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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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의 아버지의 진짜 아들

'존 퀸시 애덤스'는 1767년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의 갈등이 첨예화되는 시기에, 당시 변호사이자 정치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존 애덤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인 존 애덤스는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명으로 본격적으로 독립 활동에 투신하였고, 애덤스는 그러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애덤스는 1778년에 아버지가 '대륙 회의'에 의해 외교관으로 프랑스로 파견가게 되었을 때도 동행하였으며, 아버지의 외교활동에 따라 파리, 암스테르담, 레이던을 전전하며 학교에 다녔다. 14세에는 러시아 주재 초대 공사인 '프랜시스 데이나'의 비밀서기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1783년에는 다시 아버지 휘하로 돌아와서 비밀서기 활동을 하는 등 실질적인 미국의 독립활동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애덤스는 미국이 독립한 이후 귀국하여 하버드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1787년에 졸업하였으며, 이후에는 법률 공부를 시작하여 1790년에는 변호사 실습을 시작하였는데, 그의 변호사 데뷔는 성공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1791년부터는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외교 사절로서 근무하였다. 1794년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애덤스를 네덜란드 주재 공사로 임명하였는데, 네덜란드 공화국은 애덤스가 부임한지 3일만에 프랑스 군에 의해 점령당했기 때문에, 이후 런던에서 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1796년에는 다시 포르투갈의 주재 공사로 임명되었고, 그가 부임하기 위해 미국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 존 애덤스가 미국의 두번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801년 '토머스 제퍼슨'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애덤스는 귀국하였으며, 이듬해부터는 메사추세츠 주의 상원의원으로서 활동하였는데, 아버지처럼 '연방당'에서 활동하였지만, 필요한 경우 '민주공화당'과도 함께 투표하는 등 유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동으로 연방당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1808년에 사임하였고, 이후 '제임스 메디슨' 대통령 휘하에서 프로이센과 영국의 대사를 역임하였으며, 영국 대사로 있을때는 '미영전쟁'을 종결짓는 '겐트 조약'에도 참석하였고, 이러한 각국의 외교관을 역임한 애덤스는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스웨던어의 6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제임스 먼로'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1817년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 서부와 북서 태평양 연안의 영토를 매입하는 과정에도 참여하였고, 유명한 '먼로 독트린'을 구상하고 작성한 사람도 애덤스라고 한다. 애덤스는 언변이 화려하고, 외교 능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현대의 미국에서도 유능한 국무장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 대통령의 세대교체

1820년에 치루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애덤스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였지만,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현역의 먼로에게 대패하였다. 그러나 이 선거는 사실상 먼로의 단독 출마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는데, 당시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연방당은 사실상 와해된 상태로 후보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애덤스는 1824년에 치루어진 대통령 선거에 또 출마하려고 하였는데, 이때는 이미 연방당이 완전히 해체된 이후로 민주공화당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민주공화당 내부에서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생겼고, 본 선거에는 4명의 민주공화당 후보가 출마하였다. 결과적으로는 직접 선거와 선거인단 득표에서 '앤드루 잭슨'이 가장 많이 득표하였지만, 이 선거에서는 과반득표 후보자가 없었기 때문에 수정헌법 12조에 의해 결정권이 하원 표결로 넘겨져 극적으로 애덤스가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이는 상당히 이례적인 결과인데, 잭슨은 말그대로 선거에서 이겼지만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것이 된다. 자연스럽게 애덤스는 아주 낮은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역대 가장 낮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이 선거에 주목할 점은 또 한가지 있는데, 바로 미국의 정치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건국의 아버지들의 은퇴이다. 애덤스도 어렸을때 미국 독립을 위한 움직임에 가담하기도 하였지만, 직접적으로 독립 전쟁에 참여했다고 할 수 없는 사람이 첫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이는 시간의 흐름상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이때부터 미국의 정치사가 다음 세대로 계승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잭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선거 결과에 불만을 가져 애덤스를 고발하였고, 이러한 당내 갈등으로 인해 애덤스와 함께하는 이들이 떨어져나와 '국민공화당'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현대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기간 동안에는 별다른 큰 업적을 세우지는 못했는데, 애덤스는 정치적 기반이 약하고 지역이 한정되어 있어 의회의 협력을 얻기 어려웠다. 애덤스가 시행하려고 했던 연방 정부 주도의 국가 인프라 사업은 상원의 동의를 얻지 못했고, 관세나 노예제도를 둘러싸고 공업중심의 북부와 농업중심의 남부의 갈등도 한층 심화되었다. 1828년에 애덤스는 재선을 노리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지만 잭슨에 밀려 낙선하였고, 은퇴하여 메사추세츠의 농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여담이지만 애덤스는 아버지 존 애덤스와 함께 미국 최초의 부자 대통령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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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집권시기보다 더 평가받는 이후의 삶

애덤스는 한번 은퇴하였지만 1830년 다시 돌아와서 하원의원으로서 정력적으로 정치활동을 이어나갔다. 특히 노예제 폐지에 대해 강력하게 주장하였는데, 1836년에 도입된 소위 '토론 금지령'을 폐지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841년 쿠바의 흑인 노예들이 연루된 '아마스타드호 사건'의 주범들을 변호하기도 하였고, 1843년에는 노예제를 폐지하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이 해에는 '신시내티 천문관측소'가 설립되었는데, 과학 발전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던 애덤스는 자신의 대통령 재임중에도 설치하지 못한 천문관측소가 설치되자, 그 설립 행사에 참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같은 해에 애덤스는 사진도 찍었는데, 그는 최초로 사진을 찍은 미국 대통령이 되었지만, 사진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1991년 우연히 발견될때까지 확인되지 못했다고 한다. 1848년 애덤스는 하원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결국 건강을 되찾지 못하고 그대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예 해방에 대한 생각은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이어졌고, 남북전쟁이 한창이었던 1863년 '노예 해방 선언'이 이루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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