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영국 앵글로섹슨족의 몰락 「참회왕 에드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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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긴 망명 생활

'에드워드'는 1003년경 잉글랜드의 왕 '애설레드 2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노르망디의 '엠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잉글랜드는 앵글로색슨족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끊임없는 데인족 바이킹의 침략을 받고 있었고, 데인족인 덴마크의 왕 '스벤 트베스케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기도 하였다. 애설레드 2세는 데인족의 침략에 대해 일부는 격퇴하고, 일부는 조공을 바치고 평화를 얻는 등 고군분투하였지만, 1013년에 스벤은 대대적으로 침략하여 잉글랜드를 정복하였고, 애설레드 2세는 노르망디로 도주하였다. 이듬해 스벤이 사망하자 애설레드 2세는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왕위를 되찾아오기도 하였지만, 그 이듬해인 1015년에 스벤의 아들 '크누트 대왕'이 돌아와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고, 1016년에는 애설레드 2세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아들인 '에드먼드'가 뒤를 이어 계속 싸웠다. 그 해 말 '애선던 전투'에서 에드먼드가 패하면서 평화협상을 맺어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에드먼드는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잉글랜드의 왕위는 다시 데인족인 크누트 대왕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드워드도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를 오가는 생활을 했던 것 같은데,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완전히 노르망디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후 그의 어머니 엠마는 크누트 대왕과 재혼하여 동생 '하레크누드'를 낳았다. 에드워드는 앵글로색슨족으로 잉글랜드의 정식 왕위 후계자이긴 했으나, 잉글랜드의 왕위는 이미 데인족에게 빼앗겼으며, 사실상 영향력 없는 하급귀족이나 다름없는 처지로 노르망디 등지에서 긴 망명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1041년경 배다른 동생인 하레크누드가 잉글랜드로 다시 불러들이기 전까지 계속됐는데, 그 기간은 무려 25년이나 됐다고 하며, 이 때문에 그가 영어를 하지 못해서 프랑스어로 소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잉글랜드의 참회왕

1035년경 크누트 대왕이 사망하고 잉글랜드의 왕위는 하레크누드가 이어받았지만, 1037년부터는 하레크누드의 배다른 형인 '헤럴드 1세'가 섭정의 형태로 잉글랜드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헤럴드 1세는 불과 3년 만에 사망했으며, 하레크누드도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1041년 에드워드를 잉글랜드로 불러들였고, 이듬해에 사망하면서 1043년에 에드워드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고드윈' 백작이 실권을 잡고 있었는데, 비록 에드워드가 정당한 왕위계승자이긴 했지만,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동양과는 다르게 실제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들의 영향력이 막강하였고, 에드워드도 고드윈을 비롯한 다른 백작들의 동의를 받아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1045년에 고드윈은 자신의 딸 '에디스'를 에드워드와 혼인시키기도 하는 등, 고드윈 일가는 잉글랜드 남부를 장악하여 강력한 권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주로 노르만족인 노르망디의 프랑스인들을 고용하여 주변에 두었는데, 이에 대해 고드윈 일가를 견제하기 위함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에드워드는 고드윈을 축출하기도 했었는데, 1051년에 에드워드와 고드윈 사이에서 불화가 생기면서 에드워드의 편을 든 '레오프릭' 백작과 '시워드' 백작이 군대를 소집했고, 고드윈 가문에서도 군대를 소집하여 대치하면서 전쟁 일보직전의 상태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어느 쪽 군대도 적극적으로 싸우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이 때문에 상황이 불리해진 고드윈과 그의 아들들은 잉글랜드를 떠나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에드워드는 고드윈의 딸인 아내 에디스를 수도원으로 쫒아보내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정작 1년 만에 고드윈은 많은 지지를 받으며 잉글랜드로 귀환하였고, 다른 백작들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어쩔 수 없이 고드윈을 다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아내도 수도원에서 다시 데려왔다고 한다. 1053년에는 고드윈이 사망하고, 에드워드도 국내에서 안정된 지지세력을 구축하였지만, 1057년경에는 머시아 지역을 제외한 잉글랜드의 다른 모든 지역의 고드윈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있을 정도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에드워드는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종교와 사냥에 관심을 두었다고 하는데, 영국의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도 그의 통치시기에 재건되기 시작하였으며, 1161년에는 교황에 의해 시성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신앙심에 빗대어 '참회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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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로색슨족의 몰락

1065년에는 고드윈 가문의 '토스티그'가 백작으로 있던 노섬브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반란을 해결할 목적으로 파견되었던 그의 형 '해럴드 2세'는 반란군의 편을 들었고, 그를 쫓아내고 대신 다른 사람을 백작으로 내세웠다. 이에 대해 토스티그가 에드워드와 친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듬해인 1066년에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해럴드 2세가 왕위를 주장했기 때문에,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에드워드는 사망할 때까지 후계자가 없었는데, 해럴드 2세는 자신의 여동생이 에드워드의 아내였다는 것을 명분으로 귀족들의 동의를 얻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러한 부실한 명분을 빌미로 제삼자가 끼어들었는데, 그가 바로 '윌리엄 1세'이다. 윌리엄 1세는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으로 에드워드와는 친척관계인데, 그는 에드워드가 생전에 자신에게 왕위를 이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며 적극적으로 잉글랜드 왕위계승에 간섭하였다. 결국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놓고 벌어진 분쟁은 무력투쟁으로 번졌고, 해럴드 2세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윌리엄 1세가 승리하게 되었다. 이로서 헤럴드 2세는 앵글로색슨족으로 잉글랜드의 마지막 왕이 되었으며, 잉글랜드에서는 노르만 왕조가 시작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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