이 접근하여 추근댔다고 하는데, 이는 엘리자베스가 가지고 있던 왕위 계승권을 노리고 접근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모어 남작의 행위는 곧 캐서린 파에게 발각되었고, 캐서린 파는 엘리자베스를 보호하기 위해 즉시 그녀를 다른 곳으로 보내 시모어 남작과의 접촉을 차단하였으며, 이후 진심 어린 걱정과 조언을 통해 엘리자베스가 시모어 남작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어디까지나 캐서린 파의 입장에서 당연히 취했어야 마땅한 조치로, 그녀가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갖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당시 임신 중이었던 캐서린 파는 이후 아이를 낳고 산욕열로 인해 고통받으면서 엘리자베스와 시모어 남작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고, 이 때문에 이 사건이 주변에 알려지게 되었다. 결국 캐서린 파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방해물이 사라진 시모어 남작은 다시 엘리자베스에게 구애했으나, 엘리자베스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1553년에 에드워드 6세가 급환으로 요절하였고, 메리 1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한때 엘리자베스는 종교문제로 인해 4개월간 유폐되기도 했지만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고, 1588년 메리 1세도 건강이 악화되어 병사하면서 마지막 남은 엘리자베스가 영국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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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 여왕

1559년 엘리자베스는 25세의 나이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는데, 이로서 엘리자베스는 국내에서 그녀의 신분에 대한 불안정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었지만, 대신 종교적인 문제로 혼란스러운 영국을 안정시켜야 하는 책무를 지게 되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 발표 이후로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본격적으로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떨어져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헨리 8세가 정치적 이유로 가톨릭과 결별하고 개신교를 영국의 국교로 삼기 시작하면서 혼란이 시작되었고, 메리 1세의 통치시절에는 그 결정을 뒤집고 가톨릭으로 다시 복귀하는 등 혼란이 극에 달했으며, 이 과정에서 영국 전체 사제의 1/4에 해당하는 2,000여 명이 쫓겨나고 300여 명의 관련자들이 화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 이 때문에 주변국인 프랑스와 스페인 등과 사이가 좋지 못했으며, 스코틀랜드의 경우에는 엘리자베스의 정통성을 부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왕으로 즉위한 엘리자베스는 결혼을 통하여 정치적 안정을 꾀하기도 했던 것 같은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고, 국민들은 이런 여왕에게 'The Virgin Queen'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가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으며, 성 기능 같은 생물학적인 문제라던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정치적 이유라던가, 혹은 개신교를 유지하기 위한 종교적 목적으로 결혼하지 않았다는 등의 추정이 있을 뿐이다. 실제로 엘리자베스가 대관식에서 자신은 국가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국가 운영에 헌신하겠다는 추상적인 의미였지만, 그녀가 결혼하지 않은 사실과 맞물려 종종 주변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결혼을 거부한 것은 아니어서 혼담이 들어올 때마다 적극적으로 검토하였지만, 여러 이유로 인해 결과적으로 거절되었다고 한다.

기독교와 스페인

엘리자베스는 라틴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웨일스어 등 6개 국어를 할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성격은 아버지 헨리 8세를 닮아 사자같이 불같은 성격으로 이복언니인 메리 1세와도 비슷했다고 한다. 그러나 17세의 민감한 나이에 사생아 취급되어 계모에게 학대받은 메리 1세가 종교적이고 엄격한 성격이었던 것과는 달리, 엘리자베스는 생기가 넘치고 상냥한 성격에 나이가 들어서도 외모 관리에 무척 신경을 썼다고 하는데, 이러한 성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는 종교적 문제에 대해 메리 1세와 비슷한 매우 강경한 대처를 하였다. 엘리자베스는 영국의 국교를 다시 개신교로 되돌리면서 메리 1세처럼 저항하는 이들을 잡아 반역죄로 무참히 처형하였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메리 1세처럼 비난받았지만, 메리 1세만큼 비난받지 않은 것은 그 성격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찌 되었든 이러는 사이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 스튜어드'가 폐위되어 감금되었다가 탈출하여 망명하였는데, 가톨릭 세력과 손을 잡고 반란을 획책하다가 결국 처형당하게 된다. 그런데 스페인이 나서서 이 사건을 물고 늘어졌는데, 스페인은 본래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는 메리 1세의 남편이기도 하였다.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즉위할 때부터 스페인과의 사이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던 데다가, 영국은 해적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신대륙에서 오는 스페인의 상선들을 약탈하는 등 범죄를 저지르고 있기도 했다. 스페인에서는 악명 높은 해적인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처형하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 요구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해군 중장으로 임명하고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결국 두 나라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되었고, 스페인은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내세워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1588년 벌어진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패배하였으며, 특히나 전투 후 두 번이나 큰 태풍에 휘말리면서 전체 함대의 80%에 육박하는 81척이 침몰하는 피해를 입게 된다. 이로서 한 시기 영국은 스페인의 해군을 압도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1년 정도의 기간에 불과하였고, 함대를 재건하려는 스페인을 공격하러 갔던 영국 함대가 되려 패배하면서 다시 해상의 주도권은 스페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규 해군에 대한 것으로 영국은 꾸준히 해적들을 활용하여 적들을 괴롭히면서 실질적인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경제 정책과 구빈법

