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

반응형

초상화

천애고아

'앤드루 잭슨'은 1767년 미국의 아메리카 노스캐롤라이나 식민지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 사이에 위치한 삼림지대에 있는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공동체가 있던 '왁스하우스'에서 태어났다. 잭슨의 집안은 본래 스코틀랜드 출신인데 아일랜드로 이민을 떠났는데,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아버지 '앤드루 잭슨'은 '엘리자베스 허친슨 잭슨'과 결혼한 후 두 아들 '휴 잭슨'과 '로버트 잭슨'을 낳았고, 1765년 다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였다. 이들 가족은 본래도 그다지 부유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잭슨의 아버지가 잭슨이 태어나기 3주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궁핍한 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영국에 대한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삼형제는 모두 민병대로 활동하였는데, 13살의 잭슨도 전령병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 선택은 별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는데, 장남인 휴 잭슨은 1779년 '스토노 페리 전투'에서 사망하였고, 잭슨과 로버트 잭슨은 영국군에 체포되어 가혹한 포로 생활을 하였으며, 천연두에 감염되어 사경을 해메게 된다. 결국 1781년 두 사람은 석방되었지만 로버트 잭슨은 천연두를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어머니도 포로들을 간호하다가 콜레라에 걸려 그 해 말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잭슨은 14세의 나이로 천애고아가 되었다. 이후 잭슨은 생계를 위해 안장을 제작하는 가게에서 일하였고,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1784년부터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셀리스베리로 가서 변호사 아래에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1787년에 법학공부를 마치고 '웨스턴 디스트릭트 지역'(테네시 주)에서 생활하였다. 이 시기 잭슨은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였는데, 여러 법조인들과 친분을 쌓기도 하였고, 개척도시인 내슈빌에서 새로생긴 '사우스 웨스트 준주'(테네시주)의 주지사 '윌리엄 블런트' 밑에서 활동하여, 1791년에는 사우스 웨스트 준주의 법무관으로 임명되었다. 1796년에는 테네시 헌법 재정 회의의 대표로 선출되었고, 이후 정식으로 테네시 주가 성립되면서 주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797년에는 민주공화당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나 도중에 사임하였고, 1798년에는 테네시 주의 판사로 업무를 수행하였다. 잭슨은 본격적으로 법조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사업가로도 활동했는데, 토지 투기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첫번째 농장을 인수하였으며, 첫번째 흑인노예도 이 시기에 구입하였고, 첫 결투도 이때 치루었다.

