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명문가 「쾨프륄뤼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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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귀족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힘든 오스만 제국만의 방식

오스만 제국은 건국 초기에 잠시 두각을 나타냈던 '챤다르 가문'을 제외하고는 역사의 전면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드러낸 귀족 가문은 따로 없었다. 이는 다른 제국이나 왕국, 뿐만 아니라 공화정과 민주주의로 유명한 그리스나 로마와도 달랐다고 할 수 있는데, 현대에도 일부 국가에 아직 귀족이 남아있거나, 혹은 귀족은 아니지만 유력한 정치계, 혹은 경제계의 거물들이 과거의 유력 귀족 가문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는 것과도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오스만 제국의 특이한 국가 형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오스만 제국은 국가를 설립한 술탄 가문을 중심으로 아나톨리아 반도로 이주해온 튀르크계 군벌과 학자들의 참여로 성립되었지만, 이 튀르크계 유력자들을 중심으로한 귀족 정치체제가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구성원은 동일하지만 술탄을 중심으로한 일종의 관료체제와 비슷한 형태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 두 체제 사이의 차이는 사실 크지 않은데, 간단히 말하자면 술탄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는 힘과 야망을 가진 유력한 귀족이 있는가 없는가 정도의 차이이다. 소위 술탄의 대체제가 되지 못하는 중소 귀족들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동시에 나라의 발전을 위해 진력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술탄이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 술탄은 나름대로 귀족 세력이 대두되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한 장치도 마련하였다. 술탄은 자신에게만 귀속되는 군사력인 '예니체리'를 본격적으로 양성하였고, 이 인원들은 '데브시르메'를 통해 선발하여, 특정 집단이나 세력이 간섭하는 것을 배제하였다. '메흐메트 2세' 통치시기에는 아예 튀르크계 귀족 출신이었던 재상을 처형하고, 데브시르메를 통해 선발된 관료를 재상에 임명하면서, 본격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완전히 술탄의 관리하에 둘 수 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평민 출신의 선발된 관료들과 튀르크계 귀족들 사이에서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서, 제국에서 술탄의 권력을 더 공공하게 할 수 있었다.

데브시르메의 변질과 여자 술탄 시대

그외에도 오스만 제국에는 술탄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게하는 요소가 있었는데, 바로 술탄 가문 내부에서 적이 나타나는 것을 방지하는 방법이었다. 여러 제국이나 왕국이 분열하는 원인 중에는 친족이나, 외척의 개입으로 인한 경우가 많다. 서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결혼을 통해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였지만, 그로 인해 생긴 혈연자가 침략이나 분열의 명문이 되기도 했다. 반대로 동방에서는 국가를 쪼개서 자식들에게 상속하는 제도가 시발점이 되어, 국가가 쇠퇴하거나 멸망하기도 하였다. 이 두 문화의 가운데에 자리잡은 오스만 제국은 어느쪽과도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었는데, 술탄은 즉위하게 되면 자신의 형제들을 살해함으로서 친족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였고, 술탄은 결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외척이나 그와 관련한 세력이 대두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 데브시르메를 통해 술탄의 노예들로 구성된 정예병인 예니체리와 관료들에 의해서 국정을 운영하고, 문제가 발생할 경우 과감하게 처형해 버렸기 때문에, 술탄을 제외하고서는 특정 개인을 통한 권력의 사유화나 독점이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점들은 제도가 변질되면서 효력을 잃게 되었다. 먼저 '쉴레이만 1세'는 그동안의 전통을 깨고, 하렘에 있는 개인노예이자 첩인 '휘렘 술탄'과 결혼식을 올려 정식으로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이는 즉시 휘렘 술탄이 정치에 개입하는 결과로 나타났으며, 이를 통해 후계자가 된 휘렘 술탄의 아들인 '셀림 2세'가 사실상 통치를 방기하면서, 한동안 술탄의 어머니나 첩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여 실권을 휘두르는 '여자 술탄 시대'를 불러오게 되었다. 또 오랜 시행으로 인해 데브시르메가 변질되기 시작하였는데, 데브시르메가 지속되면서 데브시르메를 통해 선발된 관리와 예니체리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그들 자신이 하나의 세력화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데브시르메는 고위 관료가 될 수 있는 하나의 통로로 인식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데브시르메에 선발되기 위하여 뇌물을 주거나, 무슬림이 아닌 것처럼 속이는 등 폐해가 나타나면서 변질되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술탄에게 도전하는 등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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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프륄뤼 가문의 득세

이러한 상황에서 '쾨프륄리 가문'이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보면 우연에 가깝다. '아흐메트 1세'부터 '메흐메트 4세'까지 3대에 걸쳐 오스만 제국의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하며, 서유럽에서 여제라고까지 불린 '마흐케이페르 쾨셈 술탄'이 같은 여성 술탄인 메흐메트 4세의 어머니 '투르한 하티제 술탄'과의 권력 싸움에서 사실상 암살에 가까운 형태로 퇴장하게 되었는데, 하티제 술탄은 당시 20대의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혼란스러운 오스만 제국을 통치할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이때 하티제 술탄이 내린 결단도 남달랐는데, 그녀는 끝까지 권력을 쥐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고, 대신 당시 고령이었지만 청렴하고 능력있는 것으로 평판이 자자했던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샤'를 대재상으로 임명하여 통치를 돕도록 하였다. 메흐메트 파샤는 통치를 돕는 대가로 막강한 권한을 요구하였고, 이후 쾨프륄뤼 가문이 오스만 제국의 재상직을 독점하게 되었다. 1656년부터 쾨프륄뤼 가문이 득세한 시기를 '쾨프륄뤼 시대'라고도 부르며, 쾨프륄뤼 가문은 오스만 제국 역사상 가장 두드러지는 가문이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술탄의 여성들은 실권을 잃게되어 여자 술탄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된다. 쾨프륄뤼 가문 출신의 재상들은 밖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정복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안으로는 제국의 문제들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이미 이익집단화 된 보수세력의 반발로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대재상으로 임명된 메흐메트 파샤는 1661년까지 임기를 지냈으며, 이후 '쾨프륄뤼 파즐 아흐메트 파샤'가 이어받아 1676년까지 대재상을 지냈고, 1683년까지는 쾨프륄뤼 가문의 사위인 '메르치폰루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대재상을 맡아 계속해서 오스만 제국을 주도하였으나,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제2차 빈 공방전'의 패배로 인해 처형당한 이후부터 쾨프륄뤼 가문 출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대재상에 임명되었다. 이후 '대 튀르크 전쟁' 동안 '쾨프륄뤼 다마드 아바자 시야부쉬 파샤'가 임명되었으며, 1689년에 대재상으로 임명된 '쾨프륄뤼 파즐 무스타파 파샤'는 1691년 '슬렌카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후로도 '쾨프륄뤼 암자자데 하즈 휘세인 파샤'와 '쾨프륄뤼 자데 다마트 누만 파샤'. '쾨프륄뤼 압둘라 파샤'가 대재상을 지냈으며, 쾨프륄뤼 가문은 현재까지도 이어져서, 튀르키예의 외무장관을 역임한 '메흐메트 푸아트 쾨프륄뤼'가 그 후손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튀르키예와 미국에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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