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당나라 멸망 이후 송나라까지 「오대 십국 시대」
- 역사
- 2023. 7. 31.
번진과 절도사
오대십국시대는 '당나라' 멸망 이후부터 '송나라'가 다시 통일할 때까지 중원의 혼란기를 이르는 말로, 당나라의 기틀을 이은 다섯 나라인 '오대'와 중원의 변방지역에서 세력을 일으킨 열개의 나라 '십국'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이 혼란을 불러일으킨 이들이 바로 '절도사'로, 이들은 본래 당나라의 관료들이었다. 당나라는 태종 '이세민'의 통치시기에 그 영토가 크게 넓어졌는데, 이 때문에 기존의 제도로는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힘들어졌다. 이에 당나라에서는 따로 '번진'이라고 불리는 군사구역을 설치하였으며, 중앙에서 절도사를 파견하여 병사들의 모집과 관리를 하도록 군권을 맡겼고, 또 그 비용을 충당할 수 있도록 해당 구역의 조세징수권도 주었다. 이러한 제도는 초기에는 상당히 효과적이었던 것 같지만, 금세 변질되기 시작하여 큰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번진으로 파견되었던 절도사들은 임기를 마치면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여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각 절도사들은 더 좋은 직위로 출세하기 위하여 앞다투어 조정에 뇌물을 바쳤다. 이들이 조정에 바친 뇌물들은 당연히도 임지에서 수탈한 재물들로, 지방에는 막강한 군권과 조세징수권을 가지고 있던 절도사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절도사와 중앙 관료들은 부패하고 민심은 날로 흉흉해졌다. 또 이들이 해당지역에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막강하여 거의 왕권에 가까웠으며, 몇 개의 절도사직을 겸직하는 경우까지 생겨났기 때문에 그 세력이 지방 왕국에 비견될 수 있었기 때문에, 황권이 강력하고 중앙 정부가 탄탄하였을 때는 훌륭히 그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통제력이 약해지면 바로 내란 세력으로 바뀌었다. 당나라의 몰락을 가져온 '안사의 난'도 절도사가 일으킨 것이며, '황소의 난' 이후 당나라의 멸망에 실질적인 역할을 한 '주전충', '이극용', '이무정' 등은 모두 절도사였으며, 이후 나타나는 오대십국 또한 대부분 절도사들에 의해 세워졌다.
오대
오대는 오대십국시대에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자리잡은 5개의 나라를 나타내는 말로, 기본적으로는 당나라의 정통성과 기틀을 직접적으로 이어받았으며, 후에 중원을 다시 통일하는 송나라로 연결된다. 당나라 말기 환관들이 자신들의 뜻대로 황제를 갈아치우는 난리가 일어나자, 절도사였던 주전충은 이를 빌미로 군대를 이끌고 수도 '장안'으로 쳐들어가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907년에 자신이 세운 황제 '애종'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황제에 즉위하여, 당나라가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하게 된다. 그러나 별달리 정세가 변한 것은 없었는데, 황소의 난 이후로 사실상 당나라는 이미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으며, 이 시기에는 십국 중 몇 개는 이미 건국되어 있었을 정도인 데다, 건국을 주장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독립세력인 절도사들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권을 잡은 주전충 자신도 중원의 통일이나 안정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는 전횡을 일삼던 환관들이나 관료들을 학살하거나, 황제로서의 생활을 즐겼을 뿐 본격적으로 나라를 개혁하는 등의 일을 하지는 않았다. 이후 주전충의 아들 주우규와 주우정이 황제를 역임하였고, 후량은 923년에 주전충의 정치적 숙적이었던 절도사 '이극용'의 아들인 '이존욱'에게 멸망당하였으며, 이존욱이 뒤를 이어 '후당'을 세웠다. 이존욱은 다른 군벌인 절도사 '유수광'의 '유연'이나 이무정의 '기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으로 쳐들어온 거란족 '요나라'의 침공에 맞설 정도로 용맹하였지만, 정작 정권을 잡은 후에는 내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결국 탐관오리가 판을 치고 황후가 직접 뇌물을 받고 재물을 모으는 등 부정부패가 극심하였고, 결국 926년 양형제인 '이사원'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 '낙양을 공격하였으며, 이존욱은 이 과정에서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어 사망하였다. 