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영국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모두 다스린 그레이트 브리튼의 국왕 「제임스 찰스 스튜어트」
- 역사
- 2023. 10. 25.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
'제임스 찰스 스튜어트'(James Charles Stuart)는 1566년 영국의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이고, 아버지는 '헨리 스튜어트'(단리 경)로 왕가의 방계인 단리의 스튜어트 가문 출신으로 두 사람은 사촌관계에 해당한다. 그런데 두 사람의 결혼은 사실 철저한 정략결혼으로 서로 사이도 상당히 좋지 않았는데, 메리는 본래 생후 6일 만에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이어받았으며, 이후 섭정인 어머니의 의향에 따라 6세 때부터 어머니의 친정인 프랑스에 보내져 키워졌다. 메리는 한때 프랑스의 '프랑수아 2세'와 혼인하여 프랑스 왕비의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지만, 남편이 일찍 요절하고 어머니가 사망함에 따라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는데, 이때 그녀는 현지어인 '스코트어'와 '스코틀랜드 게일어'도 하지 못해 의사소통에도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스코틀랜드는 '종교 개혁'으로 인해 개신교가 득세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던데 반해, 메리는 가톨릭 중심의 프랑스 왕실에서 자라 가톨릭 신자였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로 메리가 스코틀랜드로 복귀한 이후 끊임없이 재혼할 것을 권유받았고, 결국 1565년에 단리 경과 혼인하였는데, 이 결혼에는 혼인을 통해 스코틀랜드에서 메리의 입지를 강화하는 역할도 있었지만, 동시에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에 대한 메리의 욕심도 담겨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잉글랜드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는 혼인을 하지 않았으며, 당연하게도 자식도 후계자도 따로 두지 않았고, 엘리자베스 1세 자신이 다른 형제들이 모두 사망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사망할 경우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였던 메리가, 또 다른 유력 왕위 계승권자인 단리경과의 혼인을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 '헨리 8세'가 생전에 스튜어트 가문의 사람이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였지만, 이는 사실상 후계자가 전무한 현 상황에서는 지켜질 수 없는 법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입장에서 두 사람의 결혼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어찌 되었든 그녀는 제임스가 탄생했을 때 축하의 뜻을 전했으며, 메리의 요청에 따라 이름을 지어주고 대모가 되어주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메리와 단리 경의 결혼생활은 매우 불행한 파국을 맞았는데, 본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정략결혼이기에 서로 간에 애정이 없기도 하였지만, 단리 경은 오만한 성격에 술에 취하면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였고, 자신을 스코틀랜드의 공동 왕으로 임명해 주길 요구하는 등 안하무인이었다. 한편 프랑스 생활이 길었던 메리는 척박하고 음침한 데다 엄숙한 스코틀랜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이탈리아의 음악가 출신인 '다비드 리치오'를 시종으로 두고 가까이하였고, 결국 두 사람이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나기도 하였다. 결국 분노한 단리 경의 음모에 의해 리치오는 메리의 눈앞에서 살해되었고, 단리 경과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메리는 이때 도움을 준 보스웰의 백작 '제임스 헵번'과 가까워지게 된다. 이후 제임스가 태어나고 두 사람이 화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1567년 봄에 단리 경의 저택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그의 측근들이 모두 사망하였으며, 단리 경 본인은 인근에서 교살된 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후 메리가 제임스 헵번과 결혼하면서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결국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메리는 폐위되고 제임스가 스코틀랜드의 왕위에 올라 '제임스 6세'가 된다. 당시 제임스는 겨우 1살에 불과하였는데,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잉글랜드로 망명을 떠났기 때문에, 스코틀랜드는 유력 귀족 4명이 섭정으로서 다스리게 되었다. 이후 권력다툼으로 인해 일부 섭정이 살해되는 등 정치적 갈등이 있기도 하였지만, 제임스의 통치 아래에서 스코틀랜드는 상대적으로 평온한 시기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 메리는 결국 잉글랜드에서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반역죄로 처형되었는데, 이때 아들인 제임스가 적극적으로 구명하지 않았다고 해서 방관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메리는 제임스가 1살이던 시절에 망명을 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애정을 갖기도 힘들었을 것이며, 명목상이라고 하더라도 그녀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요청하는 탄원을 보내기도 하였다.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게 되었고, 이에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가 잉글랜드의 왕위도 계승하게 되었는데, 그는 잉글랜드에서 '제임스 1세'로 왕에 등극하게 된다. 