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11대 대통령 「제임스 녹스 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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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테네시 주의 유력 정치가

'제임스 녹스 포크'는 1795년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파인빌에서 태어났다. 포크의 집안은 상당히 부유한 측에 속했는데, 아버지 '새뮤얼 포크'는 농장을 경영하여 측량사로 일하였다. 1803년 포크 집안은 함께 테네시 주의 '덕 리버 벨리'로 이주하였고, 곧 지역 유력자였던 '앤드루 잭슨'과 교류를 하게 되었다. 포크는 어렸을 때는 허약한 체질로 고생하였지만, 성장하면서 건강해졌으며,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농장 경영과 측량에 대해 배웠으며, 이후 집 근처 교회의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교육받기 시작하여, 1816년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2학년으로 입학하였다. 1818년에는 대학을 졸업하여 내슈빌로 돌아왔고, 지역의 저명한 변호사인 '펠릭스 그런디' 밑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다. 1819년부터는 테네시 주 상원에서 서기로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1820년에 테네시 주의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적어도 그가 테네시 주의 하원의원으로 출마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고, 1823년에 하원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또 테네시 민병대 기병연대의 대장으로 임관하여, 테네시 주지사로부터 대령으로 임명되기도 하었다. 사실 이 당시 포크의 가문은 지역의 유력자였으며, 이 시기에 포크와 결혼한 '사라 차일드레스' 또한 지역 유력자였기 때문에, 포크의 성공적인 정치활동은 이러한 배경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 두 가문 모두 잭슨과 가까웠기 때문에, 포크는 자연히 잭슨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영 히코리

1824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잭슨은 가장 많은 표를 확보했지만 과반을 넘지 못했고, 연방 하원의회를 거쳐 '존 퀸시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잭슨과 그의 지지자들은 애덤스가 부정한 거래를 통해 당선되었다고 비난하였는데, 그중에는 포크도 끼어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포크는 연방 하원의원을 목표로 했고, 1825년에는 테네시 주의 연방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열렬한 민주당원이자 충성스러운 잭슨의 지지자였고, 1828년 잭슨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사실상 하원의회에서 잭슨의 대리자로 활동했다. 잭슨도 이러한 포크에게 힘을 실어주었는데, 1835년에는 연방 하원의회의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포크의 행보 때문에 사람들은 잭슨의 별명인 '올드 히코리'에 빗대어 포크를 '영 히코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1837년 미국에서 공황이 일어나면서 민주당과 잭슨, 그리고 새 대통령인 '마틴 밴 뷰런'은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고, 포크도 더 이상 하원의장을 유지하기 힘들어지자, 대신 고향으로 내려와 주지사에 출마하기로 하였다. 당시 테네시 주의 주지사자리는 민주당에서 휘그당으로 넘어가있었는데, 1839년 포크는 어렵게 주지사 자리를 탈환할 수 있었다. 1840년에 벌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포크는 재선에 도전한 밴 뷰런의 부통령 자리를 노렸지만, 민주당은 이 선거에서 참패하였고, 휘그당 후보였던 '윌리엄 헨리 해리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결과는 잭슨과 포크에게는 상당한 위협이었는데, 포크는 1841년에 있었던 테네시 주지사 선거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해리슨이 대통령에 취임한 지 1달여 만에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직을 수행한 '존 타일러'가 휘그당과 심각한 불협화음을 내면서, 정국은 예상하기 어려운 상태로 흘러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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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11대 대통령

1844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에서는 밴 뷰런이 다시 대통령 후보에 도전하였기 때문에, 포크는 처음에는 부통령으로 그의 러닝메이트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의 주요 정치적 이슈는 텍사스 합병과 노예제 문제 였는데, 밴 뷰런은 텍사스 합병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결국 잭슨이 포크를 지지하기로 하면서, 포크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게 된다. 이 선거에서 미국의 공황 문제로 인하여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 입장은 아니었던 민주당은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웠으나, 전임 대통령인 타일러가 임기중 당과 불화를 겪고 제명까지 당했기 때문에 휘그당 또한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 사이에서 포크는 당시 시민들 사이에서 화두였던 미국의 영토 확장을 적극적으로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지지를 확보하였고, 결과적으로 포크는 비록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테네시 주에서는 패배하였지만, 전체 선거에서 어렵게 승리하여 대통령 당선될 수 있었다. 대통령이 된 포크에게는 해결해야 될 문제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관세 문제였다. 이미 이전부터 계속해서 북부주와 남부주 사이에서는 산업의 차이로 인해 관세에 대한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북부의 공업지구는 자신들의 사업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관세를 원했고, 남부의 농업지역은 수입을 외국의 값싼 물품을 이용할 수 있도록 낮은 관세를 원했다. 초기 미국 정부에서는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고, 고정적인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높은 관세 정책을 취하고 있었는데, 포크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남부주들을 위해 낮은 관세 정책을 시작하여, 소위 '워커 관세'라고 불리는 관세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 정책으로 인해 북부지역과 남부지역 간의 갈등이 더 커져 노예제와 더불어 '남북전쟁'이 일어나는 한 계기가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미국의 산업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 포크는 잭슨의 집권시기에 시작한 '은행 전쟁'이 불러온 공황으로 인한 불안한 재정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이를 위해 독립적인 재무성이 세워졌으며, 각 지역에 재무성 분국들을 설치하였다. 다음으로 미국은 영국과의 사이에서 오리건 지역에 대한 국경을 확정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영국도 마찬가지였지만, 많은 미국인들은 오리건에서 더 많은 영토를 원하였고, 포크 또한 대선 공약의 하나로 54도 40분을 경계로 하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현실성이 별로 없는 공약이었으며, 텍사스 합병을 두고 멕시코를 상대해야 했던 포크는 영국이 원하는 대로 49도에서 타협하였다.