엘리자베스 여왕은 경제력이 권력을 뒷받침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비단 자신의 재산만을 축척한 것이 아니라, 안정적인 세수를 늘리기 위해 산업 발전을 추구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유능한 인재들을 모았는데, 성실청과 특설고등법원을 창설하는 등 이들이 활약할 수 있는 기구를 마련하여 적극적으로 경제 진흥 정책을 펼쳤다. 그 정책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모직물 산업을 장려한 것인데, 양모를 이용하여 만든 모직물은 영국의 대표적인 산업의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었지만, 대신 양을 키우기 위한 목초지를 유지하기 위해 농지를 줄이게 되면서, 많은 농민들이 직업을 잃고 부랑자가 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 시기 영국에서는 '백년전쟁'과 '장미 전쟁', '인클로저 운동' 등으로 인해 빈민들이 늘어나고 있었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러한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구빈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구빈법이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빈민을 지원하기 위한 방식이 아닌, 낭비되는 빈민들의 노동력을 사회로 환원하기 위한 방식이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빈민들이 게으르고 나태하여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과적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구빈법을 통해 일부 장애가 있거나 고령 등으로 인해 노동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판단되는 빈민들은 강제로 시설에 수용되어 제한된 형태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 외에 노동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빈민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반항하는 자들은 폭력에 시달리거나 처형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아이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연령이나 외모에 따라 강제 입양되거나 도제로 보내져 미래의 노동력 창출을 위한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이 구빈법을 통해 구제받은 빈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인권이나 연민이 결여된 구제라는 것은 같은 단어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엘리자베스 여왕의 치하에서 '동인도 회사'가 설립하여 적극적으로 무역을 개시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을 통해서 왕실과 국가는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대신 다른 이들이 그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 외에도 엘리자베스 여왕은 부족한 재정을 조금이라도 메꾸기 위해 검약한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왕실 재산을 매각하거나 귀족들에게 임대하는 방식을 통해 돈을 마련하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드레스와 보석을 모으는 데에는 아낌없이 사용하였다고 하며, 내정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결정을 미루고 신하들에게 떠넘겼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일을 정식으로 위임한 것도 아니어서 문제가 생기면 신하들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워 숙청하였다고 한다.

영국의 가장 위대한 여왕

엘리자베스 여왕은 '훌륭한 여왕 베스'라고 불릴 정도로 당대부터 인기가 많았고, 현대의 영국에서도 위대한 여왕으로 손꼽히지만, 적어도 그녀의 정책들은 결코 도덕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경제력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던 만큼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되었는데, 그녀는 새로운 사업이 생겨나면 멋대로 독점권을 설치하였으며, 이를 자신에게 아첨하는 귀족들이나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 이 때문에 영국의 경제 규모 자체는 성장하였지만 경제 질서는 어지럽혀졌으며, 이러한 그녀의 행위에 대해 의회가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자 의회를 조종하려는 시도를 하다 실패하기도 하였다. 말년인 1601년에는 측근 중 한 명이 런던에서 반란을 시도하기도 하였고, 고령으로 우울증과 노인성 질환들이 심해지면서 건강이 나빠졌다고 한다. 결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1603년에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그녀가 생전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영국의 왕위는 친척인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에게 넘어가게 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대영제국'의 기반을 만들어 놓은 사람으로 영국의 역대 왕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여왕으로 평가받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국의 시점에 한정된 것으로 현대적 관점에서는 뛰어난 여왕이었을지는 모르지겠지만, 적어도 좋은 여왕이었다고 평가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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