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유럽 나폴레옹 몰락의 단초가 된 「트라팔가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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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과 프랑스 혁명 전쟁

1789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있었던 '루이 16세'가 주최한 '삼부회'에서 귀족과 성직자들이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평민 대표들을 소외시키자, 그들은 따로 모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고, '테니스 코트 서약'을 맺어 구체제 타파를 위한 움직임을 계속 이어갔다. 이에 구체제를 옹호하는 소위 '왕당파'라고 불리는 이들이 '제3신분'에 속하는 평민들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군을 파리로 불러들이면서, 본격적으로 무력충돌이 일어나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게 된다. 이후 프랑스는 '푀양파'와 '지롱드파', '자코뱅파' 등 여러 파벌이 자신들의 신념과 이익을 위해 정치를 펼쳤고, 극심한 혼란 속에서 전쟁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정권을 잡게 된다. 이 시기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 같은 프랑스 주변국들은 급진적인 시민혁명인 프랑스 혁명과 그 사상이 자신들의 체제를 흔들 것을 우려하였는데, 자국 내의 혁명주의자들을 박해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아예 '대프랑스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혁명이전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프랑스와 유럽의 여러 국가 사이에서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이라고 불리는 긴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해전

1793년 프랑스 혁명과 루이 16세의 처형 등으로 유럽 여러 국가들은 위기감을 느껴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는데, 여기에는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스페인 등이 참여하였고, 이들은 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프랑스를 공격하여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그러나 이 동맹은 1796년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맥을 우회하여 이탈리아를 제압하고, 1797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점령하여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맺으면서 사실상 붕괴되게 된다. 결국 영국만이 전쟁을 계속 수행하였는데, 이에 나폴레옹은 영국을 견제하고자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 사이의 교통의 요지였던 '이집트 원정'을 감행하게 된다. 1798년 나폴레옹은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겨우 3주 만에 이집트를 장악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이로 인해 오랜 동맹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으며, '아부키르 만 해전'(나일 해전)에서는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게 대패하였고, 나폴레옹이 현지인들의 관습을 존중하지 않거나 학살을 자행하는 등 실책을 거듭한 끝에 원정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은 아군인 프랑스 병사들에 대해서도 비인간적인 태도를 취했고, 많은 프랑스 병사들이 영국이나 오스만 제국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해전 승리를 기회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과 함께 프랑스를 압박하였지만, 이듬해인 1799년 나폴레옹은 자신의 실패를 숨긴 채 프랑스로 돌아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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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

나폴레옹은 다시 육상에서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승승장구하였고, 1801년에 '뤼네빌 조약'을 통해 오스트리아를 무력화시켰고, 다시 1802년에는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과 화평하면서 제2차 대프랑스 동맹도 붕괴하게 된다. 그런데 이 프랑스와 유럽 각국의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은 프랑스 혁명이 그 원인이었지만, 1804년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때 영국은 이미 아미앵 조약을 파기하고 프랑스 해상 봉쇄를 지속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계속된 전쟁에서도 굴복시키지 못했던 영국을 제압하기 위해 18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상륙작전을 준비하였고, 영국도 다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시칠리아-나폴리 왕국 등을 끌어들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한다. 이에 본격적으로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지만 프랑스에게는 큰 문제가 남아 있었는데, 바로 영국에 상륙하기 위해 도버해협을 건너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스페인 함대를 끌어들여 이 난관을 극복하기로 하였고, '피에르 샤를 장 바티스트 실베스트르 드 빌뇌브' 제독을 보내 서인도 제도를 공격하는 등 영국 함대를 교란하려 시도하였지만, '피니스트레곶 해전'에서 패배하는 등 여전히 고전하면서 아예 육상 병력을 오스트리아 방면으로 돌리는 등 사실상 영국 상륙을 포기하게 된다.

트라팔가르 해전

1805년 10월 빌뇌브 제독은 나폴리 공격을 위한 육군을 수송하기 위해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 함대를 이끌고 스페인의 카디스항에서 출항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를 만나 트라팔가르 곶 인근에서 해전을 벌이게 된다. 이때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전열함 27척과 프리깃 6척으로 구성되어 있어 연합군의 전열함 33척과 프리깃 8척에 비해 적은 규모였지만, 선원의 숙련도나 사기는 영국 쪽이 연합군에 비해 높았다고 한다. 전투가 시작되자 연합 함대는 정석대로 길게 횡대로 늘어서 포격을 준비하였는데, 영국 함대는 반대로 2열 종대를 구성하여 연함 함대를 향해 돌진하였다. 본래 범선인 전열함들은 주요 공격수단인 대포가 측면에 많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측면을 향한 상태로 항해하면서 포격전을 벌이는게 일반적이었고, 결과적으로 해상 전투의 양상은 길게 횡대로 늘어선 두 함대가 포격을 주고받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넬슨은 적진 깊숙이 돌진하여 적의 진형을 분단시키는 전술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전투 초기에 선제포격을 받을 수밖에 없고, 돌파에 실패하면 함대 전체가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단점이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연함 함대에 대해 효과적인 전술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영국 함대는 단 한 척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지 않았지만, 연합 함대는 1척이 격침되었고, 포획되거나 파괴된 것이 21척에 달했으며, 3,200명이 전사하고 7,0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생포된 이들 중에는 빌뇌브 제독도 있었다. 영국 해군은 400명의 사망자와 1,200명의 부상자라는 비교적 적은 피해로 전투를 끝낼 수 있었지만, 넬슨 제독은 치열한 전투 중에 저격당하여 전사하였다.

나폴레옹의 몰락

사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 해군의 승리는 기정사실이기도 하였는데, 이미 스페인의 '무적 함대'는 몰락한 지 오래였고, 당시 바다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은 영국 함대였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도 더 많은 함선을 동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버해협을 건너기 위한 방법으로 해상 봉쇄를 한 영국 함대를 쳐부수는 것이 아니라, 교란 작전을 통해 육군이 상륙하기 위한 시간을 벌려고 했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삼제회전)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하는 등 육전에서는 승승장구를 이어나갔지만, 결국 영국을 상대할 방법을 찾지 못했고, 1806년 영국의 해상봉쇄에 맞서 '대륙봉쇄령'을 내리는 등 사실상 영국에 무대책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이어진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1812년에 시작된 '러시아 원정'인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러시아 원정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영국을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통해 영국을 고립시키려고 했지만, 반대로 나폴레옹 이하의 유럽이 고립되는 사태를 가져왔고, 생필품 등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깨고 영국과 무역을 개시하게 되면서 원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나폴레옹은 강제로 퇴위되었고, 한때 파리로 복귀하기도 하였지만 다시 쫓겨나, 유배지인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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