미국-멕시코 전쟁

이 시기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바로 텍사스 문제이다. 텍사스에는 멕시코가 아직 스페인에서 독립하기 이전에 일부 미국 이주민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는데, 멕시코는 이에대해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그들이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는 명목으로 인정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계속 커졌는데, 멕시코 정부가 혼란을 겪으면서 텍사스 관리에 소홀한 동안 미국에서 대량의 불법 이주민들이 건너왔으며, 이들은 멕시코의 요구조건을 준수하기는커녕, 멕시코 주민들과 충돌하는 등 갈등을 빚었다. 미국은 자국 시민들이 많은 것을 빌미로 텍사스에 대한 구매를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멕시코는 이를 거부하였다. 텍사스에 사는 이들의 90%를 미국인이 차지할 정도가 되자, 멕시코 정부는 더 견디지 못하고 이들을 다시 돌려보내려고 하였는데, 그러자 미국 이주민들은 무장하고 멕시코 정부에게 저항하였고, 당시 미국의 잭슨 정부는 비밀리에 반란군들에게 무기와 물자를 제공하는 등 텍사스의 독립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막상 텍사스가 독립에 성공하고 미국과의 합병을 원하자 거부하였는데, 당시 텍사스가 여러 나라에 의해 독립국으로 인정받기는 하였으나, 이를 승인할 경우 멕시코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결국 텍사스의 합병은 잭슨 이후로도 밴 뷰런 정부에서도 거부하였지만, 미국의 영토 확장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고, 타일러는 포크의 협력을 받아 합병 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임기가 끝나기 직전에 서명하였다. 결국 멕시코는 이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미국과 외교를 단절해 버렸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끝난 게 아니었는데, 텍사스 주와 멕시코 사이의 국경을 확정하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서로 더 넓은 영토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포크는 군대를 보내어 분쟁 지역에 요새를 건설하는 등 멕시코를 자극하였고, 결국 멕시코의 공격을 이끌어 내어 이를 빌미로 전격적으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사실 이 교전조차 멕시코 국경 안쪽에서 일어난 것으로, 당시 반전주의파에 속해있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포크에게 충돌이 일어난 장소를 정확히 말하라고 하였으나, 그가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담이지만 이러한 치사한 방식은 잭슨이 스페인령 플로리다를 무단으로 침략할 때 사용했던 방법이기도 하며, 이후에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에서 '신미양요'를 일으키기도 하였고, '미서전쟁'의 원인이 된 '메인 호 사건'도 사건 자체와는 별개로 미국 정부의 의도를 의심해 볼 수 있다. 또 베트남 전쟁의 원인이 된 '통킹만 사건'의 경우에는 나중에 미국 정부의 조작이 있었음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어찌 되었든 멕시코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대패하였고, 미국은 이 승리를 이용해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맺어, 텍사스 지역의 국경을 더 유리하게 획정하였으며, 당시 멕시코 영토 전체의 1/3에 해당하는 지역을 헐값을 주고 빼앗아 올 수 있었다. 이 업적은 그 도덕성을 떠나서 실로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하며, 포크가 빼앗아 온 땅에서 석유가 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퇴임과 사망

포크는 그의 임기동안 불과 37일 밖에 휴일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열정적인 업무수행은 상당한 피로를 가져왔을 것이며, 그는 재임 중에 재선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콜레라에 걸려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그가 퇴임한 지 불과 103일 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의 죽음이 대통령 기간 동안의 격무 때문인지, 단지 운이 없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남북전쟁'은 보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노예를 거느리고 농장을 운영하였기 때문에, 남북전쟁의 결과는 그에게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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