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스페인이 대서양의 해상 패권을 두고 다툰 「칼레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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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전

신대륙의 발견과 스페인의 전성기

1492년 스페인은 그라나다를 점령함으로써 '레콩키스타'를 완수할 수 있었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항로를 개척하다가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스페인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데, 통일을 완수한 스페인은 신대륙 발견에 힘입어 엄청나게 국력이 성장할 수 있었고, 두 사건 모두 이슬람과의 분쟁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매우 공고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압스부르고 왕조'(합스부르크 가문)가 들어서면서 명실 공히 유럽 최강국의 반열에 올랐지만, 대신 기독교 국가의 선봉장이 되어 이슬람 세력의 맹주였던 오스만 제국과 최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스페인은 여러 차례에 걸쳐 십자군 원정과 신성 동맹에 참여하였으며, 한때 '프레베자 해전'에서 패배하기도 하였으나, '레판토 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등 지중해 전선에서 선전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은 이슬람 왕조뿐만 아니라 같은 유럽 국가들의 견제를 받기도 하였는데, 이탈리아의 패권을 두고 신성로마 제국과 경쟁하던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으며, 영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해적들을 이용하여 대서양에서 신대륙의 스페인 함선들을 약탈하도록 하였다.

종교 개혁과 해적

이 시기 유럽의 기독교 세력 내부에서는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마르틴 루터'를 필두로 하여 '종교 개혁'의 움직임이 커졌고, 기독교는 로마의 교황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세력과 구 기득권 세력의 타락에 반발한 개신교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헨리 8세'는 정치적 이유로 인해 영국의 국교를 개신교로 바꾸었고, 이때부터 영국과 가톨릭 국가들 사이에 종교적 분쟁이 가속화되었다. 한때 '메리 1세'가 집권하면서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하며 영국이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집권하면서 개신교 국가로서의 입장을 공고히 하였다. 또 영국은 해적 문제로 스페인과 개별적인 불화 관계에 있기도 했는데, 스페인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유명한 해적 선장인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이러한 요구를 방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국에 귀국한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해군 중장으로 임명하고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이때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막대한 재물을 바쳤다고 하는데, 이것이 스페인의 함선들을 약탈해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스페인은 더욱 기가 찼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엘리자베스 1세는 정치적 이유로 영국으로 망명하였던,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드'를 반역죄로 처형하였는데, 그녀의 죄상이 어찌 되었든 간에 그녀가 가톨릭 신자로 영국의 개신교화에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은 이를 빌미로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이 전쟁에는 교황 '식스토 5세'도 연관되어 있는데, 그는 펠리페 2세에게 영국 침공을 부추기기며 십자군세 징수를 허가했다고 한다. 당시의 가톨릭 입장에서 개신교는 어디까지나 이단이었기 때문에, 이것도 일종의 십자군 전쟁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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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함대 아르마다

이 시기 스페인의 함대는 '무적함대'(Armada Invencible)라고 불릴 정도로 위세를 자랑했으나, 드넓은 대서양에서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영국의 해적들을 상대하는 역할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스페인은 사실상 해적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해적들의 뒤를 봐주는 영국을 직접 상대하기로 한 것이다. 거기에 더해 영국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독립을 도와 스페인을 약체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스페인은 영국을 제압하기 위한 작전을 세웠는데, 그것은 네덜란드 지역에서 대규모 육군 병력을 배에 태워 영국에 일시에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사실 항해가 활성화되어 있던 당시에도 실제 전투는 육상전과 백병전이 주류를 이루었고, 상대국에 충분한 타격을 주기 위해서도 해상전만으로는 부족하였다. 그러나 이는 스페인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하였는데, 스페인은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네덜란드 인근까지 항해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영국이 장악하고 있는 영국 해협을 지나야 했다. 또 무적함대에 악재가 하나 더 있었는데, 함대 총지위관이었던 '알바로 데 바잔 후작'이 전쟁 시작 직전에 사망한 것이다. 후임으로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이 부임하였지만, 그는 해전에는 문외한이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부하 지휘관들은 공공연하게 그의 명령을 무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1588년 무적함대는 리스본 항구에서 공식적인 환송을 받으면 무사히 출항하기는 했지만, 그 직후 다시 항구로 돌아와서 보급을 받는 등 심각한 문제를 안은 채 전쟁이 시작되었다.