미영 전쟁과 인디언 학살의 시작

잭슨은 독립전쟁 때 영국의 포로생활을 하면서 학대 당해 머리와 왼손을 칼로 베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경험은 그가 영국과 관련된 가치인 귀족과 특권 같은 것에 대한 거부감을 심어주었지만, 잭슨에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 또는 백인에게만 해당되었던 것 같다. 그는 1801년 테네시주의 민병대 사령관이 되어 대령의 계급을 받았는데, 개척주인 만큼 주로 하는 일은 인디언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804년에는 테네시주 판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그는 토지 투기에 실패하여 거의 파산할 뻔 하였기 때문에, 한동안 사업에 집중하였고, 이때 그는 9명의 흑인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1805년에는 '에런 버'와 알게되었는데, 이 때문에 1806년 에런 버의 음모에 연루되어 법정에서 관련 증언을 하기도 하였고, '찰스 디킨슨'과의 갈등으로 결투를 벌여 그를 살해하였다. 이 시기 '체사피크 레오퍼드 사건'이나 영국의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반미활동에 대한 지원 등으로 영국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결국 1812년에 미영전쟁(1812년 전쟁)이 발발하였다. 또 이와중에 인디언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는데, 바로 '크리크 전쟁'이다. 미국의 중서부 지역에 자리잡은 인디언인 '크리크족' 중에 급진적인 반미세력으로 '레드 스틱스'라는 그룹이 있었는데, 1813년 이들은 오하이오 강가에 살던 백인 정착민 두 가족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 때문에 미국의 요구에 따라 용의자의 신병을 넘기기로 결정하였는데, 이 조치에 반대한 레드 스틱스가 다른 그룹의 마을을 제압하는 등 인디언 간의 내전으로 번졌고, 이후 플로리다 인근에서 백인 병사들이 레드 스틱스를 검문하여 그들의 물품을 압수하면서 미국과의 갈등으로 번졌다. 게다가 레드 스틱스는 혼혈 크리크족을 공격할 목적으로 '밈스 요새'를 습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400명 이상의 사람들이 학살되면서, 본격적으로 미군이 개입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에는 미영전쟁의 초기로 북부에서 벌어지는 '인디언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크리크 전쟁에는 민병대가 참전하게 되었고, 잭슨도 테네시 서부군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다. 전쟁 초기에 잭슨의 민병대는 부족한 보급과 짧은 복무기간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지지부진 하였지만, 이후 연방군이 합류하면서 어느정도 기틀이 잡혀 1814년 '호스슈 벤드 전투' 800명 가량의 인디언 전사를 죽이는 등 상당한 전과를 내었다. 전쟁을 종결시킨 잭슨은 준장으로 승진하였고, 크리크족에게 '잭슨 요새 조약'을 조인하도록 강요했는데, 잭슨은 이 조약을 통해 앨라배마의 절반과 조지아주 남부에 해당하는 광대한 지역을 그들로부터 빼앗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잭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는데, 그는 멋대로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이 소유하고있던 플로리다 서부로 침공하였고, '펜사콜라'를 공격하여 스페인군을 항복시켰기 때문에, 그곳에 있던 영국군은 철수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때 영국군이 '뉴올리언스'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는데, 잭슨은 먼저 영국의 공격을 받았던 인근의 항구인 '모빌'을 요새화하여 상륙지점을 차단하였고, 그대로 뉴올리언스로 향하여 그곳을 방어하였다. 사실 '뉴올리언스 전투'가 시작되었을때는 이미 '헨트 조약'을 맺어 미영전쟁이 끝나있었지만, 현장에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전투가 진행되었다. 잭슨은 이 전투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그 결과 전쟁 영웅으로 미국 전역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후로도 계속 계엄령을 유지하면서 독자적을 군대를 유지하면서, 자신을 비판하는 정치인이나 판사를 불법적으로 구속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헨트 조약에 대한 소식을 듣고, 계엄령을 해산하기는 하였지만, 이러한 독선적인 행동은 이전부터도 그랬지만, 이후로도 계속된다.

반응형

플로리다 침략과 인디언 학살

미영전쟁이 끝난 이후로도 잭슨은 계속해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는 주로 인디언을 핍박하여 그들의 땅을 빼앗았다. 잭슨은 크리크 전쟁 때부터 가혹하게 인디언들을 학살하였는데, 그는 인디언을 남녀노소 관계없이 죽였으며, 특히 여자와 아이, 그리고 여자아이를 집중해서 죽였다. 그리고 그것이 인디언들의 숫자를 효과적으로 줄이는 방법이라면서, 부하들에게도 철저한 학살을 명령했다고 한다. 이 시기 미국의 흑인 탈주 노예들은 스페인령인 서부 플로리다로 도망쳤는데, 그들은 영국군이 버리고 간 요새를 장악하였고, 이 요새는 미국에서 소위 '니그로 요새'로 불렸다. 잭슨은 이 요새가 스페인령에 있어 공격하지 못하자, 그들을 도발하여 선제공격을 유도하여 명분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잭슨은 인근에 '스콧 요새'를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애팔래치콜라 강'을 이용하여 보급선을 보냈고, 다시 보급 인수 부대를 보내 니그로 요새 바로 앞에서 보급품을 건네받게 하였다. 잭슨의 의도대로 니그로 요새에서 보급선을 대포로 공격하였는데, 전투경험이 없는 그들의 포격은 조잡했고, 미군은 즉시 반격하여 요새를 파괴하고 사실상 학살을 벌였다. 이후 다시 일부 미국의 무법자들이 스페인령 플로리다로 무단 침입하여, 현지의 인디언인 '세미놀족'을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는데, 세미놀족도 미국령으로 침입하여 이에 대한 보복을 하였다. 그런데 잭슨의 플로리다에 대한 야망과 지금까지 그가 저지른 불법적인 행위들을 생각해보면, 이 또한 그의 의도가 담긴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미국내 반인디언 감정이 계속 격해지는 도중에, 미군은 다시 인디언 마을을 공격하였다. 1817년 스콧 요새의 미군은 포트 잭슨 조약을 기반으로 '파울 타운'에 거주하던 '미카즈키 부족'의 퇴거를 명령하였고, 이에 반항하는 이들을 군대를 동원하여 쫒아내었다. 그 결과 스콧 요새로 향하던 보급선이 습격받아 여러 사람이 살해당했고, 본격적으로 미군의 플로리다에 대한 침공인 '세미놀 전쟁'이 시작되었다. 잭슨은 전쟁동안 인디언과 탈주 노예들을 공격하여 학살하였고, 그 과정에서 두명의 영국인을 체포하여 인디언을 도운 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하기도 하였다. 이후 본래 허가되어있지 않았던 스페인의 시설을 공격하였는데, 펜사콜라와 '바란카스 요새'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잭슨의 이같은 행위는 엄연히 탈법이었으며 규탄받아 마땅했지만, 당시 국무장관인 '존 퀸시 애덤스'는 그를 옹오하였고, 이를 빌미로 스페인을 반협박하여 플로리다 서부 지역을 인수하는데 성공하였다. 의회에서는 잭슨의 행위에 대해 상당한 우려가 있었지만, 그가 세운 전공으로 인해 미국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상당했기 때문에 별다른 결과를 이끌어내지는 못하였다.