황제로 즉위한 이사원은 전쟁을 멈추고 농업생산력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는 등 7년간 나라를 안정시켰지만, 사후 후계를 이은 아들 '이종후'가 1년 만에 양아들 '이종가'에게 살해당하면서, 다시 혼란스러운 정국이 시작되었다. 이종가는 부하였던 절도사 '석경당'과 반목하여 내란이 일어났는데, 석경당은 요나라를 끌어들여 동맹을 맺었고, 후당은 936년에 멸망하게 된다. 석경당은 '후진'을 건국하여 황제가 되었으며, 동맹의 대가로 '연운 16주'를 요나라에 할양하였기 때문에, 요나라가 본격적으로 중원 북부를 지배하게 되었다. 황제가 된 석경당은 권력은 차지하였지만, 재위하는 6년 동안 반란에 시달리다가 사망하였고, 석경당 사후에 신하들은 그의 아들인 '석중예'가 어리다는 이유로, 조카인 '석중귀'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그러나 후진도 오래가지 못하였는데, 석중귀는 황제가 되자 후진의 건국을 도와준 요나라에 등을 돌리는 정책을 폈고, 946년 화가 난 요나라가 중원으로 침공하여 수도 '개봉'을 함락시켜 후진은 멸망하였으며, 석중귀는 포로가 되어 요나라로 끌려가게 된다. 그러나 요나라는 후진을 멸망시키고서는 다시 북방으로 철수하였기 때문에, 이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절도사 '유지원'이 빈 개봉으로 들어와서 '후한'을 건국한다. 하지만 유지원은 건국한 지 겨우 10개월 만에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유승우'는 부하들을 의심하여 암살을 시도하다가, 950년 참다못한 개국공신이었던 '곽위'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후한은 4년 만에 멸망하게 된다. 951년 곽위는 오대의 마지막 국가인 '후주'를 건국하였고, 그의 뒤를 이은 양아들 '시영'은 주변의 십국들을 정복하며 중원 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십국
십국 중 가장 먼저 건국된 것은 '오'이다. 다른 오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양오', 또는 '남오'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광릉을 수도 삼아서 강도부에 자리 잡았다. 오를 건국한 '양행밀'은 본래 도적 출신이었는데, 세력이 커지자 당나라 조정의 회유를 받아 여주의 자사를 지냈다. 이후 당나라의 혼란을 틈타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면서 세력을 키웠고, 892년에는 회남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902년에는 당나라 조정에 의해 '오왕'에 봉해졌는데, 이때까지도 독자적인 군벌 세력이기는 했지만, 국가를 표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양행밀 사후에 세 번째로 정권을 잡은 아들 '양부'가 927년에 신하들의 권유로 황제를 칭하였고, 937년에 오나라의 일종의 친위대였던 '흑운도'를 장악하고 있던 '이변'에게 제위를 찬탈당하여 멸망하게 된다. 다음으로 '오월'은 임안을 수도로하여, 오와 인접한 국가인데, 오월을 건국한 '전류'도 미천한 신분에서 시작하여 군공을 쌓아 절도사까지 승진하였다. 전류는 인접한 지역에 있던 양행밀과는 일종의 라이벌 관계였으며, 반란으로부터 자신의 지역을 끝까지 잘 지켜내어, 904년에 주전충으로부터 '오월왕'에 봉해졌다. 907년에는 정식으로 왕으로 등극하여 오월을 다스렸는데, 끝까지 칭제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오대의 국가들의 신하를 자청하였다.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고려나 후백제, 일본 등과 교역하였으며, 오월의 지배아래에서 발전한 임안은 후에 '남송'의 수도로 자리매김하게 되기도 하였다. 978년 중원의 패자가 된 송나라와 국경을 맞대게 되자 그대로 항복하였다. '초'는 '마은'이 세웠는데, 다른 초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마초', 혹은 '남초'라고 부르기도 한다. 896년 호남 절도사로 임명된 마은은 형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였고, 907년에 주전충에게 조공을 바치고 '초왕'에 봉해졌다. 그러나 황제를 칭한 것은 아니고, 따로 국가를 건국했다고 보기도 힘들어 보인다. 초는 마은 사망 이후에 아들들 사이에서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면서 국력을 계속 소진하였고, 결국 951년에 '남당'에 정복당해 멸망하였다. '전촉'은 '왕건'이 건국하였는데, 그는 황소의 난을 피해 촉으로 피신했던 당나라의 '희종'을 도운 공으로 벽주자사에 임명되었었다. 그때부터 한중을 포함하여 촉 전체를 장악하였고, 903년에는 '촉왕'에 봉해졌다. 