칼레 해전

어찌 되었든 1588년 8월 스페인 함대는 무사히 영국 해협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무적함대의 규모는 대략 108척 정도였다고 한다. 곧 영국 함대와 전초전이 벌어졌는데, 두 함대는 격렬한 함포전을 벌였지만 서로에게 피해를 주는 것에 실패하였다. 무적함대에서 두 척의 배가 파손되기는 하였지만, 이는 돌풍과 신호 오인으로 인한 자군 함선끼리의 충돌에 의한 것으로 전투로 인한 피해로 보기엔 어려울 것 같다. 이렇게 된 이유는 스페인 함대의 목적 때문이었는데, 스페인 함대는 어디까지나 상륙 작전의 호위를 위한 것으로 지상 부대와의 접선 지점까지 안전히 항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고, 이 때문에 상당히 방어적인 진형을 짜 항해하였으며, 이러다 보니 영국 함대는 쉽게 접근하여 공격하지 못하였고, 서로 멀리서 대포만 쏴대게 된 것이다. 결국 4일간 4번의 전투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별다른 성과가 없는 채로 스페인 함대는 도버 해협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반면 지상 병력은 제 때 도착하지 못하였는데, 네덜란드 지역의 반란군의 저항으로 사실상 합류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스페인 함대는 그대로 칼레 앞바다에 정박하여 지상군의 합류를 기다리게 된다. 영국 함대는 이를 호기로 보고 화공을 준비하였는데, 스페인 측에서도 화공에 대한 대비를 하였지만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등 별로 운이 좋지 못하였다. 이때 영국 함대는 총 200척 이상의 함선을 동원하였는데, 대부분의 함선이 스페인 함선에 비해 크기가 작아 전력은 비슷한 규모로 평가받는다. 영국 함대는 대형 상선을 동원하여 화약 등 인화물질을 가득 싣고 불을 붙여 스페인 진형으로 돌진시켰는데, 스페인 함대에서는 소형 선박을 이용해서 접근한 화공선을 예인하여 함대에서 멀리 떨어트리는 계획을 세웠지만, 예인 도중에 화공선이 폭발하는 등 소동이 일어나자 소형 선박의 선원들이 겁을 먹으면서 작전이 무산되게 된다. 결국 스페인 함대는 급히 닻줄을 끊고 회피기동을 시작하였는데, 이로 인해 함대의 진형이 완전히 무너져버렸고, 영국 함대가 이 틈을 타고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더욱이 이때 스페인 함대는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 못해 이미 화약이 다 떨어진 상황이었는데, 개별 함선들은 영국 함대의 포격을 받자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였고, 일부 함선들이 명령을 무시하고 무질서하게 도주하다가 좌초되거나 나포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함대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이 순간 북해에서 폭풍이 몰아닥치게 된다. 폭풍은 스페인 함대뿐만 아니라 영국의 함대도 덮쳤지만, 영국 함대는 인근의 자신들의 항구로 피난할 수 있었으나, 스페인 함선들은 이미 닻줄을 끊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그대로 폭풍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폭풍에서 벗어난 이후로도 태세를 바로 잡을 수 없었는데, 함대의 상태는 만신창이였지만 인근에 안전한 항구를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일단 본국으로 귀환하기로 하였다. 이때 스페인 함대는 북해를 통해 영국의 북쪽을 돌아나가기로 결정하였는데, 사실상 무방비나 다름없는 상태로 영국 해협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결정은 별로 좋은 결과를 불러오지 못했는데, 스페인 함대는 북해에서 두 번이나 폭풍을 만나 완전히 와해되게 된다. 이 작전에서 스페인 함대는 총 81척의 함선을 잃었다고 하는데, 그중 영국 함대와의 전투로 침몰한 배는 단 3척에 불과했다고 하니, 영국에게 졌다기보다는 자연에게 졌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무적함대의 몰락

이 해전의 결과는 스페인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지만, 이것으로 영국이 대서양을 장악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양국의 함대와 병사들은 전투보다는 폭풍과 전염병에 더 큰 피해를 입었다. 또 이듬해 영국에서는 대서양 함대를 재건하려는 스페인에 대해 선제공격을 시도하였는데, 영국은 이를 위해 대함대(Counter Armada)를 구성하여 공격하였지만, 스페인이 성공적으로 방어하면서 어떠한 성과도 이루지 못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이 전투의 피해로 인해 영국은 스페인과 대서양에서 다시 대대적인 함대전을 벌일 수 있을만한 역량을 완전히 잃게 된다. 그러나 스페인 무적함대의 몰락은 이미 시작되었는데, 칼레 전투에서 수많은 숙련된 선원과 지휘관들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재건된 함대도 1596년과 1597년에 두 차례 영국을 공격하다가 폭풍 등의 이유로 패배하였다. 결국 두 나라는 이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는데 실패하였고, 재정적인 이유 등으로 1604년에 결국 평화 협상을 맺게 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국가의 해상전력에 관한 것으로, 이후로도 영국은 여전히 해적들을 활용하여 큰 이득을 보았고, 그들은 스페인의 몰락과 영국의 부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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