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의 13대 황제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 역사
- 2023. 1. 6.
로마에게 환영받은 황제
로마 제국은 크게 4개의 구성원이 주체가 되어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구성원은 바로 황제인데, 로마의 황제는 동양의 황제와 다르게 문자 그대로 만인지상으로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일인독제체제로 로마의 실질적인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이 있는 것은 맞으나, 그 자신이 로마법이 테두리 안에 존재했으며, 자신을 견제하는 다른 세력과의 관계를 고려하며 집권하여야 했다. 두 번째는 원로원인데 로마 왕국시절부터 존재해 왔던 유서 깊은 기관으로, 로마 제국이 성립되고 나서 실질적인 정치권력에서 멀어지긴 했으나, 로마의 정치적 유력자의 모임이었던 만큼 그 영향력 자체가 없어지진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적 지휘와 재산, 인맥 등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고, 그러한 수단으로 정적의 암살도 감행할 정도의 실행력도 갖추고 있었다. 세 번째는 바로 로마 군단이다. 로마 군단은 수많은 전쟁을 치른 로마에 있어서 필수적인 동반자이자 동시에 강력히 견제해야 할 적이기도 했다. 로마의 군단은 그 군단장과 함께 적게는 10년에서 길게는 30년까지도 같이 복무하였고, 군단장이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한 수단으로도 이용하여, 군단병에게 사제나 재정을 이용하여 금품을 살포하거나 장래를 약속하는 등, 강력한 군사집단이면서 동시에 정치집단이기도 했다. 실제로 로마 군단을 이용해 내란을 일으키거나 로마시가 직접 포위된 적도 있으며, 제국에 와서는 황제 암살이나 옹립 등 정치적 사건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바로 로마 그 자체인 로마 시민들이다. 그들은 황제이자, 원로원 구성원이며, 로마 군단에 소속되어 있고, 또한 로마에 살고, 로마를 운영하며, 로마를 향유하는 사람들이다. 로마의 그 어떤 정치적 주체도 로마시민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존재자체가 불가능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구심점은 너무 약하고 선동되거나 규제되는 등 흔들리기 쉬운 존재이다. 사실상 이들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황제야 말로 유능한 황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제국이 제 13대 황제인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는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의 양자로, 네르바가 사망하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를 예정이었지만, 당시 그는 '다키아 전쟁'에 참전하고 있었다. 다키아는 오늘날의 루마니아 근처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즉위가 결정되고 로마로 돌아갈 때까지 약 1년 반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이는 당시 트라야누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는데, 당시 로마의 정치는 로마시를 중심으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에, 긴 시간 동안 로마에서 멀어진 상태에서 있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다른 정치적 주체에 의해 고발당하거나 규탄당해 부재상태에서도 얼마든지 로마에서 축출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군단의 사령관으로 군부의 지지에 의해 차기 황제로 낙점될 정도로 군부의 지지가 튼튼했기 때문에, 원로원이나 다른 정치주체들이 내전의 위험을 감수한 채로 그에게 정치적 공세를 펼치기에는 어려웠으리라 생각된다. 그도 그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황제로 즉위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와서 성문으로 들어갈 때 말에서 내려서 걸어 들어갔다고 한다. 이미 황제로 정해져 있던 그가 이러한 방식으로 로마의 일개시민으로서의 자신을 나타냄으로써, 강력한 전제정권을 우려하는 원로원의 의심을 누그러트리고, 황제이자 동시에 같은 로마시민으로서 행동함으로 일반 시민들의 인기를 끌어내고 있다. 트라야누스는 이후에도 화려한 궁전을 세우지 않고,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시내를 이용할 때는 항상 도보로 이동하고, 한 달에 두 번 열리는 원로원 회의에도 반드시 참석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전대 황제인 네르바가 선포한 것을 계승하여, 국가반역죄를 이용하여 원로원을 핍박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이어갔다. 그는 겸손을 통해 로마의 정치세력들의 지지를 얻어 대다수의 로마 구성원들에게 현명한 황제로 환영을 받았다.
로마 제국의 팽창
트라야누스는 군부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것처럼, 군사적으로 상당히 뛰어났던 인물이다. 그는 두번에 걸친 다키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다키아 지방을 로마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 후 당시 로마의 종속국이었던 '나바테아 왕국'을 병합하였으며, '파르티아 전쟁'에서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함락시켰다. 당시 로마는 제국 수립 이후 영토 확장에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트라야누스 시대에 이러한 정복전쟁을 통해 로마 제국 사상 최대의 지배영역을 구축하게 된다.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한 로마 제국은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 프랑스, 잉글랜드, 튀르키예, 메소포타미아 지방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을 지배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파르티아 원정 도중 병을 얻어 로마로 귀환하다가 117년 '킬리키아'의 '셀리누스'(현재 튀르키예 남부의 가지파샤)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사후 그의 조카였던 '하드리아누스'가 승계하게 된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정식으로 트라야누스의 양자로 입양되지 않았으며, 그때까지 후계자로 지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트라야누스의 혼란한 사망 환경 때문에 비추어, 트라야누스가 아닌 그의 부인이나 측근이 간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황후가 정치적 일에 간섭하는 것에 대한 로마인들의 불만에서 나왔다고 하기도 하는데, 그 진실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황제 트라야누스
기본적으로 국가에 소속된 국민들은 자신들이 국가가 다른 나라에 비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더 우월한 모습을 보여주면 만족하는 심리가 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시대때도 그렇지만 내부적으로 경제나 산업이 좀 흔들리거나, 개인의 생활이 불안하더라도, 국가라는 소속단체가 큰 힘을 발위하면 그 소속감에 의해서인가, 불만이 수그러드는 것 같다. 그러나 트라야누스는 대외적으로 로마의 큰 위상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활발한 통치를 통해 로마 시민들이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많은 공공시설들을 정비하고 설립하였는데, 트라야누스 목욕탕, 트라야누스 포룸, 트라야누스 원주 같은 건축물들이 지금도 일부 남아있다고 한다. 화폐 가치를 조정하여 공공 및 군사 관련 지출을 비용을 줄이려고 노력하였고, '알리멘타'라는 복지정책을 펼쳤는데, 이탈리아 전역의 고아나 가난한 아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정책으로 식량과 기금을 원조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도 제공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로마 제국이 팽창과 동시에 전체 인구에서 이탈리아내 로마 시민의 비율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어,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저출산 대책이 아니었나 하는 견해도 있다. 트라야누스는 즉위 전부터 군부로부터의 대단한 지지를 받으며, 이 때문에 편중된 황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상당히 받은 것 같은데, 실제 집권한 후에 군부와 원로원 간의 균형을 잘 조절하며 정책을 펼쳐, 후에 로마의 현명한 황제인 '오현제'의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