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영국 잉글랜드 통일의 발판을 만든 「알프레드 대왕」
- 역사
- 2023. 7. 29.
앵글로색슨 7왕국과 데인족 침략
'알프레드 대왕'은 '앨프레드'로 불리우기도 하는데, 848년경 잉글랜드 남부의 웨식스 왕국에서 태어났다. 이 시기 영국의 잉글랜드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게르만족의 하나인 앵글로색슨족으로, 이들은 고대 로마가 '브리튼섬'에 진출한 이후 유입되기 시작하였으며, 로마가 이곳을 포기하고 물러나자 선주민들인 '브리튼인'을 외각지역으로 몰아내고 자신들이 차지하였다. 앵글로섹슨족은 노섬브리아, 머시아, 이스트앵글리아, 에식스, 웨식스, 켄트, 서식스의 7개의 왕국을 세웠는데, 이를 '앵글로색슨 7왕국'이라고 부르며, 이들은 섬 안에서 서로 패권을 얻기위해 경쟁하였다. 알프레드 대왕의 할아버지인 웨식스의 왕 '에그버트'는 당시 말로하면 '브레트왈다'(Bretwalda)로 7왕국의 나머지 국가들을 모두 종속시켜 사실상 앵글로색슨족의 수장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865년 '데인족' 바이킹들이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로 침략해 왔고, 이들은 5년에 걸쳐 노던브리아와 이스트앵글리아를 점령하고는 870년에 웨식스로 쳐들어왔다. 당시 웨식스의 왕은 알프레드 대왕의 형인 '애설레드'로, 이들은 '애쉬다운 전투'에서 데인족에서 한번 승리하기도 하였지만 계속 패배하였고, 얼마 안있어 애설레드가 사망하였는데, 이는 그가 데인족과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후 에설래드의 자식들이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동생인 알프레드 대왕이 웨식스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알프레드 대왕은 당면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일단 데인족과 평화협상을 맺었는데, 그 조건으로 상당한 양의 재물을 건냈어야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알프레드 왕과 케이크
알프레드 대왕은 웨식스의 왕이 되었지만,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 왕국들은 데인족 바이킹들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고, 웨식스가 평화를 얻은 동안 이들은 노섬브리아에 정착지를 건설하거나, 머시아를 정복하는데 집중하였다. 그러나 웨식스의 평화도 오래가지 못했는데, 데인족은 875년에 다시 침략을 개시하였다. 그동안 착실하게 준비를 해온 웨식스는 데인족과 일진일퇴를 거듭하였고, 알프레드 대왕은 876년에 데인족의 바이킹선 120척을 침몰시키는 대승리를 거두기도 하지만, 878년에는 반대로 요새가 있던 '치펜햄'을 기습공격당해 알프레드 대왕과 소수의 인원만 간신히 빠져나가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이미 웨식스를 제외한 다른 왕국들은 모두 데인족에게 점령당한 상태로, 알프레드 대왕도 병사를 모으기 위해 귀족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알프레드 대왕과 관련하여 '알프레드 왕과 케이크'라는 영국 동화가 있는데, 그 동화의 내용은 바로 이 시기의 알프레드 대왕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동화의 내용과 같은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그 속에 당시 알프레드 대왕이 처했을 곤궁한 처지와 왕국에 대한 걱정이 잘 드러나있다. 이후 병사를 모은 알프레드 대왕은 '에탄둔'(현재의 에딩턴)에서 데인족과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에탄둔 전투'(에딩턴 전투)에서 승리한 알프레드 대왕은 데인족과 '웨드모어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에 따라 데인족의 우두머리였던 '구스룸'은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이스트앵글리아로 떠나 그곳에 왕이 되었다. 웨식스는 런던을 포함하여 잉글랜드의 남서부를 장악하였고, 머시아는 분열되어 머시아 서부는 웨식스가 차지하고, 머시아 동부는 데인족의 차지가 되었다. 데인족이 차지한 지역은 '데인로'라고 불리웠으며, 이후로도 웨식스와 데인족 사이에 소규모 충돌을 있었지만, 알프레드 대왕은 대체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앵글로색슨족의 왕
알프레드 대왕은 데인족을 잉글랜드에서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하였지만, 적어도 앵글로색슨족이 유지될 수 있도록 지켜내는 것에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데인족이라는 위험은 계속 눈 앞에 있었기 때문에, 알프레드 대왕은 여러 분야에서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는 왕국을 10여개의 주로 나누어 각 주에 장관과 주교를 파견하였으며, 이하 지방 행정조직을 방어거점인 '부르흐'와 결합시켰다. 10세기의 문헌인 '부르갈 히다게'에는 약 30여개의 부르흐가 요새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 관습법을 집대성하여 법전을 정비하고, 재판 조직을 체계화하여 법집행을 개혁하였으며, 고대 영어 문법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개혁들은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현실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요구된 것들이었는데, 먼저 데인족과의 전쟁을 통해서 별다른 징후없이 갑작스럽게 공격해 오는 이민족에 대응하기 위해 효율적인 방어전략이 필요하였고, 이를 위해 소규모 행정단위를 개편하여 작은 단위로 신속하게 모인 병사들이 이미 요새화되어있는 부르흐를 기점으로 초기 방어에 성공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이러한 방식의 방어전략이 효과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기존처럼 지역 귀족들에 기대어 병사들을 소집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부터 소집대상을 파악하고 필요에 따라 효과적으로 소집을 시행하는 관료의 존재가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그리고 그 관료는 종교와 법에 기대어 소집대상자를 파악・관리 했을 것이며, 이에따라 세금의 징수같은 것들도 효율적으로 진행 할 수 있었을 것이고, 부가적으로 왕권이 강화되는 효과도 생겼을 것이다. 또 데인족의 침략으로 사실상 앵글로색슨 7왕국은 그 체계가 무너지게 되었고, 각각의 왕국에서 생활하던 앵글로색슨족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법과 질서, 그리고 언어를 통일시킬 필요가 생겼을 것이다. 그외에도 함대를 건조하는 등 바다를 통해 오는 공격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하였고, 많은 라틴어 문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보급하는 등 교육과 문화 보급에도 힘썼다. 알프레드 대왕 자신도 라틴어를 배워 직접 번역작업을 하였으며, 스스로 저술활동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잉글랜드의 통일
알프레드 대왕은 899년경에 50세 정도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나, 그 사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비록 그가 집권하는 동안에는 잉글랜드를 통일하지 못했지만, 그의 후계자들도 유능했던 것 같은데, 그가 진행한 여러 개혁을 통해 마련한 발판을 기반으로, 아들인 '에드워드'는 바이킹의 침략을 막으며 각지의 반란을 일소하였고, 손자인 '애설스탠'은 잉글랜드에 사실상 통일왕국을 세우게 된다. 이후 잉글랜드는 노르만 왕조에 넘어가게 되지만, 알프레드 대왕의 피는 계속이어져서, 오늘날의 영국 왕가에 까지 닿아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