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말 삼국시대 강동의 소패왕 「손책」
- 역사
- 2023. 7. 20.
강동의 새끼 호랑이
'손책'(孫策)의 자는 '백부'(伯符)로 중국의 후한 말인 175년경 '손견'의 아들로 태어났다. 손견은 본래 양주 오군 부춘현 출신인데, 관리로서 여러 임지에서 일 했기 때문인지 일가족을 수춘에 머물게 하였고, 손책은 수춘에서 생활하면서 '주유'를 만나 친교를 쌓게 되었으며, 이후 주유를 따라 서현으로 옮겨가 인맥을 넓혔다고 한다. 이후 192년경 손견이 '유표'를 공격하다가 37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손책이 뒤를 이어 집안을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손견은 지방 호족 출신으로 자신의 용맹성과 능력을 바탕으로 벼슬을 하기도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당대에 한정된 것으로 물려줄 영지나 세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손책 자신도 능력을 증명할 만한 무용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손견 휘하에 있던 이들도 딱히 손책을 따를 이유가 없었고, 손책은 거의 맨땅에서 다시 집안을 일구어야 했다. 이러한 이유도 있어 손책은 194년 아버지 손견이 그랬던 것처럼 '원술' 휘하에 들어가서 경력을 쌓기로 하였다. 물론 손견이 이룬 것이 모두 헛수고 인것은 아니어서, 손책의 친척인 '오경'과 '손분', 손견의 부하였던 '정보' 등이 그를 도왔다. 195년 단양을 둘러싸고 벌어진 원술과 '유요'의 분쟁이 1년이상 계속되자, 손책은 원술에게 자신을 참전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에 원술은 조정에 표문을 올려 '절충 교위', '진구 장군' 대리의 직책을 주어 출정하게 하였다. 처음 출발하였을때 손책의 휘하에는 원술에게 양도받은 손견 생전의 부하들 1000여명만 있었지만, 진군하는 동안 많은 무리가 합류하였고, 그 중에 주유도 있었다고 한다. 손책은 벌이는 싸움마다 승리하였지만, 적이 '말릉성'에 틀어박혀 농성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난관에 봉착하였는데, 손책은 그 사이 유요의 본대를 공격하여 승리를 이어갔고, 결국 유요는 군대를 내팽개치고 도주하였다고 한다. 손책은 점령한 지역에서 약탈을 금하고, 선정을 배풀었기 때문에 민심을 얻을 수 있었으며, 많은 병사들이 그의 휘하에 모였다고 하고, 유요의 휘하에 있던 '태사자'도 이때 손책의 휘하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처럼 큰 공을 쌓은 손책은 강동의 호랑이 손견의 자식에서, 하나의 어엿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강동 평정
손책은 강동 평정을 시작하여, 먼저 '왕랑'을 공격하였다. 왕랑은 항복하라는 조언을 무시하고 손책과 겨루었다가 대패하였고, 이후 바다를 표류하였지만 끝까지 쫒아간 손책에게 사로잡혔다. 그러나 손책은 왕랑이 명망이 있다며 죽이지 않고 풀어주었다고 한다. 또 이때 '왕성' 등이 1만명에 달하는 무리를 모으고 있어 손책이 일를 공격하여 토벌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손책의 어머니는 왕성이 손견과 친분이 있으니 살려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손책은 이를 무시하고 일족은 모두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후 '엄백호'를 공격할때는, 엄백호가 동생 '엄여'를 보내 화친을 청했는데, 손책은 일부로 엄여를 겁을 주었으며, 그가 위축되자 창을 던져 살해하였다. 엄백호는 손책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허소'에게로 도망쳤는데, 손책은 허소가 의로운 사람이라며 공격하지 않았다고 한다. 손책은 젊은 나이에 단지 수년만에 강동을 종횡무진하면서 일대의 유력자들을 토벌하고, 그 명성을 드높여 이름을 알렸다. 동오의 기틀은 가히 이때부터 세워졌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강동의 소패왕