대선 도전

1819년 '미합중국 제2은행'의 긴축정책의 여파로 불황이 시작되었고, 이 때문에 군축이 시작되면서 잭슨도 군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대신 1821년 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당시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먼로'에 의해 이후 플로리다 준주의 첫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그동안 잭슨은 다시 사업에 몰두하였는데, 치카소 네이션을 통해 테네시 주 서부의 토지에 대한 투기를 하였고, '멤피스'가 설립되는데 투자하기도 하였다. 또 이즈음 그가 소유하고 있던 흑인 노예는 44명까지 증가하였다고 한다. 그는 건강문제로 임명된지 두 달 만에 주지사를 그만두었지만, 1822년에는 테네시 주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고, 연방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대통령선거는 1824년에 치루어졌는데, 당시에는 연방당은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기 때문에, 민주공화당에서 출마하면 당선되는 것이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민주공화당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나면서, 잭슨을 포함하여 총 4명의 후보가 민주공화당에서 출마하였다. 잭슨은 당시 전쟁 영웅으로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하였기 때문에, 이 선거에서 최다 득표수를 획득하였지만, 과반득표에 실패하면서 공은 하원의원으로 넘어갔고, 잭슨의 독주를 우려한 존 퀸시 애덤스와 '헨리 클레이'가 연합하면서, 존 퀸시 애덤스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에 잭슨과 그의 지지자들은 부정한 거래라며 비난하였고, 이로인해 민주공화당은 분열하여 민주당과 국민공화당으로 분열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선거결과로 인해 잭슨의 명성은 더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에 대한 동정표까지 더해져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사실상 다음 대통령은 잭슨으로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었다. 잭슨은 얼마 안있어 바로 다음 선거에 대한 대비에 들어갔는데, 대선이 3년이나 남은 이듬해인 1825년에 테네시 주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고, 민주당을 결성하여 사실상 선거운동을 시작하였다. 3년간 잭슨과 존 퀸시 애덤스 사이에서는 악랄한 비방 중상이 계속되었고, 1828년에는 잭슨의 아내 '레이첼 잭슨'이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잭슨과 그의 지지자들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상대방의 비방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잭슨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는데, 그는 마지막으로 독립전쟁 참전 경험이 있는 대통령이다.

잭슨 민주주의

잭슨이 대통령으로 집권한 시기는 미국에서 엄청난 사회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는데, 잭슨의 정부도 이와함께 여러 곳에서 변혁을 시도하였다. 당시에는 노동운동이 격화되어 갔으며, 노예제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고, 산업구조의 차이가 북부와 남부의 대립을 격화시켰다. 잭슨은 소위 '엽관제'라고 불리우는 정책을 지지하였는데, 이를 통해 선거에 승리한 세력이 모든 관료를 마음대로 임명 할 수 있게 하려고 하였다. 이는 지금의 시대에 비추어보면 상당히 안 좋은 정책으로 보이지만, 당시에는 기득권 세력이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잭슨의 조치는 정치계에서 비주류로 분류되는 이들이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었다. 또 백악관 앞에 치즈를 놓아두고 민중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백악관 견학 여행을 기획하는 등 자신의 열렬한 지지층인 일반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독려하였다. 또 그는 기본적으로 연방정부보다는 각 주정부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일종의 자유방임적인 정책을 추진하며 작은 정부를 추구하였는데, 동시에 연방정부의 수장이자, 대통령인 자신의 강한 권한은 유지하려고 하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그동안 헌법에 위배되는 사항이 아닌 경우 관례적으로 발동하지 않았던 거부권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자신의 정책에 반대되는 의회의 결정을 견제하였으며, 미합중국 제2은행이 주의 독자성을 떨어뜨린다며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이른바 '은행 전쟁'(Bank War)을 일으켰다. 여담이지만 이 정책에는 사실 자신의 군 경력을 끝내게 만든 원한도 포함되어있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하는데, 그의 막무가내적인 공격은 결국 후에 미국에 경제 공황을 불러오게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과 반대로 주 헌법을 개정하여 주 법관들의 임기를 축소시키고, 직선제를 채택하였으며, 배심제를 강화하는 등 주 사법부의 힘을 약화시키는 정책도 펼쳤고, 주로 남부의 주들이 원한 높은 관세정책의 철폐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결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는 주의 권한으로 연방법을 무시하고 연방에서 이탈할 수도 있다는 움직임이 발생했고, 잭슨은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저지하였으나, 결국 관세를 조정하여 타협하였다. 잭슨은 이때의 일에 대해 일기에 진짜 목적은 연방의 해체와 남부연방의 결성이며 관세는 구실일 뿐이라고 썼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 당시의 공화주의자들은 약한 연방의 테두리 안에서 강한 주권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후에 '남북전쟁'의 형태로 실현되게 된다. 이 시기에 미국은 동양에 진출하기도 하였는데, 잭슨은 특사를 파견해서 '응우옌 왕조'나 '라따나꼬신 왕국'과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이때 제출된 보고서에는 조선 및 중국 북부와 통상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인디언 추방

