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오대십국시대에 만주를 다스린 요나라의 태조 「야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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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거란을 건국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872년경 '거란족'을 구성하고 있던 부족 중 하나인 '질랄부'의 부족장 '야율균덕식'의 손자로 태어났다. 당시 거란족은 8개의 큰 부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었는데, 그 중에 요련씨가 전체 부족을 통솔하고 있었다고 한다. 야율아보기가 아직 어렸을때 거란족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야율균덕식이 살해당하고, 아버지인 '야율살랄적'과 형제들이 모두 달아나는 일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한동안 야율아보기의 할머니가 그를 숨겨서 키우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다시 돌아온 야율살랄적이 뒤를 이어 질랄부의 부족장이 되었고, 야율아보기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족장이 되었다. 또 그는 거란족 부족들 간에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우월'이라고 불리웠는데, 당시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의 실질적인 이인자의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거란족 내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를 차지하였음에도 멈추지 않았는데, 907년에 음모를 꾸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부족장들을 살해하고, 나머지 부족장들의 지지를 받아 모든 거란족을 통솔하는 '가한'의 자리에 올랐다. 야율아보기가 장악한 거란족은 이후 활발한 정복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주변의 여진족들을 공격하여 세력을 약화시킨 뒤 908년에 요동지역 남쪽까지 진출해 중원 일대로 진출 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 '24사' 중 하나인 '요사'에 따르면, 거란의 태조가 20여년간 힘들게 싸워 발해의 요동 지역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거란족이 요동 지역을 장악하면서 결과적으로 발해는 중국과 연결되는 교역로가 끊기게 되었다. 916년에는 본격적으로 거란족의 국가를 세웠는데, 요하 상류에 있던 '임황'을 도읍으로 하여 국호를 '거란'이라고 하였으며, 스스로 황제를 칭하였다. 여담이지만 그가 거란국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라의 태조인 이유는 후에 황위를 이은 아들 '야율요골'(야율덕광)이 국호를 '대요'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거란족의 모든 부족들은 사실상 질랄부 아래에 복속되었고, 여러 부족에 의해 선출되던 자리인 가한을 종신 세습제로 바꾸어 실질적으로 군주제의 형태를 띠게되었다.

중원에 대한 야욕

요나라가 건국된 그 해에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원정을 떠나 '동궐', '탕구트', '사타족'을 평정하였으며, 중원으로 침공하여 화북지역에서 위세를 떨졌다. 당시에 중국은 '당나라'가 멸망하고, '주전충'이 '후량'을 건국한 시기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거란족의 침입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 했다. 이때 야율아보기는 중원의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그는 한자를 본따 '거란 문자'를 창제하였으며, 농업을 장려하여 유목민족이 아닌 정주민족의 국가로서 요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또 주위 여러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도록 하는 등 외교적인 행보도 보였는데, 922년에는 당시 막 건국된 '고려'에도 사신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중원의 세력가였던 '이존욱'의 견제로 한동안 중원에서 성과를 보지 못하고 만주지역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율아보기는 중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것 같은데, '후당'이 건국되어 사신들이 도착하자, 그들에게 황하 이북의 땅을 넘겨주는 절대 중원을 침공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이런 제안은 거부되었고, 그러자 정주와 유주만 넘겨줘도 좋다고 조건을 낮추었지만, 또 거부되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는데, 야율아보기는 한 고조 '유방'과 그의 재상 '소하'의 이야기를 매우 좋아해서, 어느날 요나라 황실의 성씨를 야율씨에서 유씨로 바꾸어버리고는 다른 부족의 성씨는 모두 소씨로 바꾸도록 했다고 한다. 이러한 조치는 큰 반발을 샀기 때문에 결국 황제의 친족의 성은 다시 야율씨로 바꾸었는데, 나머지 부족들은 그대로 소씨를 쓰도록 했다. 이 때문에 요나라 건국 이후에 거란족 사람들은 모두 야율씨 아니면 소씨가 되었다고 한다. 중원에서 밀려난 야율아보기는 다시 만주지역 일대로 활동장소가 옮겨가게 되는데, 그는 서쪽의 몽골 지역을 평정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924년에 거란족들이 요동 지역에서 발해인들을 공격하여 포로로 잡아갔기 때문에, 당시 발해의 왕 '대인선'이 군사를 일으켜 요나라를 공격하여, 요주자사 '장수실'을 죽이는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야율아보기는 서쪽이 어느 정도 정리 된 925년 말에 본격적으로 발해침공을 시작하여, 한달여만인 926년 초에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가 점령되어 멸망하였다. 야율아보기는 발해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따로 동쪽의 거란국 이라는 의미의 '동란국'을 세웠지만, 빠른 전쟁을 위해 전선을 우회하여 수도만 점령했기 때문에, 주변지역에서는 '정안국' 등 발해의 계승국들이 계속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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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후 중원진출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평정하여 다시 만주를 안정시켰지만, 요나라로 귀환한 후에 얼마 안되어 사망하였다. 이때 황후였던 위구르 출신의 '술률평' 그의 장례식 도중에 신하들을 순장해 달라는 유언이 있었다고 말하였다. 이는 야율아보기 사후에 신하들 사이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날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지만, 본래 요나라에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신하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순장이 행해졌다. 그러나 도중에 한족 출신의 신하였던 '조사온'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황후 술률평이 야율아보기와 가장 가까웠으니 먼저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술률평은 아들이 어려기 때문에 본인이 돌봐줘야 된다며, 대신 오른팔을 잘라 넣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야율아보기와 많은 신하들, 그리고 술률평의 오른팔이 같이 묻히게 되었다. 그러나 말을 꺼냈던 조사온은 살아남았다고 하며, 아들의 핑계를 댄 술률평도 한 팔을 잃긴 했지만 살아남아 섭정의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사실 당시 야율아보기의 장남 '야율돌욕'은 27세였고, 차남 야율요골은 24세였다. 야율돌욕은 발해를 점령하고 세운 동란국의 왕으로 책봉되어있었는데, 술률평은 그가 만주보다는 중원에 더 관심이 많다고 하여 대신 야율요골을 후계자로 세웠다고 한다. 이후 야율돌욕은 요나라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동란국도 사실상 요나라에 흡수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후당으로 망명하였다. 야율요골이 이어받은 요나라는 만주에서 강성한 국가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중원에 진출하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936년 후당의 장수 '석경당'이 '후진'을 건국할때, 요나라에 협력의 대가로 '연운 16주'를 넘겨주면서 중원의 북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야율아보기가 이루지 못한 중원 진출의 꿈이 아들 야율요골 대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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