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그리스의 유명인 해운왕 「아리스토틀 오나시스」
- 역사
- 2023. 1. 5.
해운왕 오나시스
'아리스토틀 오나시스'는 1906년 '오스만 제국'의 '스미르나'(현재의 이즈미르)의 그리스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정식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오나시스'로 누가 어디서 봐도 그리스 사람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가 10대일 무렵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독일과 함께 연합국과 맞서 싸웠고, 전후 '세브르 조약'을 맺어 스미르나는 그리스의 영토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담배상인으로 꽤 부유한 집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튀르키예' 독립전쟁에 휘말려 전재산을 잃었고, 1922년 스미르나가 튀르키예에 의해 점령되어 '로잔 조약'을 통해 튀르키예에 반환되면서 그리스 본국으로 탈출하였다. 그는 곧 남미로 이주하여 우루과이, 아르헨티나에서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다가, 담배수입업을 하면서 다시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1931년에 해운업을 시작해 중고선박을 유통하며 돈을 모았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전쟁 특수를 통해 더욱 큰 부를 가지게 된다. 1946년에는 그리스의 해운왕이라고 불리던 '스타브로스 리바노스'의 딸 '아시나 리바노스'와 결혼하여 명실공히 그리스의 해운왕을 계승하게 된다. 이후 사업을 확장하여 1957년에는 그리스의 항공회사인 '올림픽 항공'을 설립했다. 1960년에 아내와 이혼하였으며,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 알렉산더와 딸 크리스티나를 두었지만, 1973년 아들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후에 항공회사을 정부에 넘기게 된다.
악명 높은 플레이 보이
오나시스는 상당히 수완이 좋은 인물 인것 같은데, 전쟁 특수를 누리며 재산을 모으기는 했으나, 한번 넘어진 일가를 일으키기도 했고, 여러 여성과 사이에서 추문이 있었다. 1957년 베네치아에서 열린 파티에서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오페라 가수인 '마리아 칼라스'와 사귀게 되었다고 하는데, 아마 이혼의 사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유부녀였던 칼라스는 오나시스와 함께하기 위해 오랜 기간 소송을 거쳐 남편과 이혼했지만, 오나시스는 칼라스와 동거하였지만 결혼하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도 많은 여자들과 사귀고 있었던 것 같으며,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의 처제인 '리 라지윌'과도 사귀었다고 한다. 라지윌은 오나시스와 결혼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언니인 전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에게 오나시스를 소개했다. 그러나 오나시스는 케네디 대통령 사후 1968년 재클린과 재혼하였고 라지윌은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재클린과 의절하였다고 한다.
오나시스와 재클린
재클린은 전 남편이었던 사망한 케네디 대통령과 같이 미국인들에게 매우 사랑받았는데, 당대의 갑부이자 유명한 사업가인 오나시스와 재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인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당시 오나시스는 이미 칼라스와의 스캔들로 유명했기 때문에 상당한 가십거리가 됬을 것이다. 오나시스와 재클린은 오나시스가 소유한 개인 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그의 섬인 '스콜피오스'와 뉴욕을 오가면서 살았다고 하는데, 재혼한 지 얼마 안돼서부터 둘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오나시스는 재클린의 지나친 사치 때문에 화가 났고, 다시 마리아 칼라스와 만나기 시작하면서, 재클린은 그의 바람기로 인해서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오나시스와 재클린은 이혼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도중 1975년에 오나시스가 암으로 사망하였다. 오나시스의 유산은 무려 10억 달러가 넘었다고 하는데, 그는 유언에서 그 모든 재산을 유일한 자녀인 전처와의 딸 크리스티나에게 남긴다고 하였다. 하지만 재클린은 유산 분배에 관한 소송을 걸어 1억 2500만 달러를 받아냈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케네디 암살' 사건과 연결 지어져 많은 소문을 만들어 낸 것 같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범으로 지목된 '리 하비 오즈월드'는 1963년 체포된 후에 호송 중 '잭 루비'에게 살해되었고, '잭 루비' 또한 1967년 감옥에 수감된 상태에서 사망하였다. 그로 인해 케네디 암살의 배후에 큰 힘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있고, 재클린이 자신과 아이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갑부인 오나시스에게 의탁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로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미국에서 케네디 사후 그의 부인과 아이들이 제거되어야 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비약이 심한 것 같다. 한편 오나시스와 가장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마리아 칼라스는 유산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다만 오나시스의 여동생이 그녀를 배려하여 약간의 기념품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그의 딸 크리스티나는 1988년 사망하여 그 재산은 다시 오나시스의 손녀가 상속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