이후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자 스스로 황제를 칭하였는데, 즉위 중에 '심사단'이라는 소위 비밀경찰을 만들어 내부를 단속했기 때문에 악평을 얻었다고 한다. 왕건 사망 이후에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며 국력이 크게 기울었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아들 '왕연'이 정치를 내팽개쳐 환관 정치가 시작되면서 민심이 크게 악화되었으며, 결국 925년에 후당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민나라'는 복주를 수도로 하여, 오월의 남서쪽에 위치에 있다. 무위군 절도사 '왕심지'가 909년에 주전충의 후량을 인정하면서 '민왕'으로 책봉되었고, 후에 3번째 군주인 '왕연균'이 황제를 칭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왕심지는 선정을 펼쳐 '개민성왕'으로 불리기도 하였지만, 사후에 후계자 분쟁이 계속되어 내전이 일어났고, 그 사이에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제위를 찬탈하기도 하였다. 945년 왕심지의 아들인 '왕연희'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는데, 결국 이러한 혼란을 틈타 쳐들어온 남당에 의해 정복당하였다. '남평'은 '형남'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907년 주전충이 임명한 형남 절도사 '고계흥'이 다스렸으며, 후량이 멸망한 이후에는 후당의 신하를 자청하여 '남평왕'에 봉해졌다. 남평은 형주와 귀주, 협주의 3개의 주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실제 영토는 매우 작았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의 제후국을 자처하면서 유지될 수 있었지만, 대신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번영하였다. 남평은 나름 뛰어난 처세술로 오래 지속되었으나, 송나라가 건국된 이후에 963년 무평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군대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빌려주었다. 그러나 송나라가 무평을 점령하면서, 그 길로 남평도 점령했기 때문에, 남평은 그대로 멸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평도 따로 칭제를 하거나, 국가의 건국을 주장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점령한 송나라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무장해제 절차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남평의 마지막 군주인 '고계충'도 이후 송나라의 형남 절도사로 임명되었다가, 이후 무녕군 절도사로 임명되는 등 송나라에서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남한', 혹은 '월한'으로 불리는 나라는 중국의 가장 남쪽인 광동과 광서 지역에 세워졌다. 남한의 기초를 다진 '유은'의 집안은 남해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는데, 이들이 아랍계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유은의 아버지 때에 황소의 난에서 공적을 세워 봉주 자사로 임명되었고, 이를 이어받은 유은이 정해군 절도사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정해군 절도사가 되었다. 이후 사실상 반독립세력으로 있다가 909년에 후량에 의해 '남평왕'에 봉해졌고, 911년에는 '남해왕'으로 다시 책봉되었다. 유은은 얼마 안 있어 사망하였지만, 917년에 동생 '유엄'이 이어받아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처음에는 대월이라고 했다가 다시 한으로 고쳤다. 남한은 다른 나라와 다르게 무관이 아닌 문관들이 주도적으로 정치를 하였는데, 지역의 특성상 유배되거나 좌천되어 온 관리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덕분에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평온하였고, 남해 교역을 통해 쌓은 부로 윤택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한때 남한은 베트남 북쪽 일부지역을 점령하기도 하였지만, 이후 베트남 독립세력에게 다시 빼앗기기도 하였다. 유엄 사후에는 남한을 통치한 군주들은 정치를 내팽개치고 유흥에 빠져 나라가 막장으로 운영되었지만, 지리적 이점 덕분인지 큰 사건을 일어나지 않았고, 971년에 송나라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는데, 민심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에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고 한다. '후촉'은 934년에 '맹지상'이 건국하였으며, 그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였다. 