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해적의 황금시대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이 된 해적 캡틴 키드 「윌리엄 키드」

반응형

초상화

한번 배신당한 해적 선장

'윌리엄 키드'(William Kidd)는 1654년경에 영국 스코틀랜드의 '던디'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확인된 내용은 아니지만 키드 본인이 주장한 것이라고 한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다른 많은 해적들과 마찬가지로 불분명한데, 성장하여서는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인 뉴욕으로 건너가 정착하였으며, 이 시기에 이미 해적선에서 선원으로 경험을 쌓고 있었다고 한다. 키드는 1689년까지 영국-프랑스 해적의 일원으로 프랑스 출신의 해적 선장 휘하에서 주로 공동의 적인 스페인 함선을 습격했지만, '9년 전쟁'이 발발한 것이 계기였는지 항해 중 다른 선원들과 공모하여 선상 반란을 일으켜 선장을 쫓아냈으며,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네비스'로 가서 정식으로 선장으로 임명되어 선명을 '블레스드 윌리엄'으로 고쳤다고 한다. 키드는 전쟁 동안 네비스를 방어하는 소규모 함대의 일원으로 있었는데, 네비스 총독이 별도의 급여를 주지 않고 프랑스에게 받으라고 하였기 때문에, 인근의 프랑스 식민지였던 '마리갈란트 섬'을 약탈하여 이를 충당했다고 한다. 키드는 곧 뉴잉글랜드 해안으로 이동하여 사략 활동을 이어나갔는데, 몇 차례에 걸쳐 적 사략선을 나포하는 등 성공적인 활동을 수행하였으나, 1691년 그가  '앤티가 섬'에 상륙하였을 때 부하였던 '로버트 클리포드'가 배신하여 배를 훔쳐 달아났다고 한다. 이때 키드는 해적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는 뉴욕으로 돌아가 부유한 미망인과 결혼하였고, 상인으로 전직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뉴욕의 정치계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정치적 목적으로 위임된 해적 선장

그러나 세상은 키드의 은퇴를 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1695년 뉴욕과 메사추세츠, 뉴햄프셔의 총독이었던 '벨로몬트 백작 리처드 쿠트'는 키드에게 편지를 보내 '토마스 튜', '존 아일랜드', '토마스 웨이크', '윌리엄 메이스' 같은 당시 유명했던 해적을 퇴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고 한다. 키드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요청에 응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많은 귀족 정치인들의 후원을 받아 새로 함대를 꾸렸는데, 그의 후원자 중에는 영국의 통치자였던 '윌리엄 3세'도 있었다고 한다. 키드는 윌리엄 3세가 직접 서명한 사략 허가 편지를 받았고, 새로운 기함인 '어드밴처 갤리'를 건조하였으며, 선원들도 직접 고르고 골라 선발하였다. 그러나 키드의 항해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는데, 그는 템즈강을 따라 출항하면서 도중에 영국 해군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해군에서는 키드 함대의 선원 대부분을 해군으로 강제로 징발해 버렸다고 한다. 키드는 적은 수의 선원들을 데리고 뉴욕으로 항해하면서도 프랑스 선박을 나포하는 등 수완을 발휘하였지만, 뉴욕에서 고용한 선원들은 대부분 출신을 알 수 없는 질이 낮은 이들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범죄자 이거나 전직 해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찌 되었든 1696년 준비를 갖춘 키드는 인도양을 목표로 잡아 항해를 시작하였는데, 그나마 새로 모은 선원들도 항해 도중 전염병으로 인해 1/3 가량이 사망하였고, 마다가스카르 인근에서는 목표로 했던 해적들을 찾는데 실패하면서 선원들의 불만이 커졌다. 게다가 모처럼 만난 선박들은 뉴욕이나 네덜란드 소속으로 공격할 수 없는 상대였고, 결국 키드와 선원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 선원 중 한 명이 키드의 손에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반응형

캡틴 키드

키드는 1698년에서야 제대로 된 약탈을 할 수 있었는데, 그가 약탈한 프랑스 국기를 단 인도 선박은 아르메니아 상인의 소유였으며, 프랑스 동인도 회사로부터 출입증을 구입했지만 선장은 영국인이었다. 이는 엄밀히 따지자면 적법한 포획이었으나 영국에서는 키드를 해적으로 선포하였는데, 당시에는 이미 9년 전쟁도 종결된 상태였으며, 키드의 출항에는 정치적인 문제도 얽혀있었기 때문에 희생양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던 키드는 이미 상당히 낡아버린 어드밴처 갤리 대신 나포한 새 배를 기함으로 바꾸려고 한 것 같은데, 선명을 바꾸기 위해 마다가스카르를 찾아갔다가 과거에 자신을 배신했던 로버트 클리포드를 다시 만나게 된다. 이때 키드가 로버트 클리포드와 화해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복수하기 위해 공격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느 게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키드의 선원들은 로버트 클리포드를 공격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키드를 버리고 그에게 합류하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더 이상 사략 활동을 이어갈 수 없는 상태에 처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대로 새 기함을 타고 카리브해로 돌아왔으나, 여기서 자신이 해적으로 선포되어 현상금이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키드는 정치적 이유로 인해 1698년에 시행된 사면 대상에도 포함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선박과 물자를 처분하여 돈으로 바꾼 다음에 자신의 구명을 위해 뉴욕으로 향했다고 한다. 이때 키드는 협상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보물의 일부를 섬에 묻어두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어 후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이나 '에드가 엘런 포우'의 '황금 풍뎅이'같은 작품이 탄생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음모와 조작된 재판

키드는 자신의 후원자였던 벨로몬트 백작을 의지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키드의 죄에 연루되는 것을 우려하였고, 1699년 결국 키드를 사면해 주겠다며 속여 보스턴으로 유인한 후 체포하여 보스턴 감옥에 가두었으며, 키드의 아내까지 체포하여 투옥하였다고 한다. 당시 영국은 '토리당'이 정권을 쥐고 있었는데, 그들은 정치적 라이벌인 '휘그당'을 실각시킬 목적을 갖고 키드를 이용하려고 하였다. 키드는 곧 본국으로 이송되어 뉴게이트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을 후원해 주었던 휘그당이 도와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끝까지 재판에 임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키드의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는데, 그의 무죄를 입증해 줄 수 있는 증거 중 하나인 항해일지는 빼돌려져 불태워졌으며, 프랑스 동인도 회사가 발행한 출입증은 재판 도중에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이 같은 부정행위에는 토리당뿐만 아니라 키드를 후원하던 휘그당도 관여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보아 휘그당의 정치인들은 처음부터 키드의 무죄를 믿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701년 결국 키드는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처음 매달렸을 때 밧줄이 끊어져 군중들이 사면을 요구했음에도 무시되었고, 몇 분 후 온몸을 꽁꽁 묶은 후에 두 번째 집행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죽은 후에도 해적들에 대한 본보기로 3년 간이나 그대로 매달아 두었다고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키드와 같이 해적 행위로 재판을 받은 그의 동료들은 모두 사면되었다. 키드가 인도양에서 정말로 법을 어기고 해적 행위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키드는 많은 해적들 중에서도 드물게 순수하게 사략 활동을 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