잭슨의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탄압과 차별은 그가 대통령이되어서도 계속이어졌는데, 그는 소위 인디언 이주 법안(Indian Removal Act)을 제정하여, 46,000명에 달하는 인디언들을 '오클라호마' 등 먼곳으로 강제로 이주 시켰다. 또 이 과정에서 연방정부는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원주민들이 도보로 수천Km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해야 했으며, 그 중 4,000명에 달하는 이들이 추위와 굶주림, 질병 등으로 목숨을 잃었고, 후에 이 비극은 '눈물의 길'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잭슨의 이러한 조치는 기존의 인디언들과 맺었던 조약을 무시하는 행위였으며, 연방대법원의 판결도 무시한 것이었지만 강행되었고, 유명한 연극배우이자 극작가인 '존 하워드 페인'은 당시에 이런 부당한 행위에 분노하여, 잭슨의 탄핵까지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많은 미국의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골칫거리나 적으로 여겼고, 그들의 생명과 재산, 땅과 권리를 빼앗는 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잭슨을 전쟁 영웅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현재도 미국에서 인디언들이 받는 취급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이때와 그리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 잭슨은 1832년에 치루어진 선거에서도 당선되어 재선에 성공하였으며, 멕시코로부터 텍사스를 구매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고, 실제로 텍사스로 이주한 미국인들을 지원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지만, '텍사스 공화국'에 대한 병합을 미루었기 때문에, 그의 임기중에 텍사스가 미국의 영토가 되지는 않았다. 그외에도 잭슨은 미국 대통령 중에 최초로 암살 당할뻔 하기도 하였는데, '리처드 로렌스'라는 도장공이 두 자루의 권총을 준비하여 등뒤에서 그를 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당시 습한 날씨 때문에 두 정의 총은 모두 불발되었고, 리처드는 잭슨에게 지팡이로 공격받다가 도망쳤으나 곧 체포되었는데, 그는 정신질환자로 밝혀져 죽을때까지 병원에 구금되었기 때문에, 암살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인종차별주의자

1837년 잭슨은 은퇴하고도 계속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텍사스를 미국의 영토로 만들기 위한 노력도 계속하였다. 잭슨은 1845년에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약 6개월 후인 그해 겨울에 텍사스 공화국은 미국의 28번째 주가 되었다. 잭슨은 대중 민주주의를 시작한 선도자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악평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잭슨은 다수의 흑인 노예를 소유한 농장주였으며, 그는 최대 300명에 달하는 노예를 소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수많은 인디언들을 무참히 학살하였고, 흑인 탈주 노예들도 잭슨에 의해 많이 희생되었다. 또 결과적으로 그는 군대를 이끌면서 많은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상부의 명령이나 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군인들 사이에서 평판은 좋았지만 가혹한 지휘관이기도 했다. 그는 고집이 쎄다는 의미로 '올드 히코리'(old Hickory)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는데, 이 별명처럼 대통령이되서도 의회나 연방 법원을 무시하고 자신의 정책을 밀어부치는 독선적인 성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미국의 위인으로서 20달러 지폐에는 그의 얼굴이 그려져있다.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