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의 12대 황제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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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르바

고령의 나이로 취임한 황제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가 황제로 취임한 것은 그가 66세 무렵으로,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가 96년 암살되면서 원로원의 지명을 받았다. 그가 도미티아누스 황제 아래에서 집정관을 지냈던 것과 암살 당일날 다음 황제로 지명되었다는 점에서 그가 암살에 관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의 황제 취임 전후의 행적을 봤을 때 그러한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의 가계는 이탈리아 귀족출신으로 대대로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라는 같은 이름을 계속해서 사용하였는데 증조부가 아시아 속주의 총독이기도 하며, 조부도 집정관에 취임하는 등 정치권력의 테두리 안에 있었으며, 그 본인도 집정관에 두 번이나 취임하고 있기는 하나, 당시 로마 사회에 큰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는 집단의 하나였던 로마 군단에 종군한 적이 없다. 그가 암살을 통하여 성공적으로 정권을 이양받는다 하더라도, 로마 내외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는 군부세력이 동의를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네로' 황제 시절에 반란 음모를 저지하는데 도움을 주거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친분이 있어 그의 아들인 암살당한 도미티아누스 황제와도 친분이 있기도 하는 등 당시 황제를 암살해야 할 만한 큰 이유가 눈에 띄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미 고령이었음에도 아이가 없었고, 그의 친척들 중에서는 황제의 후계자가 될 수 있을만한 적합한 공직에 있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로마 원로원을 통해 황제로 선포되었고, 이에 따라 로마에서는 '플라비우스 왕조'가 막을 내리고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로 이어지게 된다.

원로원과 황제

결론적으로 네르바를 황제로 만들어낸 것은 원로원이 되는데, 이 때문에 원로원에서 도미티아누스 암살을 주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로 연결된다. 로마는 왕정 시절부터 공화정 시절에 걸쳐서도 원로원은 항상 일인독제에 대해 견제했었고, 이는 사실상 일인독제체제로 들어선 제국 시절도 마찬가지 였다. '아우구스투스' 즉위 이후 사실상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기관에 불과했던 원로원이었지만, 로마가 혼란스러워지고 통치자가 부재 시에는 언제든지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때문에 원로원이 암살 등의 수단을 통해서 황제를 견제하고, 황제는 국가 반역죄를 통해서 원로원을 압박하는 구도가 성립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암살 당일에 다음 황제를 세운 원로원은 다음날 암살된 황제인 도미티아누스를 '기록말살형'(담나티오 메모리아이)에 처하기로 결정한다. 기록말살형은 말 그대로 로마의 모든 기록물에서 당사자와 관련된 기록을 삭제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로마에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형태의 큰 형벌이다. 이는 단순히 역사 기록뿐만 아니라 모든 그림 및 조각상, 건축물과 구조물 등에서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다만 이로 인해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의 네르바에 관한 기록도 다수가 삭제되었다고 한다.

로마의 황제 네르바

로마는 일단 굳건하게 자리잡은 황제가 있으면 잘 운영되는 편이지만, 황제의 위치가 불안해지면 로마 전체가 금방 불안에 휩싸인다. 먼저 속주 총독이나 해외 원정군 사령관들이 몇 차례 전례가 있었던 것처럼 반란을 일으키거나 군사를 돌려 로마로 쳐들어올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또한 로마 원로원이나 로마 시민들에 의해서 암살이 일어나거나, 친위대의 주도로 황제가 바뀌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네르바처럼 암살에 의해 황제가 바뀌는 시기라면, 로마 내외의 정세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요동치기 마련이다. 네르바처럼 행정형 관료가, 특히 실제로 암살에 관여하지 않고 추대되었다면, 본인이나 추대한 세력이나 모두 이런 혼란을 잠재우는데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네르바는 취임이 되자 새 황제자리와 로마를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로마에는 저명인사들이 죽으면 그의 유산 중 일부를 시민들에게도 상속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실상은 상속자가 그 저명인사의 정치적 입지의 공식적인 계승자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본인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금품살포행위였다. 이와 비슷한 풍습이 로마 제국 시대에도 계속되었고 네르바도 즉시 로마 민중과 군대에 제물을 풀었다. 원로원 의원들이 공직에 몸 담고 있는 동안 사형에 처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여 원로원의 지지기반을 다졌으며, 정치적인 이유로 투옥당하거나 추방당한 많은 이들을 사면하였다. 빈곤자들을 위하여 토지분배 정책을 가다듬고, 세금을 면제해 주는 등의 정책도 펼쳤다. 뒤로는 종교 제물, 경기, 경마 등을 폐지하고, 토미티아누스의 재산을 처분하는 등 재정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그가 황제로 취임한 시기에 로마가 상당한 혼란에 맞닥뜨렸음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군사반란도 일어나지 않는 등 상당한 수완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그는 로마가 이런 혼란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여 황제 취임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고, 원로원에서 이런 수완을 기대하고 그를 황제로 추대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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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계 문제와 로마의 군단

취임할때 이미 고령에 정치적 영향력을 뒷받침해 줄 세력도 불분명한 데다, 뒤를 이어 줄 자식도 없었던 네르바는 사실상 임시 황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네르바의 노력으로 본격적인 내란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군부가 네르바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군부 내에서는 전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지지세력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고, 황제 암살세력의 처분에 대한 문제와 다음 황제자리 승계를 놓고 네르바와 충돌하게 된다. 군부세력은 암살 공모자들을 처형하기를 원하고 있었으나 네르바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가 실제 공모자 중 하나였는지 아니면 단순히 그들의 처형이 로마에 혼란을 부추길 수 있어서 반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결정은 그의 통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암살 공모 혐의로 친위대 사령관에서 해임된 '티투스 페트로니우스 세쿤두스'를 대신하여 '카스페리우스 아일리아누스'가 취임하였는데, 그가 친위대를 이끌고 황궁을 포위한 후 네르바 황제를 인질로 잡았다. 사실상 암살만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인 군부의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네르바를 인질로 잡은 이들은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의 주모자들의 처분과 네르바 사후에 당시 군부에서 인기가 있던 게르마니아 방면 군단장인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정할 것을 요구했다.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네르바는 모든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그의 정치적 입지는 완전히 없어져 사실상 실각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몇 개월이 지난 98년 네르바는 뇌졸중으로 인해 쓰러졌으며, 그 후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가 즉위한 지 불과 1년 4개월 만에 통치가 끝나게 된다.

로마 제국의 오현제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중에 네르바를 시작으로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다섯 황제를 오현제라고 부른다. 이는 고대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현명한 5명이 황제라는 의미이다. 네르바의 경우 혼란한 시기 자칫 내전으로 무너질 수도 있었던 로마 제국을 안정시켜 다음 황제에게 무사히 넘겨주었다는 점은 평가할 수 있겠으나, 그의 통치가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일단 그의 황제 임기는 1년 4개월로 뚜렷한 정책을 세우거나 업적을 쌓기에는 매우 짧다. 그리고 그는 고령에 후계자가 없는 몸으로 원로원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 앉은 바, 특정 세력에 의해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실제로 집권 말기 군부에 의해 정책 결정을 번복하였으며, 강제적으로 후계자를 선임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병사하였지만, 사망하기 전에 이미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승계 흐름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그가 정책적으로 황제와 원로원 간의 융화를 도모하고, 어떤 형식이었든 간에 그를 승계하여 집권한 트리야누스 황제가 결과적으로 로마 제국을 현명하게 통치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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