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서방 원정 「제1차 빈 공방전」
- 역사
- 2023. 6. 24.
헝가리를 둘러싼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분쟁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쉴레이만 1세'는 동방과 서방으로 원정을 다니면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여 제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와 충돌하였는데, 1526년에 벌어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의 왕 '러요시 2세'가 오스만 제국에 패배하여 전사하게되었다. 당시 러요시 2세는 20대의 젊은 나이로 후계자가 없었는데, 여기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대공인 '페르디난트 1세'가 끼어들면서,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은 '카를 5세'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국왕이며, 독일과 이탈리아에 걸쳐, 아무튼 열거하기 힘들정도로 매우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러한 뒷배경을 가진 페르디난트 1세는 자신이 러요시 2세의 여동생과 결혼하였으며, 자신의 여동생은 러요시 2세와 결혼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가 러요시 2세의 권리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헝가리에 개입하였다. 또 생전에 러요시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왕위를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기겠다는 말을 남겼다고도 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문제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은데, 헝가리의 귀족들이 페르디난트 1세의 반발하여 내분이 일어나면서, 공이 쉴레이만 1세에게 넘어가게 된다. 주로 동부 '에르데이' 출신의 귀족들이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의 왕이 되는 것에 반대하여 유력자였던 '서포여이 야노시'를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이에 1527년 페르디난트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침입하여 수도 '부다'를 비롯하여 여러 지역을 점령하였다. 야노시는 이에 대적할 힘이 없었고, 결국 오스만 제국을 찾아가 속국이 되는 조건으로 도움을 요청하였다. 쉴레이만 1세는 이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여 헝가리에 개입하기 시작하였으며, 1529년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로 원정을 떠났다. 이 원정에 쉴레이만 1세가 동원한 군대의 규모는 12만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되며, 혹자는 30만명이라고 하기도 한다. 원정을 시작한 오스만의 대군은 합스부르크군을 헝가리에서 몰아내고 부다를 점령하였으며, 쉴레이만 1세는 이참에 헝가리 문제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는지, 오스트리아의 빈을 향해서 진군을 시작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 이러한 보고를 받은 페르디난트 1세는 급히 프라하로 피신하였으며, 형인 카를 5세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카를 5세는 이탈리아 지역에서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지원군을 보내지 못하였고, 빈의 수비대는 약 23,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빈의 수비대는 술탄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성벽을 보강하고, 일부 성문을 폐쇄하는 등 착실하게 농성준비를 하였다.
원정의 근본적인 문제와 패배
쉴레이만 1세의 이 원정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너무 멀리까지 왔다는 것이다.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이어진 원정은 필연적으로 보급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긴 원정으로 인해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지고 지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환경의 변화가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는데, 원정을 시작할때부터 내린 많은 비로 인해 화포와 화약을 비롯하여 많은 물자를 잃었으며, 이에 적응하지 못한 많은 낙타들이 죽고, 병사들 사이에서도 전염병이 돌았다. 게다가 오스만의 대군은 빈에 도착하여 도시를 포위하였지만, 그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시파히 기병'들은 공성전에서 별 도움이 되지도 못하였다. 오스만군은 성벽에 포격을 하고, 공성용 땅굴을 파는 등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이미 보강된 성벽으로 인해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그 와중에 또 큰 비가 내려 애써 파놓은 땅굴이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계속되는 보급문제로 탈영하는 병사들이 속출하였고, 술탄의 정예병인 '예니체리'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쉴레이만 1세도 더는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고, 결국 오스만군은 빈을 포기하고 퇴각하기로 하였다. 이 퇴각은 10월에 이루어졌는데, 설상가상으로 문자 그대로 많은 눈이 내렸고, 퇴각하던 대열이 흐트러지면서 또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합스부르크군도 여러가지 문제가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 곧바로 반격하기는 어려웠다.
쉴레이만 1세의 실패한 야망
쉴레이만 1세는 빈 공략에 실패한 것이 상당히 아쉬웠는지, 1532년에 다시 군대를 모아 빈을 목표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원정 도중에 너무 시간을 지체하였고, 전보다 상황이 나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원군이 빈에 먼저 도착하면서, 오스만군은 방향을 돌리게 된다. 이후로도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지역에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여러차례 충돌하였지만, 쉴레이만 1세는 다시 빈에 도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