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10대 대통령 「존 타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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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버지니아의 유력자

'존 타일러'는 1790년 미국의 버지니아 주 찰스시티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타일러의 집안은 버지니아 초기 정착자 중 하나로, 그의 아버지도 대농장을 소유한 매우 부유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 '존 타일러'는 '토마스 재퍼슨'의 대학 친구이자 룸메이트 였으며, 버지니아 하원 의원의 의장, 버지니아 주지사, 버지니아 동부 지역의 판사를 역임하였다. 타일러는 가정교사에게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고, 이후 '윌리엄&메리 대학'에 입학하였으며, 졸업하고 나서는 아버지 밑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1809년에는 19세의 나이로 버지니아 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당시에 그의 아버지는 버지니아 주지사 였으며, 타일러는 사실상 그의 영향력 아래에서 여러 특혜를 누렸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정치생활을 시작하여 1811년 버지니아 주 하원의원으로 의회에 진출하였다. 1812년에 '미영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에는 영국이 버지니아 주의 햄튼을 점령하였는데, 그는 이에 맞서기 위해 민병대를 조직하여, 대위 계급으로 이들을 지휘하기도 하였으나,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두 달 후에 해산하였다. 1816년에는 버지니아 주의 연방 하원에 공석이 생겼는데, 그는 이 자리에 도전하여 선출되었으며, 이때 민주공화당에 입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타일러는 은행 철폐와 노예제 문제에서 소위 비주류에 속했고, 자신의 의견이 의회의 결정에 별다른 영향을 못 미친다고 생각하자, 1821년 건강을 이유로 사임하였다. 타일러는 한동안 법률 업무에 매진하였지만, 이내 다시 정치로 돌아와 1823년에 버지니아 주 하원의원에 선출되었고, 1825년에는 버지니아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그는 1827년까지 주지사직을 계속 수행하였는데, 도중에 정치적 요구에 의해 상원의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당시는 '존 퀸시 애덤스'와 '앤드루 잭슨' 사이에서 민주공화당이 분열하고 있었는데, 타일러는 둘의 정책 모두 반대하였지만, 애덤스의 정책을 더 싫어하였기 때문에 1828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잭슨과 함께하였다. 그러나 잭슨이 높은 관세정책을 유지하자 이내 그와 갈라섰고, 임기 내내 잭슨과 갈등을 겪었다. 하지만 타일러가 잭슨의 결정을 지지한 것도 있는데, 그는 잭슨이 은행을 공격한 것에는 찬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효화의 위기'에 잭슨이 군대를 파견하는 등 민주당과 자신의 의견 사이에 간극이 커지자, 타일러는 민주당을 탈당하고 휘그당에 합류하였다.

선거없이 뽑힌 대통령

1836년 타일러는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러닝메이트로 휘그당에서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당시 잭슨의 인기를 등에 엎은 '마틴 밴 뷰런'을 이길 수 있을만큼의 힘이 휘그당에 없었기 때문에 낙선하고 만다. 이후 타일러는 다시 한번 정치계에서 은퇴할 생각을 했던 것 같지만, 이내 다시 돌아와서 1838년에 버지니아 주의 하원의원을 지냈다. 1837년부터 미국에서 공황이 터지면서 밴 뷰런의 인기는 급락하였기 때문에, 1840년에 벌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해리슨은 무난하게 당선될 수 있었고, 이때도 러닝메이트로 나간 타일러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부통령은 크게 하는 일이 없는 자리 였기 때문에, 타일러는 선거가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있었다. 그러나 해리슨이 취임식 직후 병을 얻어 임기 한달만에 사망하면서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타일러는 해리슨의 공식 사망소식을 들은 직후 워싱턴으로 출발하였고, 백악관에 도착한 그는 자신이 대통령임을 분명히 하였다. 사실 당시에는 대통령이 사망할 경우 부통령이 그 권한을 이어받는다고만 되어있었지, 한번도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각의 인사들 사이에서 그것이 대통령 대리가 되는 것인지, 대통령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타일러는 자신을 대통령 권한대행이나 부통령이라고 부를 경우 업무를 거부하겠다는 엄포를 놓아 대통령 직을 차지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공식적인 선거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된 것으로, 타일러는 대통령의 사망에 의해 부통령에서 대통령이 된 최초의 인물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후에 수정헌법 25조에 따라 부통령이 대통령이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통령이 된 타일러는 전임인 해리슨이 임명한 내각 인사들을 그대로 유임시켰지만,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주도권을 쥐려고 했기 때문에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의회에서도 반복되었고, 결과적으로 휘그당이 발의한 은행 정책에 대해 두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타일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임기 5개월 만에 내각 인사들은 국무장관을 제외하고 모두 사임하였고, 타일러가 본래 민주당하고도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민주당과 휘그당 모두에게 외면받게 되었고, 휘그당에서는 타일러가 사임하기를 바랬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는 당에서 재명당했다. 이후로도 관세를 둘러싸고 타일러는 또 의회와 충돌하였고, 휘그당은 하원을 통해서 미국 최초로 대통령 탄핵을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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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고부동한 신념

타일러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세미놀 전쟁'이 막을 내렸고, 미국은 청나라와 '왕샤 조약'을 맺어 통상을 개시하기도 하였고, 타일러는 특히 텍사스를 합병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텍사스 합병은 멕시코와의 문제도 있지만, 당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노예제에 대한 문제로 의회의 동의를 얻기 어려웠다. 타일러는 1844년의 대통령 선거를 이용하여, 사실상 정치적 협박이나 다름없는 형태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고, 그가 임기를 마치기 거의 직전에서야 텍사스 합병 결의를 통과시킬 수 있었다. 퇴임 후 그는 정치계에서 은퇴할 수 밖에 없었고, 자신의 농장을 관리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1852년에 다시 민주당에 합류하였고, '남북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에 이를 중재하기 위한 활동을 하기도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이 협상은 결렬되었으며, 그는 여기서 남북의 분리를 지지하였다. 1861년에는 '남부 동맹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이듬해인 1862년에 의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정치생활을 살펴보면 그는 주로 비주류에 속했는데, 그에 반해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정치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남들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좋게 말하면 정치적 신념이 확고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독선적인 모습만 보여준다. 결국 그는 아마 운 좋게 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고립는 결과를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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