이는 왕위 계승권상 당연한 일이기도 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끝까지 그에게 정식으로 왕위를 넘겨주지는 않았지만, 생전에 신하들이 후계자에 대해 묻자 신경질적으로 스코틀랜드의 친척이 이을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로서 잉글랜드에서 튜더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고 새로 스튜어트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으며, 제임스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를 모두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제임스는 현대에 흔히 생각하는 영국의 영토를 전부 다스린 최초의 왕으로, 그는 스스로를 '그레이트 브리튼'의 국왕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제임스는 어디까지나 각각의 왕위를 겸임하는 것으로 실제로 하나의 공동체로 묶이게 되는 것은 약 200년 정도 후의 일이다. 어찌 되었든 이처럼 제임스는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나빴다고 해야 할지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모두 차지할 수 있었는데, 대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대립과 각각의 첨예한 정치 상황, 그리고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종교 개혁으로 인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반목 등 어려운 난제를 해결해야 했다. 특히 종교 갈등은 스코틀랜드에서도 심각했지만, 잉글랜드에서도 만만치 않게 문제가 되었는데, 이전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는 개신교를 지지하여 가톨릭을 잔혹하게 탄압하였고, 반대로 '메리 1세'는 가톨릭을 지지하여 개신교를 탄압하는 등 큰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이미 시기가 상당히 지나 두 세력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가치관을 확립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제임스는 이러한 점을 노리고 양쪽을 적당히 포용하며 공존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제임스는 어디까지나 영국 국교회를 존중하며, 그 안에서 가톨릭 전통 세력과 개혁교회 세력이 적당히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부 급진 가톨릭 세력이 '가이 포크스'를 필두로 '화약 음모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제임스는 가톨릭을 가혹하게 탄압하지 않는 등 상당히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 왕권에 도전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였는데, 제임스는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왕권과 왕의 지위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였지만, 동시에 종교계가 주장하는 왕권보다 신권이 더 높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발하였으며, 의회와 반목하여 일방적으로 해산시키는 등 그가 왕위에 있었던 22년간 의회는 겨우 4번밖에 열리지 못했다고 한다.
처세술의 달인
제임스는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었던 것 같은데, 그 자신은 개신교에 더 가까웠지만,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를 나름 능숙하게 관리하기도 하였고, 그러면서도 종교계가 싫어하는 놀이문화나 축제 등을 장려하는 등 종교보다는 민중 친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킹 제임스 성경'을 출판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굳이 따지자면 개신교적 행위이기는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널리 민중들에게 성경이 보급될 수 있게 하는 종교적 업적으로, 왕이 나서서 종교를 권장하는 이러한 행위는 가톨릭도 개신교도 나서서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잉글랜드에서 통치를 하면서도 스코틀랜드를 충분히 배려하였는데, 그는 여러 차례 스코틀랜드를 방문하였으며, 스코틀랜드에서는 신하들과 격의 없이 농담을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를 방문하면 연어처럼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식의 농담을 던지고는 했는데, 이것이 빈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지라도 스코틀랜드를 항상 생각한다는 이러한 내용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또 대외적으로는 오래전부터 적대해 오던 스페인과 화해하는 정책을 취했는데, 기본적으로는 외국의 일에 개입하지 않고 거리를 두려 하였고, 덕분에 통치 중에 외국의 전란에 휘말려 국고가 낭비되는 일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제임스의 통치에 대해 의회와 귀족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민중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또 이 시기 본격적으로 북미 지역에 영국의 식민지가 건설되기 시작하였는데, 1607년에 버지니아 주에 만들어진 '제임스 타운'이 사실상 미국의 모태가 되었다. 제임스는 1625년에 59세의 나이로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워낙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그가 사실 암살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제임스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유럽의 여러 열강들 사이에서 상당히 온전하게 다스린 일종의 처세술의 달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 그 자체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결국 이후 뒤를 이은 아들 '찰스 1세'가 의회에 의해 처형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