손책은 남자임에도 그 미모가 뛰어나 가히 당대 최고의 미남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 능력도 매우 뛰어났으며, 적이었던 태사자나 '조랑'을 자신의 휘하에 거둔 것을 보면, 그의 대인배적인 성격도 조금 옅볼 수 있을 것이다. 강동 지역을 안정시키고자 수춘을 방문했던 태부 '마일제'는 이러한 손책을 보고 '회의교위'로 임명하기도 하였다고 하며, 원술의 부하들도 그에게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원술 또한 손책같은 자식이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원술에게 있어 손책은 자식이 아니었는데, 원술은 손책에게 구강태수 자리를 약속하였다가 이를 어겼으며, 다시 여강태수 자리를 약속하며 토벌을 보냈지만, 후에 또 약속을 어겼다. 원술의 위인을 본 손책은 그의 밑에서 벗어날 생각을 계속가졌고, 강동을 평정하고 어느정도 안정을 찾자, 직접 '허도'의 천자에게 '방물'을 보내어 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하였다. 이렇게 원술과 거리를 두는 가운데 197년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자, '헌제'는 손책에게 작위를 내리고 원술을 치도록 하였다. 원술과의 싸움은 기본적으로 세력이 큰 '조조' 위주로 진행되었지만, 손책도 참전하여 공을 쌓았고, 198년에는 더 많은 방물을 천자에게 보냈으며, '토역장군'에 임명되었고 '오후'로 봉해졌다. 199년 원술이 죽은 이후에는 원술의 잔당이 의탁한 '유훈'을 공격하여 본거지인 환성을 함락시켰고, 유훈을 돕던 '황조'도 공격하여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때 환성에서 손책은 강동의 미녀로 유명한 '강동이교'를 사로잡아, 자신이 언니인 '대교'와 주유가 동생인 '소교'와 각각 혼인하였다. 패배를 모르는 이러한 손책의 명성은 널리 퍼졌고, 사람들은 패왕 '항우'에 빗대어 '소패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소패왕의 최후
손책은 강동 일대를 장악하고 조정과 직접 소통하며 받는 등, 아버지 손견이 이루지 못한 세력권을 만들고 집안의 영향력을 극대화 시켰는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황제를 직접 옹립하여 국가 전체로 그것을 확대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강동을 평정하고 위세를 떨진 손책에 대해 조조는 혼인을 통해 우호를 꾀했지만, 손책은 오히려 이를 빌미로 더 높은 직책을 요구하는 등 둘 사이는 좋아지지 못하였다. 200년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조조 휘하의 많은 이들이 손책이 허도를 공격할 것을 우려하였는데, 조조의 심복이었던 '곽가'는 손책이 강동을 평정하면서 많은 원한을 샀고, 실력을 믿고 무방비하게 돌아다니기 때문에 위태로워 걱정 할 필요가 없다고 진언하였다. 실제로 손책은 허도를 노리고 진군을 하였는데, 도중에 광릉태수 '진등'과 대치하였다고 한다. 손책군은 군량이 수송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엄백호의 잔당이었던 '허소'가 손책을 습격하였고, 중상을 입은 손책은 얼마안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혹은 손책은 사냥을 좋아하여 자주 즐겼는데, 손책에게 죽은 허공의 식객들이 이를 알고 기다리고 있다가 손책을 습격하였으며, 습격자들은 모두 죽었지만 손책도 상처가 심해 결국 죽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이야기가 도사 '우길'의 이야기로, 손책이 자신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더 신망받는 우길을 시기하여 죽였는데, 이후 우길의 환영에 시달리게 되었고, 습격당한 손책은 한번 상처를 치료하였지만, 우길의 환영을 보고 화를 내다가 치료한 상처가 터져서 죽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손책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감에 차 오만하였으며, 한번 화가나면 말리지 못하고, 자신보다 뛰어난 자에 대한 시기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손책의 사후 집안은 동생 '손권'이 이어받았으며, 오나라를 건국하고 황제를 칭하기도 하였지만, 끝내 하북으로 진출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