본래 그는 후당의 신하로 이존욱이 전촉을 멸망시킨 이후에 통치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이존욱 사후에 즉위한 이사원이 그의 세력을 견제하자 거병하여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였고, 이에 후당에서는 그를 '촉왕'으로 책봉하여 회유하였다. 이후 이사원 사후에 후당이 혼란스러워지자 아예 독립하여 후촉을 건국하였는데, 맹지상은 이후 얼마 안 되어 사망하였고, 아들 '맹창'이 이어받아 다스렸다. 후촉은 부유한 지역이기 때문에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문화진흥에 힘써, 당시의 시와 사를 모아 '화간집'을 발간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965년에 후촉은 송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는데, 방어하기 좋은 지리적 이점에 14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있었지만, 장군들의 지휘 능력이 떨어졌으며, 실전 경험도 없어서 별다른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남당'은 937년에 이변이 오의 제위를 찬탈하여 황제에 즉위하면서 건국되었는데, 처음에는 국호를 제로 하였다고 한다. 이후 다시 당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제당', 또는 '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후 아들인 '이경'이 제위를 물려받았는데, 이때 남당은 활발하게 확장정책을 시행하여, 945년엔 민나라를 멸망시키고, 951년에는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955년에 후주의 공격을 받아 장강 이북의 땅을 잃게 되면서, 사실상 후주에 복속되었다가 후주를 이어받은 송나라를 그대로 따랐다. 다시 아들 '이욱'이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고 나서는 송나라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강남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스스로 국주라고 황제에서 격을 낮추기도 하였으나, 975년에 송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북한'은 후한이 곽위에 의해 멸망하자, 후한을 건국한 유지원의 동생인 '유숭'이 951년에 건국하였는데, 다른 십국들과 다르게 북쪽에 위치하였다. 유숭은 곽위가 죽고 시영이 그 뒤를 잇자 틈을 노리고 쳐들어갔으나, '고평 전투'에서 대패하여 물러났다. 북한은 이후 시영이 죽고 송나라 건국되었을 때도 다시 한번 도모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영토가 작고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요나라에 기대어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송나라가 쳐들어오자 요나라의 도움으로 격퇴하였지만, 979년에 송나라의 두 번째 황제인 '조광의'가 이끄는 군대에 요나라도 패배하였고, 이에 북한이 송나라에 항복하면서 멸망하게 된다.
송나라의 중원 통일
송나라는 후에 금나라에 의해 남쪽으로 밀린 '남송'과 구분하기 위하여 '북송'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959년 후주의 군주였던 시영이 죽고, 어린 아들 '시종훈'이 제위를 잇자, 이듬해 유력자였던 '조광윤'이 '진교의 변'을 일으켜 선양을 받는 형태로 건국하였다. 권력을 잡은 조광윤은 먼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나뉘어있던 병권을 회수하였는데, 그가 술을 권하고 대화를 통해 이를 해결했기 때문에 '배주석병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절도사의 권한을 축소하여,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운 형태로 바꾸었다. 이후 송나라는 후주 때부터 시행했던 중원 통일을 계속 시행하여, 남평, 후촉, 남한, 남당, 오월, 북한을 모두 정복하였으며, 979년에 사실상 중국의 통일왕조를 재건하게 된다. 그러나 연운 16주는 끝까지 찾아오지 못했는데, 958년 후주의 시영이 막주와 영주의 2개 주를 되찾았고, 이후 송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연합하여 한때 5개 주를 돌려받기도 했지만, 다시 금나라에게 빼앗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